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 6. 넷 아이돌(막간)
* * *
석양의 붉은 빛으로 가득한, 허리까지 내려오는 적발의 스트로베리와 어깨까지 찰랑거리는 물빛의 푸른 머리칼을 잘 땋아 정리한 블루베리.
둘 모두 관리를 잘 받는 듯 하얀 피부는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느낌을 흘린다.
아직 미녀보다는 미소녀라는 말이 더 어울릴 외모의 쌍둥이.
어딘가 자신만만하고 의기양양한 스트로베리는 물론이고, 조용하고 차분하며 어떻게 보면 조금은 멍해보이기도 하는 분위기를 띄는 블루베리 또한 영상 속에서 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둘의 분위기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빌헬름이 스트로베리라고 했던 붉은 머리칼의 분위기는 둘을 따라온 카메라맨의 카메라 렌즈가 바닥을 향하자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이 정도면 도입부로 쓸 수 있겠지?”
“예. 저쪽 분의 리액션이 워낙 크고 자연스러워서 괜찮을 같습니다.”
“그럼 일단 이쯤에서 컷해. 휴…, 거리가 거리다보니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지친다니까. 아, 여기 앉아도 되지?”
카메라 렌즈가 더 이상 자신을 비추지 않자 순식간에 낮아지는 텐션.
사무소의 주인으로 보이는 애쉬에게 물었지만, 그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빌헬름 맞은편 소파 한 쪽을 차지하고 앉는다.
그것을 본 애쉬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보다 나이가 못해도 열댓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카메라맨과 초면인 자신에게 반말을 찍찍 내뱉는 것도 그렇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멋대로 행동하는 게 버릇이 없기 짝이 없다.
“…죄송합니다.”
블루베리 쪽은 차분한 표정으로 빨간 머리칼, 스트로베리의 행동을 대신 사과하는 것을 보니 문제인 쪽은 저쪽 하나인 것 같았지만, 애쉬는 누군가 대신 사과했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위인이 아니었다.
제 딴에는 위험한 빈민가까지 온다고 경호원들을 몇 고용한 것 같았지만,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
단숨에 스트로베리에게 다가간 애쉬가 그 뒷덜미를 잡고 들어올렸다.
그러자 얼떨결에 생선집 주인에게 걸린 도둑고양이 같은 꼴이 된 스트로베리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무, 무슨 짓이야!”
“또 반말?”
애쉬는 가볍게 들어 올린 스트로베리를 입구 쪽의 경호원들을 향해 던졌다. 어디까지나 부상 없이 겁만 줄 요량으로 그렇게 강하게 던지지는 않았지만, 경호원들은 그마저도 허겁지겁 움직이며 던져진 스트로베리를 받아냈다.
“꺄악!!”
“어어…?”
“받아!”
설마 애쉬가 다짜고짜 던질 줄은 몰랐다는 듯 얼빠진 두 명의 경호원이 빨간 머리와 함께 바닥을 구른다.
나름 경호원은 경호원이라는 것인지 그 와중에도 보호 대상에게 아무런 상처 없이 받아내긴 했지만, 애쉬는 그들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이딴 것들도 경호원이라고.’
아무리 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곤 해도 제대로 된 경호원이라면 반응해야했다. 하지만 저 모습은 뭔가. 갱보다도 못한 수준이 아닌가.
물론, 비교 대상이 레이라의 부하들 중에서도 친위대라고 할 수 있는 녀석들이긴 했지만, 그 정도 되지 않는 이상 이 슬럼에서 안전을 보장할 순 없다.
아니, 그 정도라고 해도 위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대체 뭘 믿고 나섰는지.
애쉬가 그렇게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한 차례 경호원들과 바닥을 구른 빨간 머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나, 날 던졌어? 당신 진짜 내가 누군지 몰라!?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수십만이 넘는 내 팬클럽 회원들이…!”
“그럼 뭐, 네 팬클럽 회원들이 당장 지켜주기라도 하냐?”
더 듣지 않아도 뻔한 얘기. 심드렁한 애쉬의 목소리가 스트로베리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빌헬름의 얘기를 떠올려보자면 굉장히 유명한 넷 아이돌인지 뭔지 하는 것 같은데, 최근 들어 이 녀석들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제법 유명하다는, 비슷한 부류의 개인 방송인 따위가 많이 들른 편이었다.
모두 최근 방영된 유성 그룹 관련 뉴스 탓이다.
어디서 알음알음 주워듣고 왔는지, 애쉬에게까지 찾아온 놈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녀석들이었다.
지금처럼 경호원의 구색이라도 맞춰서 찾아오는 경우는 다행이다.
제 매니저, 혹은 편집자 정도 되는 일행과 겨우 두 셋이서 사무소까지 슬럼 탐험을 들어오질 않나, 제 같잖은 유명세가 안위를 지켜주기라도 할 것 마냥 카메라 하나만 달랑 들고 찾아오는 놈까지.
그 종류는 무척이나 다양했고, 그런 머저리들을 대하는 애쉬의 태도는 일관적이었다.
모조리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내는 것.
괜히 한 명한테 어울려줬다간 더 귀찮아질 것 같고, 그렇다고 찾아오는 대로 쓱싹해버릴 수도 없으니 그냥 내쫓는 것이다.
돌아가는 길이야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었고.
네가 뭐하는 사람이고, 팬클럽인지 뭔지가 몇이나 되던 명백히 관심 없다는 듯한 애쉬의 목소리에 빨간 머리가 얼굴을 붉힌 채 치를 떨었다.
“이, 이이…!”
그렇게 스트로베리가 제멋대로 화를 쏟아내기 위해 입을 열려던 때. 물빛 머리칼의 블루베리가 그녀를 말렸다.
“그만해, 페일. 사과드리자.”
“그치만, 미온! 날 던졌는데…!”
페일이라 불린 스트로베리가 억울하다는 듯 블루베리, 미온을 바라봤다.
그러나 차분한 블루베리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블루베리는 다시 한번 반복했다.
“…사과드리고 처음부터 잘 말씀드리자.”
“사, 사과까지? 내가 잘못하긴 했는데, 저쪽도 날 던졌잖아! 그럼…….”
“…….”
그걸로 된 것 아니냐. 그렇게 말하려던 것 같은 스트로베리였으나,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블루베리의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결국 스트로베리는 자신의 쌍둥이인 블루베리의 강권에 못 이겨 애쉬에게 사과해왔다.
“힝, 알겠어.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됐지!”
“됐지?”
“…대신 사과드려요. 죄송합니다.”
끝까지 불손한 태도를 숨기지 못하는 스트로베리의 목소리에 블루베리가 함께 사과해왔다.
그러자 아직 마음 속 깊이 납득하지 못한 것인지 스트로베리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뭐? 내가 사과 했잖아! 그런데 왜 미온이 사과 받는 거야!”
“허, 내가 시켰냐?”
“페일.”
“으으…!”
분해 못 참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는 스트로베리였으나, 애쉬는 그쪽에 더 이상 눈길도 주지 않고 소파 향했다.
건성인 사과는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저 빨간 머리 꼬맹이와 드잡이질이나 하고 있을 생각은 없다.
빌헬름을 깨우고 다시 일에 집중할 요량으로 움직인 애쉬였으나, 스트로베리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잠깐! 사과했으니 우리랑 얘기는 해야지!”
“너희랑 할 얘기 없으니까 가라.”
“뭐? 봐봐, 미온! 사과만 받고…!”
“하아….”
빨간 머리 꼬맹이, 스트로베리에게 붙들린 블루베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였던 쌍둥이인 그쪽도 감당이 되지 않는 모양.
애쉬는 그 베리 트윈즈를 무시하고 빌헬름을 깨웠다.
“일어나.”
“음….”
빌헬름이 침음을 흘리며 눈을 뜬다.
눈을 뜬 그는 곧장 자신의 앞에 보이는 애쉬에게 물었다.
“제가 언제 잠들었죠? 아니, 그보다 꿈에서 굉장한 걸 봤는데…. 분명 베리 트윈즈가…….”
“미온, 진짜 여기가 맞는 거야?”
“응.”
“그럼 진짜 저 칙칙한 회색이 영상 속의 그 남자라고?”
“아마.”
“꾸, 꿈이 아니었어?!!”
애쉬에게 쓰러지기 직전의 상황을 묻던 빌헬름이 들려온 쌍둥이의 대화 소리에 눈을 돌렸다가 기절할 듯 놀라며 외쳤다.
애쉬에 의해 일어난 직후에는 아직 정신이 덜 깬 듯한 빌헬름이었으나, 베리 트윈즈를 발견한 그의 눈은 더 이상 흐리멍텅하지 않았다.
현실에서 자신의 우상을 만난 것 마냥 눈이 반짝반짝해져서는 벌떡 일어난 빌헬름이 순식간에 베리 트윈즈에게 다가가 감격한 듯 무릎까지 꿇고 부탁했다.
“베리 트윈즈를 현실에서 보다니! 진짜 꿈만 같아요! 그래, 싸, 싸인! 혹시 싸인 좀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응? 아, 베리베리단이라면 얼마든지.”
“네.”
“우와악!! 조, 종이, 종이!”
자신의 우상에게 사인을 받는다는 것에 눈이 돌아간 빌헬름이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종이와 펜을 찾았고, 때마침 눈치 좋게도 다가온 샤인이 챙겨온 물건을 건넸다.
“빌헬름 님.”
“아! 고마워, 샤인! 여기요!!”
두근두근, 반짝반짝.
빌헬름이 종이와 펜을 내밀자 붉고 푸른 쌍둥이는 그것을 받아 능숙하게 펜을 놀렸다.
“뭐라고 적어줄까?”
“팬클럽 No.4호 빌헬름 메이젤에게, 라고 적어주세요!”
“알겠어. 팬클럽 No.4호 빌헬름 메이젤에게. 근데 진짜 팬클럽 4번이야?”
“네! 옛날 원룸에서 방송할 때부터 봤고, 최근에는 구두도 하나 보냈었는데….”
“아, 그 르벨라의 에나멜 구두! 그거 진짜 잘 받았어. 어제도 신었다니까.”
“저, 정말요? 아아….”
빌헬름은 다시 한번 숨이 넘어갈 듯한 감격에 정신을 잃을 뻔 했으나, 지금 자신의 우상을 현실에서 영접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떻게든 정신줄을 붙잡을 수 있었다.
“자, 미온.”
“응.”
붉은 머리칼의 스트로베리에 이어 푸른 머리칼의 블루베리가 종이와 펜을 넘겨받아 사인한다.
일련의 촌극을 바라보고 있던 애쉬는 빌헬름이 멀쩡한 듯하자 딱 봐도 귀찮아 보이는 쌍둥이의 처리를 맡겼다.
“네가 잘 아는 것 같은데 책임지고 돌려보내라.”
“아니, 사과까지 했는데 왜 자꾸 돌려보내려는 거야? 분명 그쪽한테도 좋은 얘기가 될 거라니까!”
“마, 맞아요, 애쉬 씨. 얘기만이라도 잠깐 들어 주세요….”
순식간에 붉은 머리칼의 스트로베리에게 넘어간 빌헬름이 그녀의 목소리에 동조해왔다.
그에 애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빌헬름에게 물었다.
“너 오늘 일하나 같이 하자고 찾아온 거 아니었냐?”
저 아이돌 쌍둥이가 경호원과 카메라맨을 대동하여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걸 보면 분명 오늘 뭔가 바라는 게 있을 터.
그게 무슨 일이든 간에 짧은 시간 안에 끝날 일은 아닐 것이었다.
빌헬름 또한 애쉬의 사무소 일이 끝나자마자 무슨 일 하나를 같이 하자고 찾아온 것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시간이 겹치지 않겠는가.
자기 일이 분명히 먼저 있을 텐데 이렇게 편드는 것을 보면 애쉬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빌헬름은 이미 이성을 잃은 것인지 애쉬에게 아무렇게나 얼버무렸다.
“그런 건 나중에 하면 돼요. 급한 것도 아니니까.”
“…의뢰까지 받았다면서.”
“괜찮아요, 하루 정도는.”
시간이 지체되면 거기에 따른 부담금을 지불하면 된다.
빌헬름은 자신이금전적, 시간적 손해를 보면서까지 진심으로 베리 트윈즈 쌍둥이의 일을 해달라고 하고 있었다.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군.’
애쉬는 빌헬름과 앙큼하게도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빨간 머리 꼬맹이를 보며 고민했다.
그냥 빌헬름의 부탁이고 뭐고 무시하고 쫓아낼까, 말까.
그러자 빌헬름은 그런 애쉬에게서 고민의 기색을 읽었는지 어떻게든 쌍둥이를 돕기 위해 매달려왔다.
“안돼! 어떻게 찾아온 팬미팅 기회인데, 이대로 보낼 순 없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애쉬 씨!”
“…저 꼬맹이들이 그렇게 좋냐?”
“네! 그러니까 제발 좀 도와주세요!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아시잖아요! 이대로 보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저도 죽고 말 거예요!”
빌헬름은 저 쌍둥이의 목숨이 자신의 목숨이라도 되는 듯 이대로 내보내면 엉엉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다.
“뭐? 무슨 소리야, 우리도 경호원들이 있는데.”
아직 현실을 모르고, 분위기도 읽지 못한 스트로베리가 한 마디 더했지만, 그것은 그녀의 팬을 자처하는 빌헬름도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다.
쓸데없이 말을 덧붙이는 스트로베리를 무시한 애쉬가 빌헬름과 쌍둥이를 한 번씩 돌아봤다.
눈물이라도 흘릴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빌헬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빨간 머리.
그리고 조용히 결론을 기다리고 있는 블루베리까지.
쌍둥이는 빨간 머리의 –1과 파란 머리의 +1이 더해 0.
거기에 빌헬름이 +3쯤 되니 받아줄만 한가?
“애쉬 씨! 제발!”
머릿속에서 자신만의 계산기를 두드려본 애쉬는 괜히 자신을 귀찮게 만드는데 동조한 빌헬름에게 심술부리듯 시간을 끌다가 결국 물리적으로 진짜 매달려온 빌헬름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 알겠어. 알겠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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