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180화 (180/230)

〈 180화 〉 10. 에리히 슈만(1)

* * *

“영감은 또 왜 그 꼴이래. 그 나이에 드잡이질이라도 했어?”

에리히 영감을 발견한 애쉬가 그를 놀리듯 물었다.

말의 내용이야 대놓고 약 올리는 것 같았지만, 조금 가라앉은 그 눈을 통해 전해지는 감정만큼은 숨길 수 없다.

그런 애쉬의 눈동자를 읽은 에리히 슈만은 애쉬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곤 앞장서서 대장간 안쪽으로 움직였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따라 와라.”

에리히 영감의 말에 애쉬와 게빌은 일단 그를 따랐고, 곧 애쉬도 몇 번 들렀던 사무실 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째선지 텅 비어있는 사무실에 도착하자 애쉬와 게빌에게 적당한 자리를 내어준 에리히 영감이 애쉬를 향해 자연스럽게 물었다.

“한동안 안 오길래 검은 잘 쓰고 있나 했는데, 또 무슨 문제가 생긴 게냐?”

“그런 건 아닌데 오랜만에 정비도 좀 받고 보여줄 것도 있어서.”

애쉬가 자신이 한 손에 들고 있는 천으로 감싸인 길쭉한 무언가를 슬쩍 보이며 대답했다.

그것은 저번 ‘총잡이들의 여명’과 ‘웃는 악마’의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이었는데, 다른 게 아니라 ‘웃는 악마’의 부단장인 제일 던컨이 사용하던 검이었다.

그 내구성은 물론이고 빛깔도 예사롭지가 않아 뭔가 특별한 재질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가져왔는데 막상 얼굴을 본 에리히 영감의 상태가 이상한 것이다.

그런 애쉬의 말에 에리히 영감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헌데 보다시피 대장간의 상태가 이래서 말이다. 정비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 같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게다. 그리고 보여주고 싶다는 건?”

“…여기 이거긴 한데.”

애쉬가 천으로 감싼 제일 던컨의 검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애매한 어조로 대답했다.

사실 지금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라 왜 대장간이 이런 꼴이 됐으며 에리히 영감은 뭘 어쩌다 다쳤냐는 것이었다.

척 봐도 무슨 재해나 사고로 일어난 일은 아닌 것 같았는데, 저쪽에선 애쉬 자신이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먼저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에리히 영감은 애쉬가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검에 손을 가져갔지만 그보다는 그것을 회수하는 애쉬의 손놀림이 한층 더 빨랐다.

졸지에 헛손질을 하게 된 에리히 영감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뭐하는 거냐. 보여주려고 가져왔으면 보여줄 것이지.”

“아니, 그것보다 먼저 들어야할 게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자신을 반쯤 노려보는 것 같은 에리히 슈만의 눈빛에 애쉬는 이상할 정도로 텅텅 빈 사무실을 한 차례 둘러보는 것으로 자신이 들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신 설명했다.

평상시에는 그래도 사무직이 몇몇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심지어는 사무직들의 책상 위에 옅은 먼지가 쌓인 것이 자리를 비운 지도 꽤나 된 것 같았다.

그런 애쉬의 말에 에리히 영감은 다시 한번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딱히 신경 쓸 필요 없다. 모두 끝난 일이니.”

“끝나긴.”

애쉬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티는 안 냈지만 애쉬는 지금 자신의 눈에 보이는 에리히 영감의 상태에 열이 조금 오른 상태였다.

에리히 슈만과 애쉬에게는 다소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둘은 가까운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이였다.

언제 봐도 반가우며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가 만난다고 해도 어색함이라곤 느낄 수 없는 그런 사이.

에리히 슈만과 애쉬 둘 다 입 밖으로 내진 않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뻔히 누군가에게 뭔가를 당하고 와선 모두 끝난 일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한들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애쉬는 자신과 에리히 슈만이 완전히 가족 같은 사이는 아닐지언정 그 정도의 복수를 해줄 의리는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에게 힘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애쉬가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에리히 슈만은 그냥 넘어가기 위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어조로 대장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그냥 갱들과 약간의 부딪힘이 있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지금은 모두 끝난 상태고.”

“갱? 어떤 놈들인데.”

“거기까진 신경 쓸 것 없다.”

“대장간이 이 꼴이 됐는데도 신경을 쓰지 말라고?”

그냥 작은 부딪힘으로 끝나는 일이었으면 애쉬도 굳이 나서지 않았다. 다만 지금 대장간의 상태를 보라.

많던 도제들은 다 사라졌고, 대장간의 재무와 기타 인사 업무를 관리할 사무직들의 업무용 책상에는 먼지가 쌓이지 않았던가.

누가 봐도 심각한 상태임이 보였는데 이걸 그냥 넘어가라고?

애쉬의 그런 물음에 에리히 슈만이 대답했다.

“어차피 조만간은 나도 쉴 생각이었다, 이 녀석아. 나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어지간한 젊은 놈들보다 기운이 넘치는 양반이 쉬기는.”

“됐으니 가져온 물건이나 보여줘 봐라. 기존에 있던 검의 정비도 필요하면 말하고.”

에리히 슈만은 애쉬의 끈덕진 질문에도 더 이상 입을 열 생각을 않았다.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이곳을 이렇게 만든 갱들이 어떤 놈들이지 끝까지 캐묻지 못한 애쉬가 제일 던컨의 검을 넘겨줬고, 에리히 슈만은 천에 감싸인 그것을 풀어헤쳐 살폈다.

“흠…. 겉으로만 봐서는 조금 알아보기가 힘든 부류구만.”

드러난 검신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에리히 슈만.

애쉬는 그런 에리히 영감의 목소리를 듣다가 옆자리에서 팔짱을 낀 채 얘기를 듣고 있던 게빌의 어깨를 툭 건드리곤 바깥을 향해 눈짓했다.

앞에서 봤던 그 도제를 찾아 얘기를 캐물어보라는 뜻이었다.

그런 애쉬의 눈짓이 담은 의미를 단박에 읽은 게빌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바깥으로 향했고,사무실을 벗어난 뒤 도제를 찾아 복도를 몇 걸음 걷던 중 문득 생각했다.

‘내가 저 녀석의 부하도 아니고 왜 아무 말도 없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지?’

자신에게 지시하는 애쉬의 태도가 너무도 자연스러워 잊고 있었지만 그와 애쉬는 부하와 상사가 아니라 동료일 터.

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중요한 일 같아서 이대로 돌아가 따지기도 좀스럽다.

‘일단은 도와준다. 도와주는데.’

다음부터는 국물도 없을 줄 알아라.

그렇게 생각한 게빌은 도제를 찾아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

“그럼 이만 가볼게, 영감.”

“흥, 다음번에 올 때는 좋은 술 하나 갖고 온다던 녀석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어차피 며칠 뒤에 다시 올 건데 뭘. 그때 가져올게.”

“항상 말만 잘하는구나.”

물에 빠져도 입만 둥둥 뜰 놈.

에리히 영감이 퉁명스레 하는 말에 애쉬가 픽 웃으며 잘 있으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다음번에는 진짜 술이라도 한 병 가져와야겠군.’

저 영감이 무슨 술을 좋아하더라. 보드카였나?

그럼 다음번에는 그쪽 종류의 술 중에 하나를 골라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장간을 벗어난다.

아쉽지만 연방에서 손에 꼽는 장인인 에리히 영감도 제일 던컨의 검을 이루고 있는 재질이 무엇인지 한 번에 알아볼 수는 없었고, 장비를 동원해 확인해볼 테니 며칠 뒤에 찾아오라는 것이 둘이 나눈 마지막 대화.

그때쯤 가면 확실하게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곳에 찾아온 일차적인 용건은 끝났으니 이제는 다른 쪽에 집중할 때였다.

대장간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애쉬가 게빌에게 물었다.

“도제는 뭐래?”

“그쪽도 정확히는 모르던데. 다만 이쪽이 아니라 다른 구역에 들어온 놈들 같다더군.”

게빌이 애쉬의 물음에 답했다.

애쉬의 지시에 따라 도제에게 캐물어본 결과 나온 정보는 별 것 없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이 이곳 71구역이 아닌 다른 구역에서 온 녀석들 같다는 설명만 했을 뿐.

그 외에는 갱단에 대항하던 도제들이 다들 심각한 부상을 입어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됐으며 그에 겁먹은 사무직들이 모두 일을 그만뒀다는 얘기가 전부였다.

그것만으로 이곳 대장간을 습격한 갱단이 어떤 녀석들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유일하게 알고 있을 것 같은 에리히 영감은 입을 열 생각을 않았고.

“이봐, 이제 어떡하려고?”

“일단 어떤 놈들인지 찾아봐야지.”

앞으로의 향방을 묻는 게빌의 말에 애쉬가 대답했다. 당장 피해자들에게서 쓸 만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고 해서 찾지 못할 건 아니었다.

다만 일이 좀 귀찮게 될 뿐이지.

이런 쪽으로 도움을 얻을 녀석이 있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빌헬름이었다.

­ 뚜르르르.

구식 개인 단말로 신호음이 몇 번 울리자 어느 순간 그것이 뚝 끊기더니 방금 전까지 자고 있기라도 했는지 조금 잠긴 목소리의 빌헬름 연락을 받았다.

­ 예에. 빌헬름 메이젤 받았습니다.

“어, 빌헬름. 난데. 부탁할 게 있어서.”

­ 아아, 애쉬 씨. 부탁할 게 뭔데요?

“에리히 대장간 쪽에 위치한 CCTV 기록을 모두 뒤져봤으면 하는데.”

­ 으음…. 어렵진 않은데 확인해야 할 기간은요?

“언제라고 했지?”

“3주일 전쯤이라고 하더군.”

누구에게 전화하는지 귀를 기울이고 있던 게빌에게 애쉬가 묻자 그가 바로 대답했다.

그것을 들은 애쉬가 기간을 그대로 전달했다.

“대충 3주일 전부터 지금까지. 일정 규모 이상으로 온 녀석들을 전부 확인해줘.”

­ 아, 네. 기간은 하루 정도 걸릴 것 같고, 보수는요?

“1만.”

­ 크레딧이요?

“코너로.”

­ 네? 아니, 너무 짜잖아요!

1만 코너라면 지구의 원화로 약 5만원 정도 되는 돈. 하루를 투자하기엔 너무도 적은 돈이었다.

그에 질색을 하는 빌헬름의 반응에 애쉬가 킥킥 웃으며 정정했다.

“농담이고, 크레딧으로 줄 테니까 추가 작업 좀만 하자.”

­ 아으, 잠이 확 깨네. 뭔데요?

“아까 말한 탐색 범위에 걸리는 놈들 중에 갱단 소속인 녀석들을 모두 찾아봐.”

­ 엑, 그럼 시 정부 데이터베이스도 뒤져봐야 해서 좀 귀찮아지는데. 이만 크레딧 어때요?

“만오천.”

­ 그렇게 하면 제가 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콜. 그럼 내일까지 연락드릴게요.

“오케이. 에리히 영감한테 손 댄 놈들이니까 잘 찾아봐.”

­ 아니 잠깐. 영감님한테요? 그럼 얘기가 달라지는데.

연락을 끊으려던 찰나, 애쉬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에 빌헬름이 놀라 그를 붙잡았다.

빌헬름도 연방에서 손에 꼽는 장인인 에리히 슈만에게 신세를 진 적이 제법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그가 자주 사용하는 외부 신호 수신 장치를 만들 때 조언을 받았거나 했던 일이었다.

사실상 지금의 빌헬름이 거처에서 그런 기계 장치를 만들 수 있도록 가르쳤던 스승.

그런 스승에게 손을 댄 녀석들을 찾는다는데 대가를 전부 받을 받을 수 있겠는가.

­ 그럼 딱 삼천 크레딧만 받을게요. 대신 확실하게 조져주세요.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애쉬가 빌헬름의 말에 대답했다.

그런 것이야 굳이 빌헬름이 부탁을 할 필요도 없었다.

최근에야 71구역 외부로 나갈 일도 많고, 금전적인 여유가 넘쳐흘러서 사무소에 박혀 놀고 있다지만 한창 움직일 때 ‘애쉬 론모어’라는 그의 이름은 일대 갱들의 공포였다.

­ 그럼 맡겨두세요.

“그래.”

애쉬의 대답을 끝으로 빌헬름이 전화를 끊었다.

자신의 지인에게 손을 댄 녀석들을 찾는 일이니 눈에 불을 켜고 작업에 들어가겠지. 어쩌면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빌헬름과 연락이 끊기자 단말을 내려놓은 애쉬는 마침 같은 자리에 있는 게빌을 향해 말했다.

“내일이나 모레쯤 나랑 일이나 하나 하자. 의뢰비는 두둑하게 줄 테니까.”

단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담긴 제안.

이 순간, 정체 모를 갱들의 미래가 결정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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