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 9. 과거(4)
* * *
아, 애쉬 론모어 님이셨군요.
애쉬와 대화를 이어가던 에아임은 그의 이름을 듣고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 반응했다.
비록 그와 함께 했던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얘기는 많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서령의 목숨을 구하고 그녀가 유성 그룹의 회장 후계자로서 위치할 수 있도록 도운 일등공신.
그런 애쉬라면 한정된 몇 명에게밖에 알려지지 않은 서령의 개인 단말로 연락을 한 것도 이해가 된다.
그만큼 많은 일을 겪으며 친밀해진 사이였으니 말이다.
“어. 그래서 말인데, 그쪽 아가씨나 이번에 존 시의 시 정부에 다녀왔다던 비서 좀 만나볼 수 있겠어?”
존 시의 시 정부 말입니까? 이번에 그쪽에서 얻어온 정보 때문에 그러신가 보군요.
“응.”
애쉬가 에아임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에아임은 서령의 최측근이자 사고 회로 자체가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안드로이드다.
그런 그가 애쉬의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애쉬의 의도를 어느 정도 눈치 챈 에아임은 곧 이어 애쉬의 요청에 답했다.
그럼 이사님을 직접 뵙는 건 한번 일정을 맞춰봐야 할 것 같지만, 비서는 굳이 찾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바로 그곳에 다녀왔던 비서니까요.
에아임이 자신이 정보를 얻어온 그 비서임을 밝히자 일은 한층 더 손쉬워졌다.
상대방이 애쉬라는 것을 안 에아임은 곧장 자신의 근무 시간 이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고, 거기서 직접 얼굴을 확인한 뒤 그가 원하는 정보를 건네주기로 했으니까.
그럼 저녁에 뵙겠습니다.
“어. 아저씨도 수고해.”
뚝.
그런 인사를 마지막으로 연락을 끊겼다. 그러자 옆에서 조용히 그것을 듣고 있던 게빌이 입을 열었다.
“나도 전에 일 때문에 유성 그룹의 이사 하나를 만난 적 있었는데, 그 때랑은 느낌이 완전히 다르군. 게다가 여자….”
게빌은 연락 중 애쉬의 입에서 나왔던 그 ‘아가씨’라는 사람이 이번에 만날 생각이었던 이사급 인사임을 알아챘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그의 눈앞을 스쳐가는 과거의 기억들.
애쉬와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장면들과 원래도 괜찮은 편이었지만, 이런 상황에 특히 더 잘 돌아가는 머리가 맞물려 움직였다.
그 결과 그는 하나의 추리를 완성해낼 수 있었는데, 자신의 머리로 도출시킨 결과임에도 그것을 믿을 수 없어 스스로를 의심하며 물었다.
“설마 오늘 만나러 간다던 유성 그룹의 이사가 나와 처음 만났을 때 호위하던 여자인가?”
“어. 아직도 기억하고 있네.”
“그야….”
애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게빌로서는 잊을 수 없는 날인 게 당연했다.
그 충격적인 패배를 겪은 날이자 자신의 한쪽 손목이 날아간 날이었으니.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과거에 애쉬와 게빌 사이에 있었던 일 따위가 아니었다.
“미녀 보스에 이어서 이번엔 경호원과 호위 대상의 사랑이라니…. 세상은 정말이지 불공평하군.”
“또 뭔 헛소리야.”
애쉬가 세상에 대해 불평하는 게빌의 비약에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슨 사랑타령이란 말인가.
그러나 게빌은 그런 애쉬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그와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며 비관적으로 돌아봤다.
온갖 미인들과 문란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애쉬.
그리고 자신만의 진짜 사랑을 원한다며 케일 한 명만 바라보면서도 제대로 된 입맞춤 한번 해보지 못한 자신.
과연 이 중 정말 행복한 것은 어느 쪽일까.
게빌은 스스로를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라 칭했지만, 가끔 이렇게 정반대에 선 비교 대상이 나타나면 그 칭호를 던져버리고 싶어지곤 했다.
“됐으니까 목적지나 바꿔.”
“그래, 알았다고.”
게빌이 자신의 생각에 끼어드는 애쉬의 목소리에 힘 빠지는 느낌으로 대답하곤 결제 프로그램과 연결된 자신의 단말기를 조작했다.
목적지는 애쉬가 통화할 때 들었던 1구역의 어느 엔틱 카페.
애쉬가 유성 그룹에서 일할 때 한번 들렀던 곳이었다.
*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덜컥. 애쉬는 택시 자율주행 AI의 인사를 들으며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선선한 바람을 타고 떨어지는 부슬비가 이곳에 돌아온 그를 반기는 듯 하다.
“…슬럼을 보다 여길 보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구만.”
애쉬와 함께 차에서 내린 게빌이 주위를 둘러보며 새삼스럽게 떠들었다.
우산을 쓰고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여유가 넘치고, 그들 모두 신경 인터페이스 하나 정도는 달고 있는지 애쉬나 여타 슬럼의 주민들이 들고 다니는 것 같은 외부 단말이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잘 관리되어 청결하고 타일 하나 부서진 곳 없는 이 거리.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이렇게나 눈에 들어올 줄이야.
일주일 정도 만에 돌아온 이곳 도심의 광경에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슬럼에서는 멀쩡한 차 하나 타고 다니지도 못했었는데….
그렇게 게빌이 부서진 자신의 애마를 떠올리며 거리를 돌아보는 사이 애쉬는 먼저 발걸음을 옮겨 약속 장소인 엔틱 카페로 향했다.
서령에게 받았던 팔찌가 전류에 맛이 가버린 뒤로 그에게는 안면 인식 프로그램을 피할 방법이 없었기에 거리 곳곳에 설치된 CCTV에 오래 노출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짓이 아니었다.
“응? 이봐, 같이 가!”
애쉬가 말도 없이 먼저 이동하자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던 게빌이 한 박자 늦게 그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딸랑.
“어서 오세요.”
카페의 문이 열리며 맑은 종소리와 함께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인사했다.
애쉬는 창가에서 떨어진 카페 안쪽 자리로 향했고, 게빌은 입구 쪽에서 카우보이모자에 맺힌 물기를 탁 털어내며 카페 내부를 둘러봤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이런 고전 쪽 취향인가보군.”
밝은 나무빛깔로 칠해진 벽과 천장.
테이블이나 의자 같은 가구는 물론이고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괘종시계나 선반, 장식품 따위도 모두 나무로 만들어진 물품이다.
테이블과 의자를 제외하면 모두 현대에서는 보기 힘들어진 물건들.
전체적으로 고풍스러운 풍취가 흐르는 카페였다.
“이봐,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는데?”
“뭐,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적당히 게임이나 하면서 시간 때워.”
약속 시간까지 그냥 이곳 카페에 박혀 있을 것이냐는 듯한 게빌의 물음에 애쉬가 단말을 꺼내들며 대충 대꾸했다.
애쉬 자신도 오랜만에 이곳까지 왔는데 여기 계속 박혀 있고 싶겠는가.
나가질 못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
잘못하면 이 도심에서 대추격전을 벌일 수도 있었으니 아무리 애쉬라도 나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흠, 그럼 난 좀 나갔다오지.”
“그러던가.”
게빌은 성격상 가만히 앉아 커피 향이나 즐기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애쉬에게 약속 시간 전에는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그는 방금 물기를 털어낸 카우보이모자를 다시 쓰고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자리에 남은 애쉬는 커피를 시켜놓고 혼자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것은 어느새 빗발이 굵어지고 약속시간이 되어 게빌이 돌아올 때까지 계속됐다.
딸랑!
카페의 문이 벌컥 열리며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된 게빌이 뛰어 들어왔다.
“으, 젠장. 되도록이면 비는 맞고 싶지 않았는데.”
투덜거리는 게빌은 그의 말처럼 비에 쫄딱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있었다.
자랑하던 케이프와 카우보이모자가 다 젖어 가라앉은 것은 당연하고, 그 밑에 있던 옷이라고 멀쩡할 리 없다.
그의 상태는 당장 카페 주인인 중년 여성이 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오는 게빌을 반쯤 노려보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핫, 나가서 놀고 온다더니 수영이라도 하고 오셨나?”
“아주 시원하게 놀고 왔지.”
슬쩍 상태를 눈짓하곤 그의 몰골을 보고 놀려대는 애쉬에게 게빌이 착착 달라붙는 옷을 벗어던지며 대꾸했다.
결국 게빌은 가장 안쪽에 입은 흰 티만 남겨두고 상의를 모두 벗었는데, 그 흰티마저 모두 젖어있던 탓에 그의 탄탄한 몸이 바깥에 모두 드러났다.
“그나저나 아직 그 유성 그룹의 비서는 안 온 것 같군.”
“곧 약속시간이니 늦지 않게 오겠지.”
애쉬는 게빌에게 대답하며 시간을 봤다.
그의 말대로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10분 남짓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에아임의 성격상 30분 전에는 도착했어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사람이 언제나 그렇게 시간을 여유롭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보니 이럴 때도 있을 수 있지 싶었다.
“…….”
그러나 시간은 계속 흘렀지만 만나기로 약속했던 상대방은 나타나질 않는다.
약속시간이 되어도 얼굴을 보이질 않는 에아임.
사람이 늦을 때도 있지, 하고 생각하던 애쉬는 약속 시간에서 30분이 더 지나자 슬슬 짜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이쪽이 갑작스럽게 약속을 잡았다곤 하나 이 시간에 만남이 가능하다고 확언을 준 것은 그쪽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30분 이상씩 늦어버리면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흐, 바람맞았군.”
“…닥쳐.”
카페의 주인에게 물받이를 받아 옷의 물기를 짜던 게빌이 웃었고, 애쉬가 거기에 대고 내뱉었다.
어쩌다보니 꼴이 이렇게 됐지만, 에아임이 갑작스럽게 약속을 깰 사람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슬슬 애쉬가 단말을 들어 에아임에게 연락을 하려고 할 때였다.
딸랑딸랑.
카페의 문에 달린 종소리가 울렸고, 애쉬와 게빌, 그리고 카페 주인의 시선이 단숨에 그쪽에 쏠렸다.
문이 열리고 깔끔하게 잘 차려입은 낯익은 얼굴의 남성, 에아임이 들어온다.
애쉬는 그를 발견한 순간 인사 하려고 했지만, 그 뒤에서 튀어나온 여성을 보고는 그것을 멈추고 말았다.
“애쉬!”
타다닷!
오늘의 약속에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도 않았던 서령이 무척이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와 그에게 안기는 것이다.
그 돌발적인 행동에 갑자기 그녀를 품에 안게 된 애쉬는 물론이고,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게빌도 굳어버리고 말았다.
“…무슨.”
게빌은 일전에는 워낙에 날도 어둡고 일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보니 제대로 살피지 못했었지만, 이번에 직접 보니 알 수 있었다.
그 날 애쉬가 구한 유성 그룹의 이사가 대단한 미인이라는 것을.
‘대체 왜 이 녀석에게만.’
게빌이 그런 불만인지 후회인지 모를 생각과 함께 굳어 있을 때, 뒤늦게 당황한 얼굴로 다가온 에아임이 애쉬에게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게, 사실은 늦지 않게 출발하려 했습니다만 이사님께서 어떻게든 같이 가야하니 기다려달라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애쉬. 그래도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어요.”
늦을 것 같다고 미리 연락하지 못하게 막은 것도 서령의 소행이었다는 설명에 애쉬는 기분을 조금 풀었다.
자신을 보고 싶어서 어떻게든 같이 오느라 늦었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그보다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바빠도 오랜만에 애쉬를 보는 건데 와야죠!”
서령이 고된 업무에 지친 몸에도 불구하고 기운찬 목소리로 대답했다.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있으니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다.
한동안 서령은 애쉬의 품에 안긴 채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아가ㅆ, 아니 이사님께서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시는 분이 아닌데, 죄송합니다.”
에아임도 처음 보는 서령의 모습에 놀란 듯 했지만, 곧 당황의 감정을 수습하고 애쉬에게 사과했다.
잠시 후 떨어진 애쉬와 서령.
네 명의 일행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애쉬와의 해후를 즐긴 뒤 미소를 짓고 있던 서령은 그제야 들뜬 기분이 조금 가라앉은 듯 애쉬의 옆에 앉아있던 게빌을 발견하고 말했다.
“아, 그쪽 분께는 인사를 못 드렸네요. 저는 유서령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게빌 리퍼슨이고, 내 부하야.”
“부하는 무슨…! 부하가 아니라 동룝니다.”
서령의 말에 바로 이어진 애쉬의 대답. 게빌이 거기에 발끈해선 단어를 정정했다.
애쉬는 그런 게빌을 반응을 보면서도 더 이상 무어라 말하지 않고 그저 놀려먹는 게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는데, 둘 사이에 오가는 짧은 감정의 교류를 보던 서령도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애쉬 씨의 동료라면 이번 일에 대해서 얘기를 들으셔도 되는 분이겠죠?”
“뭐,듣고 싶다고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잖아.”
애쉬의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서령은 에아임을 보며 말했다.
“네.에아임, 그럼 준비해온 자료랑 간단한 설명 부탁해요.”
당신이 존 시에 들러 어떤 정보를 받아왔는지.
“예.”
서령의 명령에 답한 에아임은 참고하라는 듯 서류 가방에서 종이 뭉치 하나를 꺼내어 애쉬 쪽으로 넘기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존 시에 들른 것은 약 한달 전이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