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171화 (171/230)

〈 171화 〉 9. 과거(2)

* * *

“오랜만이네.”

“응. 최근에는 바빠서 못 들렀어.”

게빌과 샤인이 반대편으로 자리를 비켜준 뒤 마주 앉은 둘. 애쉬가 먼저 건넨 인사에 레이라가 대답했다.

그녀와 애쉬가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지난 번 만남 이후로 수개월 만이었다.

정확히는 애쉬가 71구역을 떠나 ‘유성 그룹’의 일로 출장을 나가기 전이 마지막이었으니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이다.

그 전에는 매달 두세 번 씩은 꼭 보곤 했던 둘이지만, 서로의 일이 바쁘고 약속을 잡으려고만 하면 이리저리 시간이 튀다보니 오늘이 되어서야 이렇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꽤나 오랫동안 보지 못했음에도 둘 사이에 어색함 같은 것은 없었다.

피차 마찬가지로 낯을 가리는 타입도 아니었고, 잠깐 얼굴 못 본 정도로 서먹서먹해질 정도로 가벼운 관계도 아니었다.

몇 개월 만에 만난 애쉬와 레이라는 막힘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그쪽 일은 잘 돼간다며?”

“덕분에. 유성 그룹과 연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편해졌어.”

레이라는 애쉬를 통해 서령과 연결된 후로 그쪽과 이것저것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뱀파이어’, 아니, 자신의 성을 따 ‘플로리스’라 이름 붙인 기업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키고 있었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천장에 가로막힌 듯 지진부진 하던 영업 그래프는 없고, 하루가 다르게 치솟아 오르고 있는 성장세만이 보인다.

애쉬로서는 그냥 잘 되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하는 마음으로 소개했던 서령과의 인연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석 같은 기회가 되어 그녀의 꿈을 향해 몇 발짝이나 도약하게 만든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유성 그룹’ 후계자와의 인맥이라는 것 하나로 이렇게나 쉽게 물꼬가 트일 일이었다면 쉴 새 없이 노력해왔던 그녀의 시간들은 무엇이 되는 건지 처음에는 조금 허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회사가 본격적으로 도시 안쪽에 진출을 시작하다보니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빠져서 이제는 그런 생각조차 할 시간이 없었다.

오늘 애쉬를 직접 만나러 온 것도 그 동안 죽어라 일했기에 겨우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것.

무척이나 유능한 그녀로서도 그것이 한계였다.

“꽤 피곤해 보이는데.”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던 애쉬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듯 하면서도 언뜻 레이라의 얼굴에 비치는 피로감을 읽고는 말을 던졌다.

그러자 레이라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순순히 그것을 인정했다.

“솔직히 지금 당장이라도 눈을 좀 붙이고 싶을 정도야.”

아무리 지금 그녀와 있는 게 애쉬라지만 평소 힘든 것을 절대 내색하지 않는 레이라였다. 그런 그녀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확인하자 지난 수개월 간의 회포를 풀기는 힘들 것을 안 애쉬가 미련 없이 그녀에게 권유했다.

“그럼 온 김에 위층에서 좀 쉬다 가든지 해.”

“음…. 고마워.”

애쉬의 권유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레이라가 거절하지 않고 힘없이 감사를 표했다.

그녀도 마음 같아서는 애쉬와 제대로 된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지난 수 개월간 이어졌고, 특히나 오늘의 시간을 내기 위해 무리한 것들 때문에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애쉬의 권유를 받아들인 레이라가 뻑뻑한 눈을 한 차례 지그시 감았다 뜨고는 쉬러가기 전 마지막으로 본론을 꺼냈다.

“오늘 내가 찾아온 건 오랜만에 당신을 보려던 것도 있지만…….”

*

“저 둘, 무슨 사이지?”

TV에 관심을 두고 있는 척 시선은 돌리지 않은 채 애쉬와 샤인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게빌이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샤인에게 물었다.

그에 애쉬의 지시에 따라 벨소리가 대화를 방해하지 않도록 모든 전화선을 뽑은 뒤 쉬고 있던 샤인이 잠시 고민했다.

“음….”

애쉬와 레이라, 저 둘의 관계를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 그리고 말한다고 하면 이 카우보이 아저씨에게 어디까지 말해도 될까.

애쉬에게 직접 무어라 말할지 물어볼 수 없는 이상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문제였는데, 이런 경우 최대한 말을 줄이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어린 샤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눈치 빠른 소년은 괜한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아주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연인… 비슷한 사이 같아요.”

“여, 연인?!”

샤인의 입에서 나온 대답에 게빌이 펄쩍 뛰듯 놀라며 물었다. 목소리를 낮추긴 했지만 이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면 일반인이라도 충분히 들었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그러자 같이 놀란 샤인이 그러지 말라는 듯 눈짓하자 다시 자리에 앉은 게빌이 애쉬와 레이라를 향해 슬쩍 시선을 돌렸다 회수하며 물었다.

“저 둘이 진짜 연인이라고…?”

다시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묻는 게빌. 샤인은 거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마도요. 연인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사이가 아니실까요?”

“허, 허허.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게빌이 소파에 몸을 쭉 늘어뜨리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대체 저 녀석은 뭐가 잘나서 저런 미인과 그런 관계가 됐단 말인가.

솔직히 같은 남자가 봐도 조금, 정말로 조금 멋있을 때가 있긴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애쉬의 성격으로 봐서는 갱단과 잘 어울릴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인연이 닿아서 저런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단 말인가.

‘젠장.’

게빌은 자신도 진작 이 슬럼에 와서 해결사 일을 시작해야 했던 건 아니었는지 ‘총잡이들의 여명’에서 지나보냈던 자신의 과거가 후회되는 것 같았다.

이쪽은 아직 ‘리퍼슨 물류’의 재무팀장, 케일과도 제대로 된 연인 사이가 되지 못했는데…….

“…부러운 놈.”

다시 눈길을 향했다간 이쪽이 훔쳐듣고 있다는 것을 들킬까 차마 다시 돌아보지 못한 게빌이 중얼거렸다.

어두운 금발과 반짝이는 것처럼 새하얀 피부. 그리고 빛을 머금은 비취빛 눈동자까지.

얼굴 뿐 아니라 정장을 입고 있음에도 완벽한 몸매를 엿볼 수 있는 저런 미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니, 정말로 부럽지 않을 수가 없다.

여태까지 애쉬의 그 무엇도 부러워하지 않았던 게빌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패배자였다.

‘나중에 케일한테 연락이라도 다시 해봐야겠어.’

그렇게 하면 갑자기 외롭고 쓸쓸해진 이 기분을 조금은 풀 수 있을까.

게빌 리퍼슨.

아직 이성과 입술 한번 맞춰보지 못한 자칭 ‘이 시대 최후의 로맨티스트’는 사실 그 별명이 무색하게도 여성을 겪어보지 못한 쑥맥이었다.

그렇게 잠시 묘한 기분이 된 게빌은 고개를 저어 그것을 떨쳐내며 다시 이어지는 애쉬와 레이라의 대화에 집중했다.

*

“이번에 그녀한테서 얘기를 들었는데 신분 생성 작업이 거의 마무리 된 것 같아.”

“오, 그래?”

“응. 아마 정식 신분이 나올 것 같아.”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애쉬가 반가운 기색을 보였지만, 레이라의 표정은 그런 애쉬의 분위기와 조금 달랐다.

살짝 굳은 듯, 혹은 긴장한 듯 하면서도 애쉬의 눈치를 살핀다.

애쉬는 이런 좋은 소식을 가져온 그녀에게서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한 분위기에 직설적으로 물었다.

“왜, 신분이 나오긴 하는데 거기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다만….”

레이라가 다시 한번 말끝을 흐리더니 애쉬를 바라봤다.

애쉬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녀의 태도에 한번 재촉해볼까 했지만, 그냥 그녀가 다시 입을 열길 기다렸다.

그렇게 십여 초가 지나자 레이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물었다.

“애쉬. 당신 혹시 ‘존(John) 시’에서 활동했던 적, 있어?”

“…뭐?”

애쉬는 상상도 못한 레이라의 질문에 자신의 사고가 굳는 것을 느꼈다.

'존 시'에서 활동했던 적이 있냐고?

어쩌다 얘기가 그런 질문으로 이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체 이렇게나 당황해본 것이 얼마만일까.

설마하니 레이라의 입에서 저런 질문이 나올 줄은 정말로 몰랐다.

애쉬가 정말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표정을 굳힌 채 잠시 입을 닫자 그를 바라보던 레이라는 곧 그런 것을 물은 이유를 덧붙였다.

“서령의 비서가 시 정부 쪽에서 알아왔다는데, 당신의 기록이 ‘존 시’에서 발견이 됐다고 해. 그것도 어째선지 거의 기록 말소 비슷하게 통제돼서는 말이야.”

거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느냐, 그리고 알고 있다면 어째서 그런 식으로 통제를 당하고 있느냐.

그런 레이라의 물음에도 애쉬는 아무런 답을 내놓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애쉬 자신도 ‘존 시’에 자신의 정보가 남아있는 이유와 그것이 반쯤 기록 말소 당한 이유를 몰랐지만, 어째서인지 감이 짚이는 부분은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 게 남아있는 거지?’

‘존John 시’는 바로 지구의 이진현이 지금 이 애쉬 론모어와 완전히 같은 외모, 이름의 캐릭터로 ‘더 사이버펑크The Cyberpunk’의 1회차를 진행하고 엔딩을 봤던 도시였으니까.

하지만 분명 모든 데이터가 이어지는 새 게임+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 시작했을 터인데…….

레이라가 꺼낸 얘기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릿속은 점점 지저분하게 엉켜만 간다.

그렇게 그의 머릿속이 온갖 생각으로 어질러져가는 와중에도 레이라의 얘기는 계속해서 진행됐다.

“……해서 그렇다는 얘기야.”

“…그래, 말해줘서 고마워.”

얘기가 이어지길 10여 분. 그렇게 시간이 지난 뒤, 애쉬가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레이라의 말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 모든 것을 전한 레이라는 애쉬의 감사 인사를 받고 그의 침실로 향해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그럼 나는 올라가서 좀 쉴게.”

“…어.”

애쉬가 레이라에게 대답하자 그녀는 모든 용건을 마쳐 홀가분하다는 듯한 발걸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애쉬는 자리에 남아 계속해서 무언가를 생각했다.

사무소 중심 자리를 차지한 채 무거운 분위기를 내뿜는 그로 인해 사무실의 분위기는 일과 시간이 끝날 때까지 조용했다.

*

레이라는 애쉬와의 얘기가 끝난 뒤 그의 침실에서 몇 시간 정도 눈을 붙인 뒤 내려왔다.

애쉬와 샤인, 그리고 게빌은 돌아가는 그녀를 사무실 바깥까지 배웅 나갔다.

레이라는 짧지만 제대로 쉬어서 그런지 피로한 기색이 조금 가신 모양이었고, 오히려 애쉬가 그것을 옮겨 받은 듯 피곤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그녀에게 눈인사했다.

그러자 레이라는 마지막으로 샤인에게 크레딧 카드 하나를 쥐어주었다.

“받아.”

“아, 이건….”

슬럼에 굴러다니는 싸구려 크레딧 카드와 달리 재질부터 범상치 않은 매끈한 크레딧 카드 한 장.

결코 적은 금액이 들어있을 것 같지 않은 크레딧 카드의 감촉에 샤인이 레이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레이라는 자신이 주는 용돈이니 괜찮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애쉬에게 인사했다.

“그럼 난 가볼게.”

“…그래. 다음에는 내가 찾아갈게.”

“훗, 그래주면 고맙겠네.”

애쉬의 말에 레이라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그때는 이번처럼 짧게 얘기만 하고 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레이라는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차량을 타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고, 자리에 남은 ‘론모어 해결사 사무소’의 셋은 다시 사무소 안으로 복귀했다.

그렇게 손님이 떠나고 모두가 사무소 테이블에 모여 앉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을 참지 못한 게빌이 자신이 훔쳐 들었던 내용을 대놓고 물으며 그 진위 여부를 확인했다.

“이봐, 진짜 ‘존 시’의 ‘다크 나이트’ 소속이었어?”

게빌의 입에서 나온 ‘다크 나이트’라는 이름은 같은 연방에 속해있지만 ‘존 시’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웨인 시’에까지 널리 알려진 이름이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무려 수억에 달하는 시민이 살아가는 거대 도시를 테러 집단에게서 구해낸 이름 없는 구원자이자, 정체 모를 영웅들이었으니까.

아무리 거리가 멀다곤 해도 일의 규모가 규모였던 만큼 웨인 시의 뒷세계에까지 알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레이라의 말을 들어보자니 애쉬가 그런 ‘다크 나이트’의 소속이었다는 것처럼 들리는 것이다.

게빌이 물었지만, 지금 애쉬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몰라, 나도.”

그의 복잡한 머릿속을 그대로 표현한 말.

이젠 정말로 자신도 잘 모르겠다.

왜 완전히 새 게임으로 넘어가며 삭제되었을 데이터의 흔적이 이 세계에 남아있는지.

레이라가 말했던,

‘그쪽에선 몇 년 전부터 시작해서 아직 당신을 찾고 있는 것 같아. 확인해본 결과 그들이 수소문하고 있는 인상착의와 이름, 모두 당신을 가리키고 있으니까.’

라는 말은 또 무엇인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진현’이라는 ‘더 사이버펑크’의 게임 플레이어와 하나 된 ‘애쉬 론모어’라는 인물은 어떤 존재인지.

이젠 정말로 단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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