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179화 (179/230)

〈 179화 〉 9. 과거(10)

* * *

“으응….”

따뜻한 체온이 부드럽게 감겨오며 작은 소리를 낸다.

잔뜩 쏟아내고 푹 잠들었던 애쉬는 그런 작은 인기척에 눈을 떴다.

정면에 보이는 것은 그와 지난밤을 함께한 서령의 잠든 얼굴. 새벽 늦게까지 괴롭혀서 그런지 해가 중천에 뜬 시간임에도 깨어날 생각을 않는다.

사랑스럽게도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서령을 바라보던 애쉬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또 해버렸군.’

서령과 함께 저녁 식사를 끝마친 애쉬는 그냥 잡아뒀던 호텔에서 밤을 적당히 보내려고 했는데, 보내줄 수 없다는 듯 소매를 꽉 잡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그녀에게 못 이겨 다시 한번 이렇게 잠자리를 갖고 말았다.

물론, 그녀와 함께한 잠자리가 좋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애쉬는 상대방 측에서 진지하게 호의를 전해오면 그것을 멀리하는 편이었다. 그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원래 이진현이 갖고 있던 가족, 친구, 그 외의 인연들.

과연 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이 세계에서 쌓은 인연이 중요한가 하면 그것은 절대로 아니다.

20여년이라는 세월과 비교하기에 불과 3년 남짓한 시간은 너무도 짧았고, 특히나 그가 깊은 관계를 갖지 않기 위해 일정 선 안으로 들어오려는 이들을 일부러 멀리했으니.

하지만 서령은 일부러 자신을 밀어내는 듯한 애쉬의 태도에도 아랑곳 않고 진심을 부딪혀왔다.

애쉬가 세운 단단한 벽에 자신의 마음이 깨질 것 같아도 더욱 강하게.

그리고 그렇게 그녀의 마음에 금이 갈 때쯤이면 애쉬도 그것을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하고 받아주는, 그런 식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있을지 모르는 끝을 생각한다면 이런 식으로 말려들어 받아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미치겠군.”

서령의 애달픈 눈빛은 도저히 외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후회감과 만족감에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던 애쉬는 자신의 허리에 감겨있는 서령의 팔을 조심스레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날의 흔적이 잔뜩 남아 있는 나신이 세상에 드러났지만, 지금 그것을 볼 이는 없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선 애쉬는 곧장 시계로 시선을 돌렸는데, 이미 중천에 떠있는 해를 보고 예상했다시피 시간은 이미 정오가 지난 이후.

슬슬 다른 이들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기에 애쉬는 아직 잠들어 있던 서령을 깨웠다.

“유서령, 슬슬 일어나야지.”

“우으응.”

서령은 자신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그의 손길에 반응했지만 고개만 살살 저으며 눈을 뜰 생각을 않았다.

거의 깨어있긴 한 것 같은데 별로 일어나고 싶지 않아하는 느낌.

잠깐 더 건드려보던 애쉬는 일어날 생각을 않자 그냥 서령을 깨우는 것을 포기하고 그녀를 확 들어 안았다.

이불 밖으로 새하얀 몸과 거기에 새겨진 자신의 흔적이 드러나자 다시 한번 덮치고픈 욕망을 느꼈지만 이미 시간은 생각했던 것보다 늦은 상태다.

가볍게 그 욕망을 떨쳐낸 애쉬는 샤워실로 향했다.

­ 쏴아아.

샤워 호스를 통해 쏟아지는 물이 적당한 온도가 된 것 같아지자 자신의 몸을 씻으며 함께 데려온 서령의 몸도 부드럽게 닦아준다.

“흐흥.”

그쯤 되자 서령도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었는지 몽롱한 눈으로 자신을 안고 있는 애쉬를 바라보다 배시시 웃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서령의 어리광에 애쉬도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그것을 받아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일어나. 슬슬 체크아웃 할 시간이니까.”

“네에.”

애쉬의 말에 늘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한 서령이 쪽 하고 그의 가슴에 입을 맞추곤 품에서 벗어났다.

유혹인지 애교인지 모를 그녀의 행동에 다시 한번 치솟은 욕망을 꾹 눌러 집어넣은 애쉬와 서령은 곧 샤워를 마치고 체크아웃까지 끝낼 수 있었다.

*

카드키 수납을 확인했습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령과 함께 내려온 애쉬가 무인 데스크에 카드키를 반납하자 AI의 음성이 인사했다.

그리고 그 직후, 돌아서자마자 그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좋은 시간을 보내셨겠구만.”

시선을 돌려보니 아주 배알이 꼴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빌이 에아임과 함께 서있었다.

애쉬가 그런 게빌에게 대놓고 약올리듯 픽 웃는 것과 함께 에아임을 발견한 서령이 일방적으로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는 자신의 수석 비서에게 다가갔다.

“에아임.”

“예. 조금 늦으셨습니다, 이사님.”

“어차피 오전은 반차를 냈으니 이제부터 조금 급하게 가면 될 것 같은데, 운전 잘 부탁해요.”

“최대한 노력해보겠지만 십여 분 정도의 지각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가끔은 늦을 수도 있죠.”

서령과 에아임이 빡빡한 오후 일정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조금 떨어진 곳의 애쉬는 게빌을 놀리고 있었다.

“넌 파워 슈트도 받았고, 난 다른 걸 받은 거지.”

“…망할 플레이보이 자식.”

‘뱀파이어’의 레이라 플로리스라는 미인과도 심상치 않은 관계였던 것 같은데, 설마설마 했던 유성 그룹의 후계자와도 이런 관계일 줄이야.

아무리 유성 연구소에서 받아온 파워 슈트의 가치가 대단하다지만 그런 파워 슈트를 만들어내는 기업체의 주인이 될 여성보다 대단할 수는 없다.

연구실장의 계약서에 서명을 한 직후에야 서령이 유성 그룹의 후계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게빌은 애쉬를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그렇게 애쉬와 서령, 양측이 자신의 파트너와 짧은 대화를 나눈 후 서령은 애쉬에게 급히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애쉬. 마음 같아선 오늘도 같이 있고 싶은데 오늘은 일 때문에 정말 어쩔 수가 없네요. 다음에 올 때는 미리 연락하면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알았죠?”

서령은 못내 아쉬운 눈길로 애쉬를 바라봤고, 애쉬는 그런 그녀의 말에 무어라 답하려다 곧 자신의 입술을 덮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느낌에 눈을 크게 떴다.

서령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춘 것이다.

“아, 아가씨…!”

설마 서령이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과감한 애정표현을 보일 줄은 몰랐던 에아임이 당황한 듯 이사님이란 말이 아니라 아가씨라는 명칭으로 그녀를 불렀지만, 서령은 거기에 신경 쓰지 않고 입맞춤을 끝까지 맞춘 뒤에야 물러났다.

“그럼 다음에 봐요!”

“…그래.”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다는 듯 움직이는 서령은 그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났고, 애쉬는 잔뜩 썩은 표정으로 파워 슈트 캐리어를 들고 있던 게빌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다시 71구역의 ‘론모어 해결사 사무소’로 돌아갈 시간.

물론 이것으로 모든 일정이 끝난 것은 아니고, 사무소에서 물건을 챙겨 찾아가야 할 곳이 또 있었다.

* * *

“이봐, 다시 일 시작인 줄 알았는데 이번엔 또 어딜 간다는 거야?”

도심에서 슬럼으로 돌아온 다음 날.

답지 않게 어딘가로 또 움직이겠다는 애쉬의 말에 게빌이 물었다.

같이 일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부지런하게 움직일 애쉬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는데 또다시 뭔가 하러 간다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애쉬는 그런 게빌의 물음에 대충 대답했다.

“대장간.”

“대장간?”

“어. 이번에도 따라올 거면 따라오던가.”

애쉬의 대답에 게빌은 잠시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대장간 같은 게 있단 말인가. 화기는 물론이고 창이나 칼 같은 냉병기도 공장에서 뽑아내는 시대에.

그렇게 게빌이 의문을 갖고 있을 때도 애쉬는 기다리지 않고 먼저 움직였고, 한 박자 늦게 그것을 발견한 게빌이 급히 뒤따랐다.

“어이, 같이 좀 가자고!”

“올 거면 빨리 오던가.”

귀찮음이 묻어나는 애쉬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그들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71구역 외곽으로 향했는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데.’

목적지, ‘에리히 대장간’에 내린 애쉬가 표정을 바꿨다.

비록 위치는 좋지 않을지언정 에리히 영감과 그 도제들의 움직임으로 생명력 넘쳐나던 대장간은 온데간데없고 망치 소리 하나 울리지 않는 적막만이 흐른다.

대충 외부에서 봤을 때 외관상의 차이는 크게 없는 것이 아직은 지속적으로 관리되고 있거나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그럼에도 조용하다는 것이 더 이상했다.

“이봐, 애쉬. 겉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럼 들어가보자.”

자신이 모르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애쉬가 조금은 빠른 발걸음으로 대장간 안쪽을 향했다.

그렇게 들어가자 다행히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닌지 쇠질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역시나 평소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았다.

일단 애쉬와 게빌은 망치질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사람을 발견했다.

“이봐.”

“…? 아, 애쉬 님이시군요.”

애쉬의 부름에 땀을 흘리며 망치질하다 돌아보는 한 명의 도제.

그는 가끔 이곳에 들리곤 하던 애쉬를 알아봤기에 대화는 쉬웠다.

애쉬는 곧장 젊은 도제를 향해 물었다.

“여기가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 무슨 일이야?”

“그게….”

도제는 누군가에게 외부에 소식을 알리지 말라는 얘기라도 들었던 듯 말하기 껄끄럽다는 느낌으로 들였다.

그에 답답해진 애쉬가 한 마디 하려던 찰나, 그의 말을 끊고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뭐라고 했는진 모르겠는데, 괜히 뜸들이지 말고 그냥 말….”

“애꿎은 녀석은그만 다그쳐라, 이놈아.”

거침없이 애쉬를 향해 이놈저놈 하는 노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비록 그 내용은 거칠지언정 애쉬에게는 익숙한 목소리였기에 그는 반가운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곧 자신의 눈에 드러난 광경을 보고서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애쉬가 시선을 돌린 곳에는 장대한 체구의 노인, 에리히 영감이 평소와 같이 불이 쏟아져 나올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팔과 다리, 그리고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허리에는 누가 봐도 경상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붕대를 둘둘 감고서.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