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150화 (150/230)

〈 150화 〉 7. 총잡이들의 여명(6)

* * *

잿빛 은발의 해결사가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듯 손잡이에 손을 얹고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건방진 애송이가.”

­ 탁.

데일 리퍼슨은 반쯤 남은 시가를 그대로 바닥에 떨구곤 구둣발로 짓이겼다.

자신의 실력을 어느 정도 보여줬음에도 끝까지 주제를 모르고 덤벼들다니. 여타 애송이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설마 그가 보여준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지 못한 걸까?

‘아니.’

그건 아니다.

저 칙칙한 은발의 애송이는 분명 그 모든 것을 똑바로 보고 인지했다. 애초에 그게 불가능할 정도였다면 그의 아들인 게빌 리퍼슨이 손목을 내어주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보고도 저런 태도를 보인다는 건데….

설마 진심으로 자신을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건가?

자신에 대한 믿음, 자신감, 칼잡이.

그 모든 요소가 겹치자 데일 리퍼슨은 애송이, 애쉬 론모어에게 과거 그가 알던 누군가의 모습이 얼핏 보이는 것 같았다.

기억 속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단장! 오늘도 도전을 받아주세요!’

과거 그의 부하였던, 다른 칼잡이.

분명 녀석은 예의바른 놈이었는데, 어째서 이런 싸가지 없어 보이는 슬럼의 애송이에게 그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일까.

애쉬의 건방진 태도를 보고 단박에 박살을 내줄까 했던 데일 리퍼슨의 마음이 조금 바뀌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금방이라도 애쉬를 잡아먹을 것 같던 그 야수의 눈빛에도 변화가 일었다.

먹잇감을 보는 것 같던 포식자의 눈빛이 뜨뜻미지근하게 바뀐다.

데일 리퍼슨은 리볼버 두 자루를 다시 품에 넣으며 말했다.

“순서를 지켜라, 애송아.”

“뭐?”

갑작스럽게 바뀐 분위기, 데일 리퍼슨의 입에서 나온 뜬금없는 말에 애쉬가 의문을 표했다.

데일 리퍼슨은 그런 애쉬를 바라보며 품 안을 뒤져 담뱃갑을 꺼내 시가 한 대를 물었다. 그리곤 커터로 끝을 잘라낸 뒤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한 달이다.”

“뭐가 한 달인데.”

“네가 저 얼간이의 손목을 작살냈으니 한 달 동안 여기서 그 빈자리를 채우면 원하는 만큼 붙어주마.”

“…그러니까 나보고 여기서 한 달 동안 일하라고?”

“싫다면 파티나 즐기다 나가라.”

후우. 새 시가를 한번 빤 데일 리퍼슨이 담배 연기를 흘리며 대답했다.

애쉬는 그런 데일 리퍼슨의 뻔뻔한 태도에 표정을 구겼다.

“살려 보내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할 것이지,대신해서 한 달 동안 일하라고? 내가 왜?”

“무급은 아니다. 저 놈이 받던 만큼은 주마.”

“무급이든 유급이든.”

애쉬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돈을 받든 안 받든 어느 쪽이든 똑같다. 결국 이곳에서 한 달이나 있어야 상대해주겠다는 것 아닌가.

유성 그룹 때처럼 일과 목적이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고, 또 엄청난 금액의 보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한 달씩이나 묶여있을 생각은 없었다.

애쉬는 일부러 도발 섞인 물음을 던졌다.

“내가 여기서 칼이라도 들고 날뛰겠다면 어때?”

저 카우보이모자들은 절대로 자신을 막을 수 없다. 그럼 결국 당신이 나서야 하지 않을까?

그런 뜻을 담은 애쉬의 물음에 데일 리퍼슨은 시가를 문 채 그저 애쉬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쏴아아. 그를 향해 서늘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애쉬는 그 익숙하면서 낯선 감각에 일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이건….’

아무것도 닿지 않았음에도 따끔따끔, 예리한 바늘로 피부를 찔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피부에 와 닿는 옅은 바람 하나하나까지도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변한 것 같은 기분. 그의 털끝 하나하나까지 삐죽삐죽 서는 것 같았다.

살기.

상대방을 죽이고자 하는 의지가 거대한 압력이 되어 그를 억누르고 있었다.

데일 리퍼슨은 반사적으로 근육을 긴장시키고 있는 애쉬를 보며 말했다.

“그럼 넌 죽는다, 애송아.”

방금 전까지 느슨해졌던 분위기와 눈빛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수많은 피를 손에 묻힌 도살자의 그것이 나타난다.

하지만 애쉬는 일반인이라면 몸이 굳어서 입조차 열지 못했을 압박에도 웃었다.

“프흐, 그렇게 나와야지.”

그렇게 나오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애쉬는 살벌하기 그지없는 데일 리퍼슨의 눈빛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자신을 상대할 때도 저런 느낌이라면 분명 최고로 재밌는 싸움이 되겠지.

서로의 눈을 바라보길 몇 초. 둘의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떠들썩하던 사위가 천천히 조용해졌다.

주변의 소란이 좀 가라앉은 가운데, 애쉬는 먼저 검의 손잡이에서 손을 땠다. 어차피 처음부터 이곳에서 난동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잠시 어깨를 빙글 돌리며 긴장했던 근육에 힘을 풀어준 애쉬는 입을 열어 가볍게 말했다.

“한 달은 너무 길고, 2 주일. 그 정도라면 좀 어울려주지. 대신 그때 가서도 딴 소리를 한다면….”

그가 말끝을 흐렸다. 그때는 이쪽도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뜻이었다.

애초에 이곳에 온 이유부터가 저 남자, 데일 리퍼슨과 한판 해보기 위함이었는데, 이제 와서 저런 소리를 하다니.

그의 성격에 처음부터 깽판을 쳤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럼에도 애쉬가 이런 절충안을 내놓는 것은 상대방의 실력을 보았으니만큼 그것을 존중하기 때문이었다.

이것마저 거절한다면 꽤나 화가 나겠지만, 애쉬는 데일 리퍼슨이 거절할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아닌 척 하지만 그의 안에도 애쉬와 같은 호전성이 숨어 있었으니까.

“흥.”

그런 애쉬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는지, 데일 리퍼슨은 그런 애쉬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나타내지 않고 작게 코웃음 치고는 등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게 데일 리퍼슨이 그렇게 자리를 떠나자 곧 다시 파티장이 시끌시끌해졌다.

“저 무시무시한 늙은이한테 덤비다니, 이거 용감한 녀석이 왔군.”

“뭐야, 결국은 신입이 맞았잖아!”

“그래, 이주일짜리긴 하지만.”

신입이라며 떠드는 말에 누군가가 짧게 단서를 붙였다. 애쉬는 그런 카우보이모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돌아섰다.

그러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게빌이 그를 반겼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해야 하나?”

“글쎄. 너희 재무팀에 안부나 미리 전해두시지.”

내 몸값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비쌀 테니까.

원래도 비쌌는데, 갑자기 일정이 밀려 기분이 영 좋지 않은 지금은 더 비싸질 예정이다.

게빌 리퍼슨, 저 녀석만큼 준다고? 녀석과 다른 카우보이모자들의 합공을 역으로 박살낸 그가 겨우 그것만 받고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게빌은 바닥까지 긁어 받아내겠다는 애쉬의 살벌한 표정에 떨떠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2주일.

짧지만 무척이나 긴, 새로운 일의 시작이었다.

* * *

­ 투웅!

묵직한 발포음과 함께 손가락 두 개를 겹친 것 만한 탄환이 머리 바로 옆을 훑고 지나간다.

하지만 애쉬는 눈도 깜짝 않고 정면으로 뛰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 촤악!

새까만 칼날이 번뜩이며 직전까지만 해도 총구에서 불을 내뿜던 라이플 한 정을 반으로 갈라버린다. 그것을 본 카우보이모자들이 감탄했다.

“이번 신입은 진짜 장난 아니구만!”

“그 늙은이한테 달려든 이유가 있었어!”

‘리퍼슨 물류’의 탈을 쓴 ‘총잡이들의 여명’에서 일하길 일주일 째.

오늘도 현장에 나온 애쉬는 그와 처음 일하는 카우보이모자들이 감탄하든 말든 다음 대상을 찾아 움직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적을 무력화시켰다.

­ 휙. 스르륵.

피를 본 건 아니라 칼날에 묻은 것은 없었지만, 버릇처럼 한 차례 털어낸 뒤 납검한다.

한 발짝 늦게 따라온 카우보이모자들은 그런 애쉬의 뒷모습을 보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대체 어떻게 칼로 쇳덩일 베는 거지? 믿을 수가 없군.”

“칼이 특별한 건지, 아니면 그걸 쓰는 사람이 특별한 건지.”

애쉬는 궁금하다는 듯 쳐다보는 카우보이모자들의 눈빛을 무시하며 말했다.

“끝났으니 난 먼저 돌아간다.”

“어어, 그래. 대활약을 했으니 뒤처리는 우리가 하지.”

“야, 신입이 뭐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굽실거리는 거 봐라.”

“뭐, 어때. 나보다 실력 좋으면 형님이고 선배지.”

“그럼 빨리 나한테도 형님이라고 불러.”

“헛소리는. 그런 건 실적이나 이기고 말하시지.”

카우보이모자들이 티격태격하는 소리를 뒤로 하고 움직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애쉬는 타고 왔던 차량에 먼저 도착했고, 그가 탑승하자 운전석에 자리하고 있던 운전사가 그에게 인사했다.

“엄청 빨리 끝났네요. 오늘도 먼저 가십니까?”

“어. 따로 들를 곳은 없지?”

“예. 바로 사무실로 모시겠습니다.”

운전사는 그와 일한 지 이제 일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익숙하다는 듯 차량을 움직였고, 애쉬는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리퍼슨 물류’의 사무실의 입구에 도착했다.

­ 위이잉.

반투명한 유리로 이뤄진 자동문이 열리고 시원한 사무실 내부 공기가 훅 밀고 나온다.

애쉬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사무직 직원들이 그를 반겼다.

“아, 애쉬 씨. 어서 오세요. 오늘도 고생이 많으셨어요.”

“덕분에 이번 주 일도 벌써 다 마무리 됐어요.”

“아, 오늘 그게 이번 주 마지막이었어?”

“네. 원래라면 이번 주말까진 해야 할 일이었는데, 애쉬 씨 덕에 훨씬 빨리 끝났네요.”

애쉬와 조금 친해진 미인 여직원, 케일이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처음에는 경계하는 듯하던 사무직 직원들은 이제 애쉬가 오기만 하면 표정을 활짝 펴고 그를 맞았다.

안 그래도 게빌이 재활 때문에 빠지는 바람에 일손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그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일처리를 마치는 애쉬가 들어온 것이다.

회사의 재무를 담당하는 재무팀의 팀장, 케일의 입장에서는 그런 애쉬가 반갑지 않을 리가.

임금을 상당히 많이 받긴 하지만, 그 이상으로 완벽하게 일처리를 하고 있으니 그녀로서는 불평할 이유가 없었다.

“그 늙은이는?”

“아, 단장님이라면 사무 일을 보고 계세요.”

“여전히 밖으론 잘 안 나오네.”

“그렇죠, 뭐. 최근엔 더 그러시더라구요.”

케일은 가끔가다 애쉬에게 단장, 데일 리퍼슨에 대한 자잘한 얘기를 해주었다. 애쉬는 그녀에게서 나오는 정보들을 잘 모아서 머릿속에 정리했다.

당장은 몰라도 언젠가는 쓸 일이 있겠지.

그렇게 애쉬와 케일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데일 리퍼슨의 집무실 쪽에서 게빌이 걸어 나왔다.

그는 케일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애쉬를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인사했다.

“오, 오늘도 일찍 끝나고 왔나보구만.”

“네. 게빌 씨보다 훨씬 빠르고 일처리도 정확하시던데요? 차라리 이대로 게빌 씨 대신 애쉬 씨가 계속 해주면 좋을 정도로.”

“뭐? 그건 좀 너무한데.”

케일의 장난기 섞인 말에 게빌이 놀라는 척 하며 반응했다.

서로 얘기하면서도 미묘한 분위기가 오가는 게 친구 이상 연인 미만 같은 느낌.

아니꼬운 눈으로 잠시 둘이 대화하는 것을 바라보던 애쉬는 문득 예전에 들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게빌과의 첫 조우, 그 마지막에 있었던 말.

‘이럴 줄 알았으면 잘리기 전에 케일 가슴이라도 한 번 주물러보는 거였는데.’

동료들과 자신을 위해 스스로의 손목을 자른 게빌은 분명 그런 소리를 했었다.

그것을 떠올린 애쉬는 차오르는 심술과 장난기를 가득 담아 입을 열었다.

“아, 생각났네. 내가 케일이란 이름을 어디서 들어봤었는지.”

“네?”

“응?”

애쉬의 뜬금없는 말에 케일과 게빌이 의문을 나타냈다.

케일이야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게빌 또한 애쉬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덕분에 애쉬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입을 열어 그들의 사이에 폭탄을 투하할 수 있었다.

“분명 네가 이렇게 손목이 잘릴 줄 알았으면 가슴을 주물러 봤어야 했다고 했었지? 그때 말한 이름이 케일이었던 것 같은데.”

“…….”

“…….”

애쉬의 입에서 나온 말에 게빌과 케일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각자의 생각의 시간을 가졌다.

몇 초 정도.

그리고 곧 애쉬가 말한 내용을 모두 이해한 둘은 서로를 바라봤고,

“게빌…. 바깥에서 그런 소리를…!”

“자, 잠깐! 오해가 있어…!”

“오해는 무슨!”

둘 사이에 오가던 묘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박살나고, 케일에게서 시작된 살벌한 기운이 뻗어나갔다.

일이 그렇게 되자 애쉬는 은근슬쩍 그 둘과 함께 있던 자리에서 발을 뺐다.

“이봐! 갑자기 그런 소리는 왜…! 악! 케일!”

“…애쉬 씨는 가라고 하고, 잠깐 둘이 얘기 좀 하죠.”

애쉬를 부르다 옆구리를 꽈악 꼬집힌 게빌이 이를 악 문 케일에게 끌려갔다.

애쉬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들만의 세계를 깨부수고 평화로운 발걸음으로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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