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136화 (136/230)

〈 136화 〉 5. 후계경쟁 ­ 후일담(9)

* * *

­ 삑, 삐빅.

해가 중천에 뜬 대낮.

아직까지 잠들어 있는 두 남녀의 침실에 구식 단말기의 전자음이 작게, 하지만 지속적으로 울렸다.

애쉬는 그 낮은 소음에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흐아아암…. 무슨 연락이야.”

침상 옆에서 계속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단말기를 집어 든다.

상체를 일으키자 아직까지 자신에게 감겨있던 서령의 팔이 스르륵 떨어지는 것을 느낀 애쉬는 더 이어지는 소음으로 그녀가 깨지 않도록 알람을 끈 뒤 화면을 펼쳤다.

메시지나 통화 등 연락이 오면 확인할 때까지 지속적인 알람이 울리도록 설정된 단말기.

그것을 통해 단잠을 깨운 연락의 주인은 다름 아닌 빌헬름과 베일라였다.

*

빌헬름 님에게서 수신한 메시지입니다.

08 : 43 ­ [애쉬 씨 지금 어디에요?]

08 : 43 ­ [경호원들이 오늘도 시간 맞춰서 왔는데 이사님이랑 애쉬 씨가 없어서 찾고 있어요]

09 : 27 ­ [일단 제가 다른 비서한테 연락해서 급하게 병가 처리는 했어요]

[급한 일이 없으니 망정이지 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네요]

09 : 30 ­ [메시지 확인하시면 연락 주세요]

*

아줌마(베일라) 님에게서 수신한 메시지입니다.

07 : 40 ­ [애쉬 언제쯤 들어오십니까]

08 : 10 ­ [출근 준비를 하려면 슬슬 들어와야 하는 시간입니다]

08 : 31 ­ [경호원들이 도착했는데 아직입니까?]

09 : 03 ­ [어제 저녁에 둘이서만 나가는 걸 눈감아줬는데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연애도 좋지만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일단 메시지를 보는 대로 최대한 빨리 돌아오십시오]

10 : 13 ­ [...이따 보죠]

………

……

*

“아.”

쏟아지는 메시지의 향연을 바라보던 애쉬가 작게 탄식했다.

그러고 보면 오늘은 쉬는 날이 아니었다. 어제의 작은 파티는 그냥 좋은 일이 있었기에 열었던 것이다.

이미 애쉬에 대해 알 만큼 아는 빌헬름은 메시지를 확인한 후 연락을 달라며 담백하게 끝냈지만, 베일라의 메시지는 몇 분에서 몇 십 분을 간격으로 이어지고 이어져 오후가 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애쉬는 창 밖에 떠오른 해를 한번 보고는 단말기의 시간을 바라봤다.

[14 : 11]

화면에 떠오른 숫자는 무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애쉬는 그냥 단말기 화면을 뚝 꺼버렸다.

“…뭐, 어쩔 수 없지.”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그것을 바꿀 방법은 없었고, 그나마 걱정되는 업무 문제는 빌헬름이 처리를 해뒀다니 굳이 지금 서령을 깨울 필요도 없어보였다.

그쪽 일에서 신경을 끈 애쉬는 얼마나 지친 건지 자신의 옆자리에서 깨어날 생각을 않는 서령의 얼굴을 바라봤다.

“못 일어날 만도 하지.”

아직 눈물 자국이 선명한 그녀의 얼굴은 애쉬에게 여러 복잡한 감정을 떠오르게 했다.

어젯밤부터 시작된 그녀와의 관계는 결국 새벽을 넘어 해가 떠오르는 아침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남성 경험이 없던 서령은 첫 관계부터 지쳐보였으나 그녀는 자신의 몸을 생각지 않고 애쉬에게 애원해왔다.

‘그럼 차라리 저를 부서질 정도로 안아주세요, 애쉬’

그녀 스스로 원하고 졸라온 것이었기에 그것을 괴롭힘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었으나, 관계를 갖는 애쉬 스스로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 그녀의 매달림은 처절하고, 또 애처로웠다.

“…몸은 괜찮을까 모르겠네.”

지난밤의 일을 떠올린 애쉬는 뒤이어 자신이 했던 행동도 떠올렸는데, 떠오르는 것들 하나하나가 워낙에 거칠었던 터라 연약한 서령의 몸이 걱정됐다.

결국 애쉬는 이불을 들춰 세상의 빛 아래 서령의 몸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눈에 들어온 그녀의 모습에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으음….”

하얀 서령의 몸은 이곳저곳 할 것 없이 그의 잇자국과 붉은 손자국, 그리고 옅은 멍으로 가득했다.

그녀가 바라고 애원하던 대로 움직이다보니 생겨난 것들이었다.

“하….”

그것을 확인한 애쉬는 어째서 전날 밤의 자신이 서령의 뜻대로 모두 따라줬을까 후회했다.

굳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다시 한번 작은 죄책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바르는 약이나 가져오라고 해야겠군.’

애쉬는 살짝 걷었던 서령의 이불을 다시 잘 덮어주고 룸 내부의 호출벨을 통해 호텔 로비로 약을 주문했고, 호텔 측에서는 벨보이를 통해 그가 주문한 것을 금방 가져다주었다.

“팁.”

“아, 감사합니다.”

철컥.

애쉬는 감사의 인사와 함께 돌아가는 벨보이를 확인하곤 문을 닫았고, 받아온 약을 뜯었다.

그리고 다시 서령의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약을 펴발랐다.

“많이도 깨물었구만.”

자신의 잇자국과 붉어진 피부에 약을 발라주던 애쉬가 중얼거렸다.

팔이나 목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곳은 물론이고, 옆구리처럼 안쪽에 위치한 부분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고개를 저으며 서령의 다리 쪽에 약을 발라주던 애쉬는 어느 순간 서령의 숨결이 바뀐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서령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순간, 그녀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잠시 말없이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애쉬가 먼저 인사했다.

“일어났네.”

“…네.”

서령이 짧은 대답 직후 입을 꾹 다물었다.

몇 초 정도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평소 둘의 사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였으나, 지난밤에 있었던 일이 일이니 만큼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그런 분위기에서 대화를 이어가길 포기한 애쉬가 멈췄던 손을 움직여 하던 것을 계속했다.

“고마워요, 남은 곳은 제가…읏!”

그에 이제부터는 자신이 하겠다며 몸을 일으키던 서령이었지만, 그녀는 상체를 전부 일으키지도 못하고 다시 침대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깨어났을 때부터 온 몸이 욱신거리긴 했는데, 몸을 일으키려니 전신에서 근육통을 비롯한 온갖 통증이 몰려온 것이다.

애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용히 남은 부분에 약을 발라주었다.

“억지로 일어나려고 하지 마.”

“…네.”

몸을 제대로 거동할 수 없는 서령은 얌전히 애쉬의 손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몸에 약을 바르는 것뿐만 아니라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까지도.

*

“이사님! 애쉬 씨!”

서령의 집 근처.

애쉬와 그의 등에 업혀있는 서령을 발견한 베일라가 경호원들과 함께 뛰어왔다.

처음에는 애쉬에게 두고 보자는 메시지를 날려대던 그녀였지만, 오후가 되어서까지 답장하나 없자 정말 수색을 나서야 할지 걱정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서령은 걱정을 덜었다며 화색을 띤 채 다가온 베일라를 보고 애쉬의 등에서 내려섰다.

한 차례 휘청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멀쩡한 척 똑바로 설 수 있었다.

“베일라.”

“…이사님, 괜찮으십니까?”

“저는 괜찮아요. 그냥 몸이 조금 아파서….”

“그, 그렇습니까.”

어딘가 움직임이 불편해 보이는 서령에게 물은 베일라였지만, 그녀는 돌아온 서령의 대답에 서령이 전날 밤 애쉬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얼굴을 붉혔다.

밤늦게 나간 남녀가 다음 날까지 함께했다면 지난밤에 있었던 일은 뻔하지 않은가.

전날에도 좋은 시간을 보내줬던 베일라였지만,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연락에 걱정하다보니 그것을 잊고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이사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러던지.”

애쉬는 베일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서령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 그녀가 베일라에게 업히는 것을 도왔다.

안 그래도 어색한 분위기에 불편하던 차였는데, 잘 됐다면 잘 된 일이었다.

서령을 업은 베일라가 앞서 그녀를 집으로 데려갔고, 애쉬는 천천히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신 겁니까. 어째서 이사님이 저렇게 되신 건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틀 정도는 더 업무를 볼 수 없으실 것 같더군요.”

“왜, 부러워?”

“큭, 부럽긴 뭐가 부럽단 말입니까!”

집에 돌아온 일행. 서령을 그녀의 방 침대에 눕히고 온 베일라가 애쉬의 말에 발끈해서 외쳤다.

애쉬의 놀림도 놀림이었지만, 몇 시간동안 서령과 그의 안위를 얼마나 걱정했던가.

“아무튼 이사님께서 더 무리하지 않으시도록 협조해주십시오.”

“그건 걱정 마.”

베일라는 애쉬와 서령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그렇게 된 이상 더 뭔가를 할 수도 없었다. 금방 풀릴 것 같지도 않았고.

베일라와 약속 아닌 약속을 마친 애쉬는 자신도 방으로 돌아가 쉬었고, 하루, 이틀, 사흘…….

계속해서 시간은 흘렀다.

진작부터 훌쩍 다가와 있었던, 애쉬가 모든 의뢰를 끝마치고 떠나게 되는 날까지.

* * *

“뭔가 찜찜한 마무리네요.”

짐을 챙긴 빌헬름이 애쉬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서령과 애쉬의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빌헬름은 물론이고 그런 방면에 눈치가 없는 베일라까지도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를 읽을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식사 자리에서 모일 때도, 후계경쟁 때부터 시작되어 아직까지 계속되는 주간 모임 때도.

둘은 간단한 대화만 나눌 뿐 이전처럼 친밀한 느낌은 사라지고 어색함만이 남았으니까.

서령과 애쉬 사이에 있던 일을 모르는 빌헬름이나 베일라로서는 무엇 때문에 둘 사이가 그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지막까지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는 것은 그들에게도 영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아가씨는?”

“…방에 계십니다.”

“그렇구만. 가자, 빌헬름.”

“네? 이사님 얼굴은 안 뵙구요?”

베일라의 대답을 들은 애쉬가 짐을 챙겨 떠나려하자 빌헬름이 당황한 기색으로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긴 시간 동안 함께한 사이인데, 마지막에 얼굴도 보지 않고 떠나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하지만 애쉬는 오히려 그러는 게 서령에게도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다릴 테니까 가서 인사나 하고 오던지.”

“…진짜 안보고 가시게요?”

“서로 불편한 상태에서 굳이 볼 필요는 없지.”

애쉬는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미련을 남겨주고 싶지 않았다. 또,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다면 그 자신에게마저 영향이 있을 것 같았고.

이미 한번 그녀를 거절하여 상처를 준 그가 무슨 면목으로 나오지 않고 있는 그녀를 찾아간단 말인가.

어차피 앞으로 유성 그룹의 회장이 될 그녀에게 애쉬 론모어라는 존재는 오점만이 될 터.

그냥 지금부터 완전히 멀어지는 것도 서로에게 나쁘지만은 않은 선택이다.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선 애쉬의 귓가에 이 자리에 없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정말 이대로 간다고요?”

분한 듯한, 그리고 그보다 더욱 비참한 듯한 목소리. 발걸음을 옮기려던 애쉬는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여성의 가벼운 발소리가 그의 뒤로 다가온다.

“이, 이사님….”

빌헬름이 그 목소리의 주인을 불렀다.

애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소리의 주인, 서령을 향해 돌아서려 했으나 등에 폭 안겨드는 그녀의 체온에 그것을 멈췄다.

“너무해요…. 정말, 정말로 너무해요….”

울고 있는 것일까. 잔뜩 젖어있는 목소리가 들린다.

서령은 애쉬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 울먹이며 소리쳤다.

“어떻게 끝까지 외면할 수가 있어요…! 내가 그런다고 포기할 것 같아요? 절대 아니에요!”

“…유서령.”

“돌아보지 마요!”

울고 있는 서령을 돌아보려던 애쉬가 그녀의 거친 목소리에 움찔, 하고 멈춘다.

“기다려요, 다음에는 내가 갈 테니까….”

회장이 돼서,

더 멋진 여자가 돼서,

당신이 반할 수밖에 없는 여자가 돼서.

“그래서 찾아갈 테니까…….”

그때는 당신이 사랑한다며 무릎 꿇고 빌지 않는 이상 봐주지 않겠다고 흐느끼며 장담하는 서령에게 애쉬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위로도, 거짓된 사랑의 고백도 아닌.

“…그래, 기대할게.”

그저 기다리겠다는 말.

Ep 2. 유서령, 유성 그룹, 후계경쟁– Fin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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