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7. 총잡이들의 여명(13)
* * *
“한 5분 지났나? 저쪽은 어때?”
저, 저쪽은 교전 직전의 분위깁니다.
“그래? 그럼 슬슬 이쪽도 시작해도 되겠네.”
애쉬의 물음에 긴장어린 대답이 돌아왔으나, 그는 아무 상관 않고 몸을 풀었다.
어차피 싸움이 벌어질 것이야 일어날 것이 정해져 있었으니 신경 쓸 것 없다. 그가 지금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저쪽이 아니라 지금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 뿐이다.
미리 세워뒀던 오늘의 계획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인질들의 구출이었으니까.
‘다 끝나면 바닥까지 뜯어먹어야겠군.’
처음에 약속했던 ‘리퍼슨 물류’의 업무 외의 일이니만큼 일반 의뢰를 받는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뜯어내야 할 것이다.
몸 풀기를 마친 애쉬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철책을 올려다봤다.
‘한 4 미터 정도 되나.’
어중간한 강화인간이나 사이보그 수준으로는 뛰어넘기 힘든 높이였으나 그와 같은 초인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그것을 올려다보던 애쉬는 제자리에서 몸을 튕기는 것만으로 철책 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철책 위에 오른 애쉬는 몸을 낮춘 채 주변을 돌아봤는데, 데일 리퍼슨과 게빌 쪽에 확실히 시선이 쏠린 것인지, 경계를 보거나 하는 녀석은 없었다.
“흡!”
그것을 확인한 애쉬는 밟고 서있던 철책을 박차고는 단숨에 10 미터 가까운 거리를 뛰어 물류 센터 건물 외벽에 매달렸다.
그 다음은 조금 떨어진 창문을 통해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었는데, 역시나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끼익.
오래된 창문이 작은 소음과 함께 올라가고, 생긴 틈으로 애쉬가 쑥 들어갔다.
창고로 이용되는 방인 듯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먼지 쌓인 상자들만 가득한 방.
거기에 들어선 애쉬는 발소리를 감춘 채 문에 붙어 바깥에 귀 기울였는데, 경비 따위는 세워두지 않았는지 누군가 오가는 소리는 물론 인기척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무경계한데.’
철컥. 문을 열고 나온 애쉬가 생각했다. 복도에 CCTV가 있긴 했는데, 정작 그것을 보는 통제실에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상대는 정말로 아무런 경계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봐, 인질들은?”
여전히 C2구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문제는 없는데….”
애쉬가 말끝을 흐렸다.
분명 뭔가 문제가 있어야 하는데 문제가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괜히 찜찜한데.’
그에겐 나쁠 것 없는 일이었지만, 뭔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애쉬는 자신의 할 일을 위해 인적 없는 복도를 나아갔다.
*
철컥.
묵직한 소리와 금속음과 함께 총구가 겨눠지자 순식간에 장내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카우보이모자들이 제각기 지닌 무기에 손을 가져갔으며, ‘웃는 악마’ 측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작 총구가 겨눠진 당사자, 제일 던컨은 가면 너머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진정하세요. 제가 여기 온 건 단장이랑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니까요.”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그 뻔뻔한 목소리에 데일 리퍼슨 대신 게빌이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리퍼슨 물류’의 사무실에서 그런 짓을 벌여놓고는 어떻게 저딴 개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게빌의 분노한 목소리에 대답한 것은 여우 가면의 부단장이 아닌, 다른 녀석이었다.
“어이, 쫄따구 주제에 끼어들지 말지. 지금 우리 친애하는 부단장이랑 너희 대가리가 얘기하고 있잖아.”
“닥쳐라! 이 개자식…!”
철컥. 격분한 게빌이 허리춤에 꽂혀있던 총을 뽑아 들었다.
어찌나 큰 분노에 이성을 잃었던지 멀쩡한 손이 아니라 한 차례 잘려 재활을 하고 있던 손으로.
무리한 움직임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도 게빌은 똑바로 총을 겨눈 채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리고 그가 그 방아쇠를 당기려 할 때였다.
“멈춰, 게빌!”
간부 카우보이모자의 놀란 목소리가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당초 그들의 계획은 이렇게 갑자기 적들과 싸우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대표이자 적의 목표인 데일 리퍼슨이 의심받지 않는 선에서 상대방을 위협하며 최대한 시간을 끌고, 인질들이 구출되면 그 순간부터 전투를 시작하기로 했던 게 아니었던가.
인질 구출 측의 애쉬 론모어가 출발했다는 얘기를 들은 게 불과 일 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감정에 휩쓸려 이렇게 적을 자극하는 것은 인질로 잡혀간 직원들의 안전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큭….”
일순간 이성을 잃었던 게빌이 동료의 목소리에 총구를 내렸다. 아직 인질들이 잡혀있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것 같던 게빌이 총구를 내리자 ‘웃는 악마’ 측의 도깨비 가면을 쓰고 있는 녀석이 비웃었다.
“흐흐, 아무것도 안하는 거야? 손도 덜덜 떨더니만 겁먹었나?”
“…….”
게빌은 이를 악문 채 총구를 내리고 물러났다.
저놈들에게 탄환을 박아주는 것은 잠시 후, 애쉬 측에서 인질을 구했다는 말을 들은 뒤에도 늦지 않았다.
그렇게 게빌이 물러서자 부단장, 제일 던컨이 자신에게 겨눠진 총구 너머로 데일 리퍼슨을 말했다.
“아드님이신가보네요. 저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고.”
“…….”
“너무 경계하진 마세요.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단장이랑 싸우러 온 게 아니라, 한 가지 제안을 하러 온 거니까요.”
“…제안?”
“네, 제안이요.”
데일 리퍼슨이 묻는 말에 제일 던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는 진심인 듯 했다. 진심으로 ‘리퍼슨 물류’의 사무실에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 것이다.
데일 리퍼슨 또한 자신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분노에 가득 차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으나, 그가 그의 아들과 다른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지나온 세월이었다.
그는 사무실의 끔찍한 광경을 발견했을 때와 달리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마주보고 있는 여우 가면 너머의 눈동자에 자신의 분노를 얼핏 보였을 뿐이다.
그게 유효했는지 상대방은 별다른 의심 없이 제 할 말을 이어갔다.
“최근 저희 측에 손실이 제법 컸습니다. ‘부단장’급도 하나 잃었고, 그 외에도 많은 악마들이 죽었죠.”
부단장급이 죽었다는 말에 데일 리퍼슨은 며칠 전 들었던 애쉬의 얘기를 떠올렸다.
자신이 부단장급과 그 외 상위 서열의 악마들을 처치했다는 말을.
‘그게 사실이었나.’
설마 진짜일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얘기를 직접 들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애쉬가 ‘웃는 악마’와 직접 부딪히지 않았다면 저런 사실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데일 리퍼슨이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제일 던컨의 얘기는 계속됐다.
“그래서 제가, 그리고 현 단장께서 당신께 제안 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겁니다.”
‘웃는 악마’에 돌아와 주시죠.
여우 가면의 부단장은 드디어 데일 리퍼슨에게 자신이 직접 찾아온 이유를 꺼냈다.
“…다시 돌아오라고.”
그 얘기를 들은 데일 리퍼슨이 중얼거렸다.
당연히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을 끌기 위해선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여야했다.
그런 그의 목소리에 제일 던컨이 대답했다.
“네. 현 단장께서는 당신이 돌아오길 바라고 계십니다.”
“대가는?”
“원하시는 모든 것을 최대한 맞춰주겠다고 하십니다. 실력이야 녹슬지 않았는지 확인해야겠지만, 예전과 같다면 현 단장의 바로 아래에 위치한 부단장급 직위를 드릴 겁니다. 그리고…….”
여우 가면의 부단장은 말을 잠시 끊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니, 정확히는 데일 리퍼슨과 함께 온 게빌과 카우보이모자들을.
그 직후 입을 열어 여유로운 말투로 선심 쓰듯 말했다.
“그리고 이곳에 잡혀있는 직원들은 물론, 함께 온 소꿉놀이 친구 분들도 살려 보내드리죠.”
아, 물론. 숨어든 쥐새끼들까지요.
“뭣…!”
“무, 무슨.”
덧붙여진 제일 던컨의 말에 카우보이모자들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놀란 것은 게빌과 데일 리퍼슨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마 벌써 걸린 건가?’
게빌이 생각했다.
이번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몇 번이나 말했듯 인질로 잡힌 직원들의 구출이었다. 그것을 위해 모두가 목숨 바칠 각오까지 한 채 이곳에 모인 게 아니던가.
그런데 벌써 발각됐다면 구출 임무를 맡은 애쉬 론모어가 뭔가 해보기도 전에 막힐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의 무력은 믿는 바이나 상대방이 인질의 목에 칼을 대고 기다리면 어쩔 수 없을 테니까.
게빌이 순간 혼란에 빠졌지만, 잠시 생각해본 데일 리퍼슨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바로 눈치 챘다.
‘아직 걸리진 않았군. 하지만 대비는 하고 있나.’
‘쥐새끼들’이라고 칭한 것을 보면 정확히 숨어든 애쉬 론모어를 지칭한 게 아니라 한 번 찔러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바보 같은 그의 부하들은 그것에 동요를 보였지만 말이다.
찔러본 것에 상대방이 명확한 반응을 보이자 제일 던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제가 아는 단장의 성격이라면 진작 탄환이 날라 왔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대화 상대나 해주고 있는 것부터 눈치 챌 만 했죠.”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그 ‘유쾌하게 웃는 악마’의 단장이 어딜 가진 않았을 테니까요.
모두 자신의 예상 안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재수 없는 말투.
그에 데일 리퍼슨은 이미 걸린 것, 그의 속이라도 긁기 위해 내뱉었다.
“그렇다면 거기 간 놈이 너희 부단장을 죽인 녀석이라는 것도 알고 있겠군.”
“…예?”
그곳으로 향한 게 너희가 최근 잃었다는 부단장을 쳐 죽인 ‘애쉬 론모어’라는 사실을.
*
철컥. 투다다다다!!
벽에서 갑작스럽게 솟아난 센트리 건의 총구가 불을 내뿜는다.
하지만 침입자는 이미 그것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듯 재빠르게 총탄을 피해 움직이며 벽을 타고 달려 검은 섬광을 내그었다.
촤아악!!
새까만 칼날이 채찍이라도 되는 듯 대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빨갛게 달궈진 쇳덩이를 갈랐다.
총신과 함께 반으로 갈라진 센트리 건은 불똥을 튀기더니,
퍼엉!
소음과 함께 터져나갔다.
중심부에 위치한 배터리라도 함께 베인 것이겠지.
센트리 건 하나를 처치한 잿빛 머리칼의 해결사는 잠시 숨을 돌리려 했으나, 그가 땅에 발을 딛자마자 쏘아진 또 다른 물건에 상체를 훅 숙일 수밖에 없었다.
쇄애액!
기계의 힘으로 쏘아진 예리한 무언가가 방금까지 그의 가슴께가 위치하던 허공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것을 피한 해결사, 애쉬 론모어는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총알다음에는 창이냐?”
손잡이 기둥은 없었지만 벽에 꽂힌 두꺼운 창촉 비슷한 게 보였다. 애쉬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정면을 바라봤다.
철책을 넘어 창문을 통해 침입할 때 느꼈던 그의 불길한 예감은 딱 맞아 떨어졌다.
들어오고 이동하는 몇 분 동안은 아무런 일도 없었으나, 인질들이 잡혀있는 곳에 가까워질수록 이런 장난감들 따위가 나타나 총알과 이상한 것들을 쏟아내는 것이다.
애쉬는 숨을 살짝 골랐는데, 뒤늦게 인이어 너머로 안내 역할을 맡은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십니까? 뭔가 폭발음이!
“아아, 괜찮아. 그나저나 저쪽은 어때?”
아, 아무래도 애쉬 씨의 존재가 들킨 것 같습니다. 뭔가 인질들 근처에서 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
그럼 좀 더 빨리 움직여야겠네.
준비하고 있는 게 뭔지는 몰라도 인질들을 구하는데 시간을 오래 써봐야 좋을 것도 없을 테니까.
파지지직. 쿠웅.
“흡!”
퍼어엉!!
애쉬는 통로 내달리며 계속해서 나타나는 함정들을 깨부쉈고, 곧 목표했던 위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지?”
아마 바로 그 앞인 것 같습니다!
“아마?”
아니, 그 앞이 맞습니다!
“…확실히 하자고 좀.”
예, 예!
애쉬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인이어 너머의 직원에게 말하자 그가 잘못했다는 듯 대답했다.
영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은 빌헬름처럼 해킹 및 오퍼레이터 역할까지 되는 인재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애쉬는 굳게 닫혀있는 문에 다가갔고, 그것을 힘껏 밀어 열었다.
“이런 망할…!”
콰아아앙!!!
…가 통로 전체를 무너뜨릴 듯한 폭발의 여파에 휩쓸려 날아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