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166화 (166/230)

〈 166화 〉 7. 총잡이들의 여명(22)

* * *

“…이봐, 괜찮아?”

“뭐가.”

“아니, 그 몸도 그렇고. 멀쩡해보이진 않는데 병원이라도 가보는 건 어때.”

물류 센터에 늘어진 시체들과 부상자들을 수습하던 게빌이 애쉬를 보며 말했다.

걱정해주는데도 대답하는 말투가 영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그는 ‘총잡이들의 여명’에 있어 부정할 수 없는 은인이었다.

아마 오늘 그가 없었으면 싸움의 전체적인 판도가 달라졌겠지.

인질들은 구할 수 있었을지나 의문이었으며 그것을 신경 쓰느라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겠지.

아니, 그 이전에 데일 리퍼슨은 처음에 그런 모습을 보였던 것처럼 인질과 동료들을 위해 그대로 ‘웃는 악마’를 따라 떠났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일도 아닌 것에 끼어들어 온갖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그런 모든 상황을 벗어나게 해줬으니 어찌 은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병원비라면 우리가 얼마든지 내줄 수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가보지 그래. 상태가 영 좋아보이진 않는데.”

“…됐어.”

“아니, 왜?”

애쉬는 게빌에게 무어라 더 말하는 대신 고개만 저어 거절하며 자신의 손목에 걸려 있는 팔찌를 보았다.

이전, 유성 그룹에서 서령과 일하며 받았던 물건.

이곳까지 그가 올 수 있도록 도왔던 그 팔찌는 한 차례 몸을 타고 흘렀던 전류에 완전히 맛이 간 것 같았다.

지금 상대로 거리를 돌아다니면 얼마 가지 않아 소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고, 무엇보다 아직 그에게는 병원에서 사용할 신분이 없었다.

전에 서령이 손을 써본다고 했으니 연락이 곧 오긴 할 테지만 아직은 불법체류자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그가 도심의 의료 시설을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차라리 다시 슬럼으로 돌아가 그곳에 있는 뒷세계의 의사 한 놈이나 붙잡고 칼을 들이미는 게 더 쉬웠다.

무슨 수술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약을 처방하는 정도는 그런 놈이라도 충분히 할 수 있겠지.

나머지는 스스로의 몸을 믿고 자연 치유에 맡기는 수밖에.

“장례식에는 네가 내 대신 꽃이라도 하나 놔두든지 해.”

“뭐?”

“난 간다. 입금은 전에 알려준 계좌로.”

“아니, 잠깐! 뭐라도…!”

게빌이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애쉬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물류센터 바깥으로 향했다.

데일 리퍼슨의 얼굴도 한 번 보고 가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물류센터의 정문.

“가는 거냐, 애송아.”

발걸음을 옮겨가던 애쉬의 뒤로 낮게 깔리는 남성의 목소리가 물었다.

그를 애송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하늘을 향해 뿌연 연기를 흘리는 시가 한 대를 물고 있는 데일 리퍼슨이 어느새 나와선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잔뜩 잡고 있으면서 날려먹은 손가락을 붕대로 마구 감아둔 모습이 자못 코믹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애쉬가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자 데일 리퍼슨이 입을 열었다.

“장례는 간소하게 치룰 거다. 그 이후에 한번 찾아가마.”

데일 리퍼슨은 떠나려는 애쉬를 붙잡지 않고, 그저 전에 말했던 대가 지불의 이행을 약속했다.

장례가 끝나면 그와 한판 제대로 붙어주겠다는 말을.

아무래도 서로 몸이 회복된 상태에서나 가능할 테니 처음 정했던 날짜와는 꽤나 차이가 생기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데일 리퍼슨의 약속에 애쉬가 적당히 대답했다.

“뭐, 그러던가.”

지금은 어디서 치료를 받든 약을 받든 하기도 해야 하고, 또 오늘 얻은 것들을 정리하기도 해야 해서 머리가 좀 많이 복잡했다.

나중에 정리가 다 끝나면 연락해 한 판 붙어보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저쪽에서 먼저 와준다니 그로서는 편한 일이었다.

“그럼 잘 가라.”

“어. 그쪽도 나랑 한판 붙기 전까지 몸간수 잘하고.”

데일 리퍼슨의 인사에 애쉬도 짧은 인사와 함께 발걸음을 돌렸다.

“…고맙다, 애쉬 론모어.”

그러자 그런 그의 뒤로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것을 들은 애쉬는 데일 리퍼슨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에 픽 웃고 말았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가벼운 마음으로 와서 기술이나 경험, 부상까지.

온갖 것들을 얻어가는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 * *

“언제부터 보고 계셨습니까.”

“처음부터.”

“그런데 어째서.”

“끼어들지 않았냐고?”

“…….”

차량을 타고 돌아가는 길.

운전자를 두고 뒷좌석에 앉아 얘기를 나누던 루디악 벨파인의 말에 제일 던컨이 긍정하듯 입을 다물었다.

물론, 제일 던컨이 그녀를 탓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처음부터 이번 작전에 배정되지 않은 인원이었으니까.

애초에 ‘웃는 악마’자체가 서열에 따른 경쟁 체제로 돌아가기 때문에 서로에게 비협조적으로 나올 때가 많았다.

그 자리에 있었는데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뭐라 할 입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그는 궁금했다.

전 단장, 데일 리퍼슨을 발견했으며 그를 데려오라 명령한 사람 모두 그녀였다.

안 그래도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부단장인 자신과 상위권의 악마들을 밀어 넣으면서까지 명령을 내린 장본인.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계획이 무너지는 것을 방관하기만 했는가.

루디악 벨파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제일 던컨의 의문어린 시선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궁금했어. ‘애쉬 론모어’가.”

그의 이름은 유성 그룹의 일 이전에도 얼핏 들은 기억이 있었다.

아~주 고귀하신 황금의 핏줄이 꾸미던 계획 하나를 완전히 박살을 냈다고.

그런데 유성 그룹의 일에서 이번에는 자신의 부하들과 맞부딪혔고, 끝내는 거기에 들어간 모든 투자를 완전히 허사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나중에 찾아보니 과거의 일까지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고, 저 밑바닥 슬럼에서는 무려 ‘회사’의 무력부대 중 하나를 혼자 박살냈다는 게 아닌가.

게다가 이번 일을 진행하려는데 마침 그 자리에까지 끼어들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자신들과 자꾸만 얽히는 남자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직접 지켜본 결과.

“…어떠셨죠. 그 남자는.”

“글쎄에.”

제일 던컨의 물음에 그녀가 그 진홍빛 눈동자에 해결사, 애쉬 론모어의 모습을 그리며 말끝을 늘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은 많이 서투른 게 보였다.

그의 신체능력은 명백히 제일 던컨보다 앞서 있었음에도 그렇게 고전할 정도였으니.

끝내 이기긴 했지만 본인도 전투의 지속이 힘들 부상을 입었으니 결과적으로만 보면 큰 차이는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그 전투에서 읽은 것은 ‘가능성’이었다.

처음에는 우월한 신체능력에도 불구하고 기술에 의해 명백히 밀리던 애쉬 론모어.

그러나 그는 싸워가는 와중에 점차 완성되어 갔으며, 끝내는 제일 던컨에게서 훔쳐낸 기술로 그를 제압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 딱 그런 느낌 아니야?”

어느 유명한 시인이자 철학자인 인물이 한 말이다.

실시간으로 위기를 겪으며 성장하는 그 모습은 그녀의 머릿속에 그 한 문장의 말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는 분명 유성 그룹에서 제일 던컨보다 아래 서열이었던 부단장, 호른 벡 테일에게도 죽을뻔 했다고 들었다.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

제대로 된 대인 검술이라곤 전혀 모르는 것처럼 짐승 같은 움직임을 보이며 계속해서 밀리던 남자는 전투가 마무리 될 때쯤에는 누구도 무시 못 할 한 명의 검사가 되어 있었다.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전투 사이에서 일어난 변화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

그 과정을 직접 본 루디악 벨파인은 그 끝이 어디일지 궁금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저것보다 더 성장하고, 더더욱 높은 곳까지 올라온다면 지금의 자신과도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있는 대적자가 탄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무척이나, 너무도 즐거울 것이다.

지금보다 한참은 어릴 적 꺾어버린 전 단장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데일 리퍼슨에게서 흥미를 잃어버린 그녀는 애쉬 론모어라는 인물에 집중했고, 그 결과는 그녀가 기대한 대로 애쉬의 승리였다.

“그대로 성장하면 나랑도 한번 해볼 만하지 않을까?”

“…그건.”

과연 가능할까?

제일 던컨이 신난 듯한 그녀의 목소리를 직접 부정하진 못하고 머릿속에서 의문을 품었다.

확실히 애쉬 론모어의 신체능력과 재능은 여태껏 그가 봐왔던 모든 적들 중에서도 압도적이었다.

그가 어울리지도 않는 열등감에 빠져 분노할 정도로.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는 감히 그런 열등감마저 갖지 못하게 하는 진짜 ‘악마’가 있었다.

홀로 군대를 쳐부수고, 전장의 판도를 뒤집는 핏빛 악마가.

“…그렇습니까.”

“응.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다니까.”

제일 던컨의 목소리에 그녀가 방긋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평범한 이들이라면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을 존재를 용납하지 않겠지만, 그녀는 달랐다.

‘부디 무럭무럭 자라라.’

자라서 그 시린 눈빛과 예리한 칼날로 내 목을 노려줘.

그럼 그 때는 나도 웃는 얼굴로 네 목을 베어줄 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제일.”

“예.”

“어떻게 풀었어?”

상상만 해도 짜릿한 생각에 도파민이 뭉클뭉클 분비되는 것 같아 미소 짓던 그녀는 문득 생각난 사실에 물었다.

그에 제일 던컨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오히려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아무런 인지도, 의식도 없이 그냥 풀려난 건가?”

‘……풀려났다고?’

자신의 물음에 대답도 않고 혼자 중얼거리는 듯한 그녀의 말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생각하던 제일 던컨의 표정이 굳었다.

순간적으로 짚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뭔가를 깨달은 그는 급히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판단을 내림과 동시에 그의 두 눈을 루디악 벨파인의 새하얀 손이 덮고 있었으니까.

“쉬이. 한숨 자고 일어나자.”

“다, 단장, 단장님…. 당신…이.”

제일 던컨은 어두운 시야 속에서 버둥거리다 점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고, 끝내 자신의 의식이 저 밑으로 가라앉는 것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