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 7. 총잡이들의 여명(21)
* * *
누군가 말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물론, 그렇다고 멈출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대로 상대방을 마무리 지으려 했을 뿐.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잠깐 멈추라니까.”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십여 미터도 더 밖에서 들리던 것 같은 목소리가 공간을 건너뛰기라도 한 듯 갑자기 가까워지더니, 순식간에 끼어든 새하얀 손이 그가 내려치던 칼날을 탁 붙잡았다.
그러자.
‘뭐…?’
정말 웃기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그의 검이 멈췄다.
겨우 저 가늘고 매끈한 여성의 손가락에 잡혀서 말이다.
그에 애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자신의 옆에서 귓가에 속삭이기라도 할 듯 가깝게 붙어있는 여성을 본 순간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인간에게서 저런 색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은 진홍빛의 머리칼과 어떻게 보면 피처럼 섬뜩한 붉은 색으로도, 어떻게 보면 루비처럼 아름다운 붉은 색으로도 보이는 눈동자.
그녀는 레이라나 서령, 그 외에도 밤의 꽃으로 유명한 수많은 미인들을 봐온 애쉬로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을 미녀였지만, 그런 그녀와 눈을 마주친 애쉬는 그 안에서 끔찍하리만치 농도 짙은 혈향을 맡았다.
애쉬 자신 또한 여태껏 누구에게 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피를 손에 묻혀왔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여자는 그런 수준을 넘었다.
누군가는 눈동자를 호수와 같다고 표현했던가.
그러나 지금 이 여자의 눈동자에 흐르고 있는 것은 깨끗한 호수가 아니라 그 색깔처럼 질척한 피의 바다였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 눈에 압도당한 애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멀쩡한 몸이라면 어떻게 될지 몰라도지금 이대로 싸우면 무조건 죽는다.
그렇게 애쉬가 몸을 긴장에 굳히자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홍빛의 그녀는 놀랐다는 듯, 그리고 재미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가 그 애쉬 론모어지? 설마 이번 일에까지 끼어들어서 이 녀석을 꺾을 줄은 몰랐는데.”
대단하네. 라며 솔직하게 감탄해오는 목소리.
그녀는 진심인 듯 했지만 애쉬에게는 어쩐지 그것이 순수한 감탄이 아니라 어린 아이를 대견하다고 칭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감미로운듯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목소리를 듣던 애쉬는 문득 며칠 전 데일 리퍼슨에게 전해 들었던 어떤 인물의 인상착의를 떠올렸다.
‘녀석, ‘웃는 악마’의 단장은 피처럼 붉은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녀석이다.’
피처럼 붉은 머리칼과 눈동자. 마침 그 특징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 여기 있지 않은가.
애쉬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미지가 붉은 계열인 것은 같지만 장미 같이 화사한 느낌보다는 그보다 더 불길한 피안화가 떠오른다.
절색이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미인임에도 결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느낌.
그녀를 바라보던 애쉬가 입을 열어 물었다.
“…네가 ‘웃는 악마’의 단장이냐?”
“맞아. 이름은 루디악 벨파인.”
그런 애쉬의 물음에 그녀는 시원할 정도로 단숨에 그것을 긍정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애쉬가 자신들을 적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나직전까지도 자신의 바로 밑에 있는부단장, 제일 던컨을 죽이려던 모습을 보았던 것은 신경 쓰지도 않는 듯한 태도다.
‘그 늙은이. 성별도 밝히지 않더라니.’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무런 말도 없었기에 당연히 남자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그 악명 높은 용병집단이자 테러리스트들의 모임인 ‘웃는 악마’의 단장이 여자였을 줄이야.
여자에게 당했다는 말을 하기엔 쪽팔렸나?
머릿속으로 데일 리퍼슨에게 망할 늙은이, 하고 거친 말을 한 마디 내뱉은 애쉬는 아직까지 자신의 검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루디악 벨파인. 그럼 이건 슬슬 놓지 그래.”
여자의 손에 붙잡힌 검을 끝까지 빼내지 못하고 이런 얘기나 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에 자존심이 상한 애쉬였지만, 겨우 일반인 정도로 떨어진 지금의 근력으로는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검을 꿈쩍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서로의 목숨을 건 전쟁이나 전투에서 패자의 목숨을 애쉬에게는 상대방의 목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고, 실제로 제일 던컨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던 상태.
여기서 이렇게 방해를 받아 끝을 보지 못한다면 적어도 며칠 동안은 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런 말 한 마디로 손을 놓을 것이었다면 상대방도 처음부터 끼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 루디악 벨파인은 애쉬의 말에도 검을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았고, 오히려 지그시 눌러 압박했다.
그것만으로도 몸 상태가 완전히 맛이 간 애쉬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루디악 벨파인은 애쉬를 바라보며 놀리는 건지, 아니면 진심인지 모를 말투로 말했다.
“나도 어지간하면 이렇게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는데, 최근 인력이 많이 모자라서. 네가 이해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애쉬가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말투에 대놓고 신경을 긁기 위한 태도로 대꾸했다.
그도 겉으로 내색은 거의 안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상황에 꽤나 열이 받은 상태였다.
서로의 목숨을 건 전쟁, 전투에서 패자의 목숨을 거두는 것은 승자의 정당한 권리였다.
실제로 제일 던컨 또한 패배를 인정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고.
그런데 왜 그가 갑자기 끼어든 제 3자에 의해 그 권리를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애쉬의 물음에 루디악 벨파인, ‘핏빛 악마’는 진홍빛 눈동자로 그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기분이 나빠져서 너와 저 친구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수도 있으니까.
막 대단한 살기도, 분노도, 짜증도 느껴지지 않는 무덤덤한 말투.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그 담백한 목소리가 듣는 이들을 더없이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불길한 분위기가 흐르기도 잠시. 그녀는 장난스럽게 제안했다.
“네가 이 녀석을 살려주면, 내가 너희를 살려주는 거지. 어때?”
“…망할 년이.”
“킥, 그런 말 자주 들어.”
끝내 애쉬가 제안 같지도 않은 제안에 욕지거릴 내뱉고 말았다.
이미 상대방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를 죽이고 반대편으로 향해 ‘총잡이들의 여명’과 ‘웃는 악마’가 맞붙고 있는 전장을 정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를 살려주겠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 한창 따분함에 지쳐 있었던 애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냥 그게 더 재밌을 것 같으니까.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압도적인 강자의 여유.
상대방이 자신보다 약하길 바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대 이상의 실력을 갖고 있길 바라는 생각.
그녀에게서는 평상시의 애쉬 자신과 비슷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는데, 지금은 감히 그의 앞에서, 애쉬 론모어라는 인간의 앞에서까지 그 감추지 않고 자신감을 내보인 것이다.
‘나한테 저딴 말을 해?’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있다면 차라리 위험할 확률이 더 낮아졌을 것이다. 갑자기 마음이 바뀔 가능성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애쉬는 가슴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추지 않고 곧장 상대방을 도발했다.
“지금 마무리 안 지으면 후회할 텐데.”
여기서 살려 보내면 언젠가 크게 후회하게 해줄 것이라고.
상대방이 얕보든 말든 애쉬에게는 스스로가 내뱉은 말을 이룰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애쉬의 도발 섞인 말을 들은 루디악 벨파인은.
“풋, 푸흐흐, 아하하하!”
‘웃는 악마’, 그리고 ‘회사’.
거기에 얽힌 놈들을 모조리 박살내 주겠다는 애쉬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겨우 너 혼자서 그런 게 가능하겠냐며 비웃는 게 아니었다. 그저 진심으로 재밌겠다고 생각했을 뿐.
애쉬의 오해와 달리 루디악 벨파인, 그녀는 그를 상대로 전혀 방심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 자신의 밑에 있던 두 명의 부단장의 실력은 그녀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한 번까지는 요행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렇게 다시 한번 벌어진 이상 그것은 더 이상 행운 따위로 치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애쉬는 그녀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애쉬 론모어라는 인간이 정말 그녀의 상상이상의 실력자여도 좋다. 만에 하나 정말 자신보다 더 강하다면 목을 베어도 좋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녀는 일부러 애쉬의 오해를 정정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래야 더 힘내어 이쪽을 쫓을 것 같았으니까.
“크흨. 그래, 얼마든지 해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
그렇게 말하며 잡고 있던 애쉬의 검을 놓아준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등을 보여 자신의 부하, 제일 던컨을 향해 다가갔다.
여태껏 아무 말도 않고 있던 제일 던컨도 그녀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단장님.”
“엉망이네.”
“죄송합니다. 제 부주의로 인해 몸을….”
그의 몸에 적용된 기술을 만들기 위해 투자된 금액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수치였다. 수많은 실험 끝에 완성된몸이 여기저기 찔리고 베인데다 허리는 반쯤 잘려나갔으니 그 손해가 얼마나 될까.
일반인이라면 천년, 만년을 일해도 벌 수 없을 어마어마한 금액일 터였다.
그러나 방금까지 즐거운 기분이었던 그녀는 제 부하의 실패와 몰골에도 여전히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쪽 얘기만은 아니긴 한데…. 돌아가서 살펴보지, 뭐.”
“…예.”
제일 던컨은 단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그녀의 뒤편에 서있는 애쉬를 바라봤다.
아쉽게도, 혹은다행히도 자신과 그의 마지막이 될 곳은 여기가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이렇게 끝나지만 저쪽에서 계속 ‘웃는 악마’를 쫓는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일이 있겠지.
“그럼 가자. 저쪽에도 연락하고.”
애쉬를 바라보던 제일 던컨은 자신을 부르는 단장의 목소리에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물었다.
“…전 단장은 만나보지 않으셔도 되는 겁니까?”
“됐어. 오늘은 더 재밌어 보이는 걸 발견했으니까.”
재밌어 보이는 것. 그건 분명 이쪽을 타오르는 진청색 눈동자로 노려보고 있는 저 남자를 말하는 것일 터다.
제일 던컨은 단장의 지시에 따라 반대편에서 교전중인 악마들에게 철수를 명령했고, 그곳에 있던 악마들은 한창 유리하던 상황에서 몸을 빼라는 말에 다소의 소음을 일으켰지만, 단장의 존재를 알리자 그 순간부터는 아무런 말도 없이 명에 따랐다.
반대편에서 바쁘게 들려오던 격발음이 체감될 정도로 줄어들자 단장인 루디악 벨파인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제일 던컨과 한 명의 비서가 따랐다.
그리고 애쉬와 단장인 루디악 벨파인의 어깨가 스치는 순간.
“원래는 잘 꼬신 다음 주려고 했는데. 다음에 또 봐.”
루디악 벨파인.
거대한 용병 집단이자 테러리스트 무리의 단장인 ‘핏빛 악마’는 그에게 손톱만한 데이터 칩 하나를 툭 넘기며 지나갔다.
“…….”
애쉬는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서 가만히 선 채 자신의 손바닥 위에 남겨진 그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특별할 것도 없는, 그냥 조그만 데이터 칩 하나.
꽈아악.
안 그래도 힘이 빠진 몸으로 손아귀가 부서져라 데이터 칩을 쥔 애쉬는 걸음을 옮겨 데일 리퍼슨과 게빌, 그리고 ‘총잡이들의 여명’ 소속의 카우보이모자들이 있을 곳으로 움직였다.
여기에 들어있는 게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오늘은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것이다.
칼잡이로서 끊임없이 나아가며 승리했지만결국 마지막에 나타난 상대의 자비로 목숨을 구했다.
전에 없이 기분 더럽고찜찜한, 이겼지만 패배감만 가득한 마무리였다.
“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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