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 9. 과거(8)
* * *
쿠웅.
원래도 신체 일부를 개조한 사이보그였던 베일라가 파워 슈트의 무게가 더해진 탓인지 유독 무게감 가득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그것을 확인한 애쉬는 돌아서며 불편한 글러브를 휙 벗어던졌다.
“똑같이 당할 거면서 까불긴.”
그리고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는데, 그런 말과 달리 제법 즐긴 듯한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 꽤 열심히 했나보네.’
베일라와 보지 못했던 지난 몇 달 동안 그녀도 열심히 훈련했는지, 파워 슈트로 인한 신체 능력의 강화 이전에 움직임 자체가 더 좋아진 느낌이다.
앞으로도 이렇게 발전한다면 가끔 주기적으로 들러 맨몸 격투기로 한 번씩 놀아주는 것도 나름 재밌을 것 같았다.
베일라를 쓰러뜨린 애쉬가 케이지를 내려오자 연구원들이 급히 움직이며 뒤를 정리했다.
“일단 정신을 잃은 베일라 씨부터 수습하고 파워 슈트는 나중에 해제해!”
“거기! 데이터는 잘 뽑혔어?”
“예, 예! 테스트 시간이 조금 짧긴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필요한 부분에 대한 정보는 얻었습니다!”
“그럼 데이터 정리해서 올리고, 확인 후 개선점에 대해…….”
연구원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던 일행은 애쉬가 케이지에서 내려오자 그에게 다가갔다.
“굳이 저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흥, 도발을 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걱정어린 에아임의 목소리에 애쉬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베일라 딴에는 파워 슈트를 입어서 자신감이 생겼던 것 같은데, 그런 녀석들에게 현실을 알려주는 것은 애쉬가 자주 하던 일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마찬가지.
아직 개발이 끝나지도 않은 파워 슈트 하나로 거리를 좁히기엔 베일라와 애쉬 사이의 격차가 너무 컸다.
“베일라, 이번에는 반드시 되갚아줄 거라고 자신만만했는데. 져버렸네요.”
서령이 이제 막 고개를 들어 올리는 베일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연구원들의 부축에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베일라는 분하다는 표정으로 애쉬를 바라봤는데, 그런 시선을 느낀 애쉬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향해 아직 멀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그것을 본 베일라가 이를 악물고 파워 슈트를 해제하는 것이 마지막 모습.
그녀는 의료진으로 추정되는 이들과 함께 어딘가로 향했고, 일차적으로 정리를 끝낸 연구원들이 애쉬에게 다가와 질문의 세례를 쏟아냈다.
“대체 어디서 어떤 강화 시술을 받으신 겁니까? 맨몸으로 파워 슈트를 압도할 정도라니, 저희 측 연구에 도움을…!”
“베일라 씨가 저렇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건 처음 봤습니다! 앞으로도 테스트에 도움을 주신다면 확실히 사례하겠습니다!”
“아니, 그보다 신경 인터페이스가 없으시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한번 이식해보실 의향은 없으신지…!”
순식간에 대여섯 명이 몰려들어 하는 말들이 전부 그의 몸에 대한 정보를 얻어 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기계 쪽을 다루는 이들이 뭣 때문에 자신의 분야와는 관계도 없는 쪽을 궁금해 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게 애쉬에게 유쾌하게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애쉬는 자신이 딱 질색하는 안경잡이들이 그를 둘러싸고 떠들어대자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기색의 표정이 되어갔는데, 다행히도 그것이 폭발하기 전에 서령이 나서서 연구원들을 물렸다.
“다들 제 손님께 무례를 끼치지 말고 자리로 돌아가세요.”
“하, 하지만 이사님! 조금만 연구를 해보면 그쪽 분야에 어떤 발전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이나임 2급 연구원. 저는 분명히 자리로 돌아가라고 했을 텐데요.”
서령이 딱딱한 목소리로 나선 연구원의 직급과 이름을 부르며 경고하듯 말했다.
반년 조금 더 전까지만 해도 그룹 내에서 그 친절함과 부드러운 성격으로 유명했던 서령이었다.
그러나 지금 시간이 지나 유성 그룹의 후계자가 된 서령은 다르다.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다룰 줄 알게 됐으며,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이용하거나 어조, 표정 등으로 분위기를 형성하여 상대방을 압박하는 법도 알게 된 것이다.
더 이상 그녀는 부하들에게 착하기만 한 유서령 이사가 아니라 유진혁 회장에게 교육받고 스스로 체득한 바에 따라 부하들을 통제하는 유서령 회장 후계가 되었다.
“그, 죄, 죄송합니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 서령의 목소리에 이름이 불린 연구원이 실책을 깨달은 듯 사죄하며 물러났다.
그것으로 상황은 끝이었다.
연구원들은 서령의 눈치를 보며 물러났고, 애쉬는 안경잡이들의 사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
애쉬는 그런 서령의 변화에 작은 목소리와 함께 많이 변했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그런 눈빛에 일말의 부끄러움과 같은 감정을 느낀 서령은 슬쩍 시선을 돌리며 애쉬에게 말했다.
“그럼 베일라의 상태를 좀 보고 나머지를 구경하러 갈까요?”
“그러지, 뭐.”
지금처럼 서령의 부하들이 잔뜩 있는 곳에서 그녀를 놀려줄 수는 없으니 다음에 그것은 다음에 하기로 한 애쉬가 서령의 제안에 동의했다.
애쉬와 서령 일행은 연구실 구석에 마련된 휴게실 같은 곳에서 베일라를 찾았다.
“아…, 오셨습니까.”
“어. 머리는 좀 어때?”
“덕분에 조금 어지럽군요.”
침상에 앉아있던 베일라가 애쉬의 물음에 답했다.
베일라는 파워 슈트를 벗은 채 침상에 앉아 있었지만, 안색이 조금 창백해진 것이 그녀의 말대로 꽤나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파워 슈트가 뇌에까지 충격이 덜 닿도록 완화시키는 것을 느낀 애쉬가 힘을 조금 과하게 줬던 것 같다.
애쉬가 창백한 안색의 베일라에게 다시 장난을 걸었다.
“내가 이번에도 힘 조절을 좀 실수했나? 살살 친다는 게 그만.”
“…식.”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분명 개자식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애쉬는 자신의 놀림에 평소보다 과하게 반응하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애쉬가 아픈 베일라를 두고 놀리기를 멈추지 않자 서령이 중간에 나서서 그것을 끊었다.
“애쉬도 그만해요. 몸은 좀 괜찮아요, 베일라?”
“아, 예. 조금만 쉬면 그래도 멀쩡해질 것 같습니다.”
“이제 남은 테스트가 몇 개나 있죠?”
“가벼운 격투에 따른 민첩성과 충격 흡수 기능 테스트는 끝났으니 아마 근력 강화 기능과…….”
“사격 및 운동 보정 기능 테스트가 남았습니다.”
“예. 수석 비서의 말 그대로입니다.”
아직 머리가 어지러운 베일라가 잘 떠올리지 못하는 듯하자 서령 뒤편의 에아임이 끼어들어 답을 보충했다.
그런 베일라의 대답에 서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두 잠시 쉬었다가 남은 테스트를 확인하죠. 애쉬랑 동료 분도 괜찮죠?”
“아, 예. 저는 괜찮습니다.”
서령의 물음에 게빌이 곧장 답했지만, 애쉬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뜸을 들였다.
그것을 본 서령이 뭔가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 그를 불렀다.
“애쉬?”
“아니, 생각해봤는데 사격 쪽 테스트는 이 녀석한테 맡겨도 될 것 같아서.”
“네?”
“뭐라고?”
자신의 옆에 서있던 게빌을 가리키며 내뱉는 애쉬의 말에 서령과 장본인인 게빌의 목소리가 겹쳤다.
그에 애쉬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굳이 기다리면서 시간을 버릴 필요는 없잖아. 다른 건 구경할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베일라도 쉬면서 구경하면 좋을 것이고, 무엇보다 게빌의 사격 실력은 애쉬도 인정할 만큼 대단했으니 사격 보정 쪽 데이터 수집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적어도 일방적으로 두들기다 끝에는 완전히 쓰러뜨려버린 애쉬와 베일라의 전투 데이터보다는 말이다.
“으음.”
그런 애쉬의 말에 서령을 비롯한 에아임과 베일라가 시선을 게빌에게 향했고, 여태껏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있었던 게빌이 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드냐는 듯 애쉬를 쳐다봤다.
‘이 자식….’
자신이 해할 뻔 했던 서령의 사회적 위치가 위치였고, 무엇보다 이곳은 유성 그룹의 안방이라고 할 수 있는 곳.
솔직히 파워 슈트를 보며 군침을 삼키던 게빌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관심을 받는 것을 바란 건 아니었다.
자신이 곤란해 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엿 먹이는 게 분명한 애쉬에게 이글거리는 눈빛을 쏴대던 게빌.
애쉬는 그런 그에게 픽 웃으며 말했다.
“왜, 한 번쯤 입어보고 싶잖아.”
마침 애쉬 자신과 달리 게빌은 신경 인터페이스도 달고 있겠다.
게빌이 제일 자신있어하는 분야인 사격의 테스트라니 한 번쯤 해보면 좋을 것 아닌가.
“그럼 게빌 씨, 한번 해보실래요?”
그런 애쉬의 제안을 들어 나쁠 것도 없겠다 싶은 서령이 물었고, 게빌은 거기에서 약간의 부담과 파워 슈트에 대한 기대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럼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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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용에 불편함은 없으십니까?
“목 뒤의 데이터 칩을 제외하면 딱히….”
챠르르륵. 부드럽게 맞물리는 파워 슈트의 손을 쥐었다 펴보거나 허리를 돌려보는 등 몸을 움직여본 게빌이 스피커의 목소리에 답했다.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에는 불편함이 없었지만, 역시나 신경이 쓰이는 것은 신경 인터페이스 결합부에 직접적으로 꽂아진 데이터 칩 하나의 이질감이다.
게빌의 신경 인터페이스 내에 나노머신 통제 시스템 자체를 설치했다간 정보의 유출이 있으니 그 대안으로 외부 장치를 달아둔 것인데, 머리칼 따위가 걸리는 느낌이 들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어쩔 수 없으니 최대한 신경을 다른 쪽에 집중해주시고, 테스트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테스트는 총 10분 간 진행되며 게빌이 해야 할 것은 점차 빨라지는 표적을 맞출 수 있는 한 최대한 맞춰서 떨어뜨리는 것.
기본적으로 파워 슈트 내에 내장된 사격 보정 시스템이 그것을 도울 것이며 혹시라도 게빌이 좋은 결과를 낸다면 그 데이터를 수집해 보정 시스템의 보완에 쓰일 것이라는 것이 연구원의 설명이었다.
이해하셨다면 잠시 준비를 끝낸 뒤 테스트를 진행하겠습니다.
“예.”
그렇게 설명을 다 들은 게빌은 잠시 시선을 돌려 강화 유리창 하나를 두고 서있는 바깥의 일행을 바라봤다.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애쉬와 기대된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는 서령.
그리고 에아임과 베일라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일행들을 모두 확인한 게빌은 마지막으로 유리창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는데….
‘진심으로 탐나는구만….’
백색 기사 갑주 형태의 파워 슈트 표면, 회로에 흐르는 푸른빛의 물결.
손에 들린 리볼버는 물론이고 그가 평소 쓰고 다니는 카우보이모자와도 묘하게 잘 어울리는 느낌이라 스스로의 모습이 무척이나 만족스럽게 보였다.
신체 능력도 체감될 정도로 오른 것 같은데다 착용감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멋있으니 더 정신이 고양되는 기분.
소위 뽕에 취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전력을 다해서 테스트에 임해주겠다.
진심이 되어버린 게빌이 눈을 예리하게 빛냈고, 곧 스피커를 통한 연구원의 목소리가 테스트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지금부터 사격 보정 시스템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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