〈 133화 〉 5. 후계경쟁 후일담(6)
* * *
해당 편은 성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편 이야기에는 커다란 영향이 없는 편이니 성인 요소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그냥 지나가셔도 상관없습니다.
* * *
떨리는 서령의 손이 그를 이끈다.
어디로 가는 지는 뻔했다. 집에는 빌헬름과 베일라가 잠들어 있으니 다른 숙박시설, 호텔 따위로 가려는 것이다.
애쉬는 서령의 그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그녀가 지금 대단한 용기를 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굳이 맞잡은 손을 통해 떨림을 직접 느끼지 않더라도 겉으로 보일 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그것을 느낀 애쉬가 생각했다.
마지못해 끌려가는 형세로 따라가고 있었지만, 지금도 그는 깊이 고민 중이었다.
유성 그룹의 아가씨, 아니, 이제는 회장 후계가 된 유서령은 분명 매력적인 여성이다.
끝이 살짝 웨이브 진, 별하늘을 담아놓은 듯한 흑발과 빛을 빨아들이는 검은 눈동자.
그와 대조되는 하얀 피부는 물론이고, 가느다란 눈가 밑에 톡 찍힌 눈물점은 그녀에게서 처연함과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킨다.
그뿐 아니라 항상 입고 다니는 정장 위로도 충분히 여성스러운 곡선을 드러내는 그녀는 분명 애쉬가 봤던 이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미인이었다.
그런 서령에게 이런 제안을 받고, 일방적인 호의와 사랑을 받는다는 게 자랑스러워질 정도로.
하지만 그럼에도 애쉬는 단번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 몇 달 동안 서령과 함께하며 보았던 그녀의 모습들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순수함을, 때로는 진지함을, 때로는 장난기와 크나큰 슬픔을 보이던 유서령이라는 한 명의 인간을.
그동안 애쉬가 만나온 여성들은 모두 일종의 거래 관계였다.
유흥가에서 만나온 온갖 여성들도, 그 중에서도 가장 친숙했던 ‘달의 꽃’도, 이제는 단순한 거래 관계로 끝나지 않게 되었지만 시작만큼은 마찬가지였던 ‘뱀파이어’의 레이라 플로리스도,
그랬기에 쉽게 취했고, 또 언제든지 쉽게 손을 놓을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언제든 거래 관계가 끝나면 타인이 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애쉬에게 있어서도 지난 몇 개월 동안 함께한 서령은 조금 달랐다.
‘나도 조금은, 소중하게 느끼고 있다는 건가.’
지난 몇 개월 동안 함께하며 마음을 쌓은 것은 서령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애쉬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애쉬 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녀에게 정을 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오히려 그녀를 함부로 안을 수 없었다. 그녀와 그런 일을 가짐으로서 지금의 관계가 깨어질까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순수한 사랑을 표현하는 그녀의 처음을 자신이 가져도 되는지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그런 생각에 애쉬는 뚝 멈춰 섰고, 당연히 그를 이끌어가던 서령도 제자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애쉬…?”
애쉬가 자리에 멈춰 서자 서령이 불안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를 바라보는 서령의 눈동자에서는 설마 마지막까지 거절당할까, 이대로 그가 떠나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떨림이 묻어났다.
그렇게 가만히 선 채 몇 초.
이대로 서령을 안는 것이 맞는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하던 애쉬였지만, 그는 조금씩 젖어가는 서령의 눈동자를 확인한 순간 자신의 머릿속에 가득 차오르던 고민을 한숨과 함께 뱉어냈다.
“후우우….”
지금 이런 고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처음, 서령의 이끎을 거절하지 않은 순간 그는 이미 동의한 것이나 마찬가지.
이제 와서 서령을 두고 자리를 피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것은 서령의 기억에 지우지 못할 상처만을 남길 최악의 선택지였다.
여기서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없어졌으니 남은 것은 하나다.
서령은 애쉬의 복잡한 고민이 담긴 한숨 소리에 뭔가를 오해했는지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역시, 조금 그렇죠?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는…!”
“조용.”
곧장 발걸음을 옮기며 부드러운 그녀의 손을 단번에 잡아끈다. 서령의 손을 잡은 애쉬가 앞서 발걸음 옮기자 서령도 자연스럽게 딸려왔다.
직전까지와는 달리 정 반대로 역전된 형세.
서령을 놓치지 않도록 단단히 잡은 손은 애쉬의 결심을 드러내는 듯했다.
애쉬는 당황한 표정의 서령에게 데리고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자, 잠시. 어디로 가는 거예요?!”
“어디긴.”
방금까지 우리가 가려던 곳이지.
애쉬는 그런 뒷말을 굳이 말하지 않고 생략했지만, 서령도 그의 뜻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애쉬는 앞서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최고의 첫 경험을 만들어준다.’
그것이 마음을 정한 내린 애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서로에게 있어 최고의 결과를 내어줄 방법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서령이 더 이상 무리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했다.
여기까지 먼저 나서서 온 것만 해도 평상시 서령의 모습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적극성과 과감성이 보였다.
그렇다면 여기서부터는 그가 이어받는다.
“봐둔 곳이 있는데, 거기로 가자.”
“네, 네?”
인근을 오가며 봐뒀던 호텔로 향하는 애쉬와, 그런 그에게 끌려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는 서령.
이끌려오는 서령은 애쉬가 자신을 거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 듯 했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수동적으로 따르던 애쉬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자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채였다.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향하던 호텔에 도착한 애쉬는 키오스크 앞으로 향해 순식간에 결제를 마치고 나온 열쇠를 받아들었다.
“가자.”
“…….”
전자키에 적힌 룸 번호를 확인한 애쉬가 발걸음을 옮겼다.
서령은 여기까지 오자 진짜 자신이 한 행동을 실감했는지, 이제는 붉게 달아오른 수준이 아니라 얼굴이 빨갛게 변해서는 말도 없이 그를 뒤따를 뿐이다.
하지만 서령의 맞잡은 손은 놓아질 않았는데, 애쉬는 거기에서 서령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위잉!
도착한 룸의 잠금장치에 전자키를 대자 스캐너가 가동하고, 곧 띠릭. 잠금장치가 풀리며 문이 열렸다.
그 열린 문 앞에 선 애쉬는 행여 놓칠세라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서령을 돌아봤다.
“혹시 마음이 바꼈다면 지금이라도 말해.”
“…괜찮아요.”
룸에 들어가기 전, 애쉬가 마지막으로 묻는 물음에 서령이 대답했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게 보이는 그녀는 진심으로 모든 각오가 끝났다는 듯 결연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사지로 떠나는 것도 아니고 결연하기까지 할 건 뭐란 말인가.애쉬는 그런 그녀에게 보이지 않게 웃으며 열린 문 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급하게 잡은 곳이라 엄청나게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역시 1구역 중심가에 있는 호텔이라 그런지 중층에 있는 곳임에도 인테리어나 가구 등 그 수준이 상당했다.
철컥.
애쉬가 안쪽으로 들어간 직후 서령이 룸으로 들어왔고 문이 닫히며 룸 안은 완전히 바깥과 격리된, 단 둘만의 세상이 되었다.
그러자 서령은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룸에 들어와 문이 닫히기까지 하자 더욱 긴장해서 완전히 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그럼 따뜻한 물로 샤워라도 한다면 긴장이 조금 풀리겠지.
애쉬가 그런 생각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씻자.”
“…같이요?”
씻자는 애쉬의 말에 서령이 소심하게 물었다. 남자와 단 둘이 이런 곳에 들어온 것은 물론이고, 연애도 한번 해본 적 없던 서령에게 그것은 너무도 허들이 높은 행위였다.
“왜, 같이 씻고 싶어?”
애쉬도 그럴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서령의 물음에 픽 웃으며 괜히 농을 던졌다.
상대방이 많이 긴장하고 있다면 이런 식의 짧은 대화로 시작하는 것도 좋았다.
긴장이라는 것은 익숙하지 않기에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현재 있는 장소와 상황에 익숙해지면 줄어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으니.
하지만 긴장한 서령은 그런 애쉬의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곧 애쉬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럼…, 네.”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애쉬의 초인적인 청력은 그런 것 하나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애쉬는 오히려 자신이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설마하니 진짜 같이 씻자는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생각보다 더 과감한데.’
사랑에 빠진 여자는 변한다는 것일까. 이제는 정말 지금 눈앞에 있는 서령이 평소 보던 그 유서령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게 당황하는 것도 잠시, 애쉬는 곧 평정을 되찾았고 서령의 용기에 박수 대신 옷을 벗어 나신을 노출하는 것으로 답했다.
애쉬가 순식간에 옷을 벗어던지자 서령은 그런 그의 행동을 보고 작게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꺅! 뭐, 뭐얼 하는…!”
“씻으려면 벗어야지.”
애쉬가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령이 너무 부끄러워해서 솔직히 그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창피해 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같이 씻자는 말에 그러자고 대답했으면 상대방의 나신을 보는 것 정도는 당연히 생각했어야지.
애쉬는 여전히 고개를 돌릴 생각도 못하고 있는 서령을 지나쳐 욕실로 향했다.
“먼저 들어가 있을 테니까 천천히 따라 들어와.”
투둑.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그가 잡은 룸은 연인들만을 위한 곳이었는지 잠금장치도 없는 샤워실은 방 안에서도 내부의 실루엣이 훤히 보이는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다.
애쉬는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욕조에 물을 받으며 샤워를 시작했다.
쏴아아.
뜨거운 물이 몸을 타고 흐르며 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투둑.
먼저 몸을 씻고 있던 애쉬는 순간 자신의 귀에 포착된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이곳에 들어올 때도 들었던 욕실의 문 소리. 그것을 포작한 애쉬가 고개를 돌려 욕실 입구 쪽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역시나 매끈한 순백의 피부를 드러낸 채 양손으로 조심스레 몸을 가리고 있는 서령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발견한 애쉬가 내심 크게 감탄했다.
‘이건, 상상 이상인데.’
항상 정장에 억눌려 있던 그녀의 나신은 애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대단했다.
백옥 같은 피부는 슬슬 샤워실의 습기를 머금어 반짝이고 있었고, 또 한 손 가득 넘칠 만큼 풍만한 젖가슴과 잘빠지다 못해 가늘다 싶을 만큼 얇은 허리부터 이어지는 엉덩이 라인은 그야말로 예술품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나 그녀의 몸매는 여느 서양인들처럼 체구가 크고 터질 듯 풍만하진 않았지만, 그 이상으로늘씬한 몸매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조각 같다는 말이 지금의 서령에게 어울리지 않을까.
부끄러움을 품은 채 숨겨져 있던 여성성을 드러낸 서령의 모습은 어느 위대한 예술가가 여신을 모방해 빚어낸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애쉬는 자꾸만 홀린 듯 내려가려는 시선을 붙잡고 서령에게 자연스레 말을 건넸다.
“왔네, 이리 와봐.”
“…네.”
자신의 옆으로 오라며 손짓한다. 서령은 그런 애쉬의 말에 주춤주춤하다가도 곧 발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서령이 다가오는 모습을 한 차례 눈으로 훑은 애쉬는 자신이 들고 있던 샤워볼에 젤을 받아 거품을 낸 뒤,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팔뚝에서부터 그것을 문질렀다.
“읏….”
“긴장 풀어. 아직 안 잡아먹으니까.”
“아직, 이요…?”
“그래, 아직.”
스윽, 스윽.
샤워볼의 거품이 팔뚝부터 번져간다. 애쉬는 자신의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는 서령의 매끈한 피부를 음미하며 계속 샤워볼을 움직였다.
팔뚝에서 팔목, 손까지 내려가고, 그 다음에는 어깨를 타고 등 뒤로 향한다.
애쉬는 목욕 시중을 드는 하인이 봉사하듯 몸을 파르르 떠는 서령을 정성껏 문지르면서도 상대방이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인, 하지만 결코 중요한 부위는 건들지 않는 은근한 터치를 계속해서 이어갔다.
“흐으으….”
거품이 몸을 반쯤 덮었을 무렵 서령이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애쉬의 손길에도 익숙해진 듯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 놀라던 반응도 사라진 상태다.
그것을 느낀 애쉬는 곧장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샤워볼을 툭 내려놓고, 맨손으로 지금까지 해왔던 과정을 계속하는 것이다.
“햣…!”
아니나 다를까 샤워볼과는 확연히 다른 손길의 느낌에 화들짝 놀란 서령이 비음을 냈지만, 애쉬는 놀이는 끝났다는 듯 더욱 진한 터치를 이어갔다.
양손을 겨드랑이 아래로 넣어 젖가슴 주변을 살살 매만지고, 민감한 옆구리와 갈비뼈 라인을 타고 늘씬한 복부를 쓸어본다.
그러던 중에 배꼽에도 쏘옥 손가락을 넣어보기도 하는 등 장난을 치기도, 끈적한 손길을 선사하기도 하던 애쉬는 어느 정도 서령의 몸이 달아오른 것을 느끼자 더 깊숙한 곳까지 손길을 뻗어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뻗어나가려 했다. 서령이 그의 두 손을 붙잡지 않았다면 말이다.
계속된 애쉬의 손길에 그의 품에 등을 기댄 채 숨을 작게 헐떡이던 서령이 처음으로 제지를 걸었다.
“흐읏, 자, 잠깐만요….”
“왜?”
애쉬가 서령의 제지에 순순히 손을 멈췄다. 오늘은 그녀를 위해 충분히 봉사하고, 그녀가 원하는 때에,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처음을 갖겠다고 생각한 그였다.
직접적인 관계를 갖기 시작한 후에도 충분히 그녀를 배려하겠다 생각한 애쉬였는데, 이런 전희 과정에서조차 자제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만약 여기서 무서워서 못하겠다고 한다면, 아쉽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대방이 두렵다고 하는데도 억지로 한다면 그것은 그냥 강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만 예상이 빗겨나간 게 몇 번째일까. 서령이 애쉬를 멈춘 이유는 그가 생각했던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애쉬…. 더 하기 전에잠깐 귀 좀 빌려 주세요….”
“귀?”
“네….”
뜬금없이 귀를 빌려달라는 서령.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일까. 애쉬는 그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곧장 고개를 내렸다.
그에 서령은 자신의 숨결이 애쉬의 귓가에 닿을 만큼 다가왔다.
그리고 애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지, 하고 의문을 품은 순간.
“…사랑해요. 이 말 만큼은 해보고 싶었어요.”
그에게 속삭이며 입을 맞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