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187화 (187/230)

〈 187화 〉 11. 죽음과 함께하는 자(5)

* * *

“하, 벌써부터 지루하다니.”

호텔에 들어온 지 불과 몇 시간. 따분한 눈으로 TV를 보던 게빌이 중얼거렸다.

그에 샤워 후 옷을 갈아입은 채 방에서 나오던 애쉬가 대답했다.

“할 거 없으면 룸서비스나 시켜.”

지금 상황에 어디 나가서 식사를 할 수도 없으니까.

어디서 또 그 무식한 총탄인지 포탄인지를 날려올지 모르니 그냥 호텔 룸서비스로 식사를 마치는 게 차라리 낫다는 게 애쉬의 생각이다.

그런 애쉬의 말을 들은 게빌은 앞서 중얼거렸던 것처럼 정말 어지간히도 지루했던 모양인지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옆에 붙어있는 룸서비스 주문용 단말로 향했다.

“그러지.”

그리고 뭔가 조작하던 게빌은 곧 펼쳐진 홀로그램 화면을 쭉 둘러보곤 애쉬에 물었다.

“이봐, 메뉴가 많은데?”

“난 고기로 아무거나.”

“그래? 그럼 우리 의뢰인님은?”

“저는 채식주의라 육류가 없는 걸로 부탁드립니다.”

“삶의 낙을 하나 버리고 사는군.”

다니엘 벡의 대답에 안타깝다는 말투로 얘기한 게빌은 자신의 메뉴까지 정해 주문서에 올려둔 뒤 다시 의뢰인에게 시선을 향해 거기서 뭐하냐는 듯 바라봤다.

그에 다니엘 벡은 갑자기 자신을 향한 시선을 부담스럽게 받으며 물었다.

“…뭔가 있는 건가요?”

“계산은 그쪽이 해야지.”

“아….”

다니엘 벡이 돌아온 게빌의 대답에 그럼 그렇지, 하는 반응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 시간 되지도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이 해결사 둘을 많이 겪은 그는 더 이상 뭐라 할 것도 없이 주문용 단말의 스캐너 위에 손목을 올렸다.

무려 한 기업 연구소의 수석 연구원까지 했던 인재였으니만큼 어차피 말해봐야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신체 내부에 삽입된 신경 인터페이스와 보조 기기를 통해 결제를 마치자 AI의 음성이 음식이 나올 시간을 알렸다.

­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주문하신 음식의 예상 대기 시간은 약 20분입니다.

그것을 들은 게빌이 슥 겉옷을 벗어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20분이라면 남자 한 명 씻고 나오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 이 자투리 시간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샤워라도 미리 하고 오는 게 좋겠지.

“그럼 나도 씻고 올 테니 음식이 빨리 오면 먼저 먹든지 하라고.”

“그러든지.”

기다란 소파.

게빌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그대로 앉은 채 어느새 자신의 구식 단말로 게임을 시작한 애쉬가 그의 말에 시선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게빌이 샤워실에 들어가고 10여 분 뒤.

­ 띵동.

애쉬와 다니엘 벡 둘이 남아있는 거실에 벨소리가 울렸다. 음식이 도착한 것 같았다.

“제가 나가볼….”

“그쪽은 좀 가만히 있어.”

다니엘 벡이 나가보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애쉬는 제발 뭘 하려고 하지 말라는 듯한 말투로 그것을 막았다.

시기상 음식이 조금 빨리 도착했다고 해도 될 타이밍이긴 했지만, 혹시 모를 일.

문 앞에 ‘아메르아’ 쪽에서 보낸 킬러 따위가 대기하고 있으면 어쩔 것인가.

애쉬가 귀찮은 것을 매우 싫어하는 편이긴 해도 소파에서 현관까지 불과 몇 걸음 움직이는 게 귀찮다는 이유로 이만한 의뢰에 실패 기록을 남길 정도로 글러 먹은 인간은 아니었다.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바깥의 기척에 신경을 기울이던 애쉬는 곧 인기척 대신 기계 휠 돌아가는 소리 하나만 들려온다는 것을 알고 문을 열었다.

­ 1309호 고객님께서 주문하신 음식입니다. 따뜻할 때 드시면 더 맛있습니다.

문 앞에는 냉혹한 킬러 대신 전동 휠로 움직이는 서빙용 로봇이 투명한 유리 케이스 안에 음식을 담고 기다리고 있었다.

텅 빈 복도에서는 특별히 인기척이라고 할만한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애쉬는 경계를 풀고 로봇이 담고 온 음식들을 안으로 옮겼다.

“저도 돕겠습니다.”

아무 이상 없다는 것을 알아챈 다니엘 벡이 애쉬와 함께 식사를 안으로 가져오자 때마침 샤워를 마친 게빌이 속옷만 걸친 채 샤워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오, 딱 좋게 왔군.”

“앉지 말고 옷이나 입고 나와. 네 털 숭숭 난 몸을 보면서 밥을 먹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 말 안 해도 입고 오려고 했다고.”

말은 그렇게 했으나 사실 그대로 앉아 식사를 하려던 게빌은 애쉬의 제지에 의해 옷을 입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게빌이 옷을 입고 나오는 사이 애쉬와 다니엘 벡은 음식을 먹기 편하도록 거실의 식탁 위에 늘어놓았다.

“다 입고 나왔으면 빨리 앉아. 식사 시작하게.”

“뭘 굳이 기다리고 그러나, 그냥 먹어도 되는데.”

이거 이렇게 기다려주니 내가 이 자리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군.

게빌이 식탁의 의자를 빼 앉으며 능청을 떤다.

애쉬는 그런 게빌을 향해 코웃음 치며 가장 먼저 식기를 들어 음식을 집어 먹었다. 씻은 뒤 옷을 입고 나올 때까지는 기다려줬으니 최소한의 의리는 지켰다.

게빌이 나름 센스 있게 고른 육고기 구이 요리는 때깔이 괜찮은 게 싸구려 합성육 같아 보이지 않았던 만큼 맛도 나쁘지 않았다.

적당히 흐르는 육즙과 콧속을 가득 채우는 조미료의 향기.

나쁘지 않다고 엄청 뛰어난 맛도 아니긴 했지만 이게 어디인가. 슬럼에서 이렇게 멀쩡한 음식을 내놓는 호텔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게 고기 요리의 맛을 충분히 느끼며 삼키려던 애쉬는 혀끝이 톡 쏘는 감각에 황급히 그것을 뱉었다.

“켁! 망할, 먹지 마!”

­ 쨍그랑!

게빌과 다니엘 벡이 반응하기도 전에 먼저 움직인 애쉬는 그들이 입가로 가져가던 음식을 모조리 쳐냈다.

그들의 손에서 벗어난 식기가 그릇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애쉬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게빌과 다니엘 벡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의 감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혀끝을 쏘는 느낌, 그것은 독에 의한 것이었다.

그게 마비 독인지, 아니면 신경 독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게 몸 안에 제대로 들어가기도 전부터 그 효과가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독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게빌이 애쉬의 행동에서 감을 대충 잡은 듯 그를 바라봤다.

그에 애쉬는 천천히 혀의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독이야. 그것도 꽤나 강한 물건 같은데. 벌써 혀가 얼얼해.”

“…별짓을 다 당하는군. 이봐, 당신도 먹지 마.”

“예, 예.”

게빌의 말에 당황한 얼굴의 다니엘 벡이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샐러드 보울을 내려다봤다. 푸릇푸릇 싱싱해 보이는 샐러드의 위에는 먹음직스런 대체육이 올려져 있다.

이렇게 멀쩡하게 생겼는데 독이 들었다니. 잘못하면 영문도 모르고 이승을 하직할 뻔한 것 아닌가.

평생을 살며 자신이 독살의 위험을 겪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다니엘 벡은 여전히 지금의 상황에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젠 밥도 못 먹겠네.”

그렇게 다니엘 벡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뻔했다는 생각에 빠진 사이 수돗물로 입을 헹군 애쉬가 다시 소파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새벽엔 불침번을 서야 할까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잠자리가 불편해지는 것도 모자라 식사까지 문제였다.

원래는 방에서 최대한 나가지 않고 룸서비스로 식사를 해결하려 했는데, 이렇게 독까지 쓸 줄이야.

앞으로 룸서비스를 시키는 건 지금처럼 누군가의 손을 탈 가능성이 있으니 피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앞으로 식사는 어떻게 하지?”

게빌도 애쉬와 같은 곳까지 생각이 닿은 듯 끼니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했지만 고민한다고 별다른 답이 나오겠는가.

“어떻게 하긴.”

결국 타인의 손을 타서 나오는 음식들은 모두 의심할 수밖에 없으니 앞으로는 식재료를 사다 직접 해 먹는 수밖에.

단순 호위로 알고 시작했는데 저격에 이어 독, 그리고 이젠 가사 일까지 걱정하게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문제인 것은 아직 의뢰를 받은 지 하루가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지간히도 죽이고 싶은 모양이야.’

어중간한 기업들은 슬럼까지 손을 뻗지도 않을뿐더러 뒤세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애쉬 론모어’의 존재를 알면 살살 피해 가는 일도 많았는데 이번만큼은 쉽게 지나가질 않았다.

그만큼이나 자신들의 연구 결과물을 빼돌린 다니엘 벡을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지금 애쉬에게 다행인 점이라면 믿을만한 실력의 게빌이 있다는 점일까.

애쉬 혼자였다면 의뢰인, 다니엘 벡을 아기 돌보는 베이비시터처럼 챙기고 다녀야 했을지도 모른다.

평소엔 게빌을 놀려먹기 바쁜 애쉬였지만, 이럴 때만큼은 그를 받아들인 게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오늘 식사는 여기 있는 걸로 대충 때우고 오전에 식재료를 사오든 말든 하자고.”

“아, 젠장. 무슨 싸구려 레토르트 식품밖에 없던 것 같은데.”

애쉬의 말에 게빌이 불평을 내뱉었다.

호텔 룸에도 기본적으로 간단한 먹을 거리는 있었는데, 그것들은 체크아웃할 때 결제해야 하는 금액에 비해 지나치게 질이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공짜로 줘도 잘 안 먹는 수준의 인간 사료 같은 것들.

가격이야 어차피 다니엘 벡이 결제하는 것이었기에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맛은 식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였다.

“불평하지 마, 나도 짜증나니까.”

게빌의 말에 애쉬도 짜증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첫날부터 이런 꼴이면 앞으로 남은 9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그, 그럼 제가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다니엘 벡은 분명 그가 물주이고 의뢰인인데도 기분이 영 좋지 않아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는 애쉬와 게빌 사이에서 눈치를 보다 슬쩍 일어났다.

지금보다 더 경력이 적고 어릴 적 상사의 눈치를 보던 실력을 지금 다시 발휘한 것이다.

그렇게 일행은 첫날 저녁 식사로 음식 같지도 않은 것들을 섭취한 뒤 잠자리에 들게 됐다.

*

­ 띵, 띠링, 띵.

적막한 새벽.

다른 일행이 모두 잠든 호텔 1309호의 거실에는 애쉬의 구식 단말에서 나오는 작은 게임 소리만이 울렸다.

취침 시간의 불침번은 애쉬와 게빌이 한 번씩 돌아가며 서기로 했고, 다니엘 벡은 짐덩이나 되지 말라고 그냥 재웠다.

이렇게 되면 애쉬와 게빌 둘이서 하루 4시간씩 불침번을 서는 셈인데, 일반인이라면 모르겠으나 그 둘은 열흘 동안 잠을 아주 안 자는 것도 아니고 반씩 자고 깨는 정도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 띠리리리링.

한창 게임을 이어가던 애쉬의 구식 단말에서 힘없이 축 처지는 배경음이 울린다.

“…흐으음.”

애쉬는 자신의 함정에 빠져 사망한 자신의 캐릭터를 바라보다 잠시 자신의 개인 단말을 내려두고 시간을 봤다.

[AM 03 : 31]

현재 시각은 오전 3시 31분. 게빌과 불침번 교대하기까지 약 30분 정도가 남았다.

딱 이 타이밍이 불침번을 서며 가장 시간이 안 갈 타이밍이었는데, 애쉬는 잠시 과거 군 복무 시절을 떠올렸다.

국가의 부름으로 군대에 가서 보냈던 1년 9개월간의 짧지만 긴 시간.

그때도 가끔 이렇게 새벽에 근무를 서곤 했다. 물론 이렇게 편한 자세도, 복장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지금이야 따분함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때는 추위, 그리고 더위와의 싸움이었다.

총기를 거치하라고 창문을 뻥 뚫어둔 탄약고 초소가 겨울에 얼마나 추웠고, 또 여름에는 얼마나 더웠는지.

그래도 그때는 사수나 부사수가 있어서 그렇게 지루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쪽은 잘 있을지 모르겠네.’

잠시 지구에 있을 적 군대 생활을 떠올리던 애쉬가 그 주변까지 사고를 넓혔다.

‘애쉬 론모어’가 아닌, ‘이진현’의 친구와 가족들.

시간이 흐르며 살짝 흐릿해지긴 했어도 지구에서의 추억은 아직까지 그의 안에 뚜렷이 남아있었다.

흔해 빠진 소설의 등장인물처럼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 다른 세계에 떨어진 지도 벌써 수년이 지났고, 또 앞으로 원래 세계에 돌아갈 수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은 가끔 이렇게 떠올라 그의 기분을 가라앉히곤 했다.

“…뭐, 언젠가는 답이 나오겠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든 없든 간에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이었다.

애쉬는 그렇게 ‘이진현’의 추억의 회상을 마치며 기지개를 쭈욱 켰다.

[AM 03 : 47]

그리고 다시 시계를 보니 슬슬 게빌과 교대 준비를 해야 할 시간.

자리에서 일어난 애쉬가 게빌의 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 투둑, 툭.

추억 회상에 정신을 빼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가 인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현관 쪽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것 같은 미세한 소음이 울렸다.

그것을 들은 애쉬는 순간 직감했다.

‘적.’

이 야밤에 찾아올 불청객이라면 의뢰인을 노리는 적밖에 없다.

현재 그의 위치와 문까지의 거리는 약 8 미터.

‘들어오는 순간 단숨에 목을 친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면 지나칠 수 있는 짧은 거리였기에 애쉬는 소파에 기대어 세워뒀던 검으로 손을 가져갔고, 몸을 낮추며 발끝부터 다리 전체로 이어지는 근육을 폭발하기 직전의 스프링처럼 잔뜩 수축시켰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달리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 팅. 취이이이익!

슬쩍 열린 문틈을 통해 안쪽으로 던져지는 주먹만 한 물체.

애쉬의 초인적인 동체 시력은 빠르게 던져진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캐치 해냈다.

‘최루탄? 아니면 치사성 가스인가?’

안전핀이 픽 뽑히며 허공을 부유하듯 날아오는 그것에서는 뿌연 연기가 마구 뿜어졌다.

애쉬는 그것을 보며 난감함을 느꼈다. 물리적 형태가 있는 공격이라면 차라리 낫겠지만 저런 방식의 병기는 검으로 상대할 방법이 없다.

애쉬는 호흡기를 틀어막는 동시에 1309호 전체가 울릴 정도의 목소리로 외쳤다.

“게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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