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193화 (193/230)

〈 193화 〉 11. 죽음과 함께하는 자(11)

* * *

­ ……는 어때.

“지금 막 위급한…….”

몽롱한 정신에 들려오는 대화.

애쉬는 약 기운에 취한 상태로 눈을 떴다.

‘어지러워.’

가만히 누워있는데도 세상이 도는 것 같은 느낌. 당장 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애쉬는 토악질을 하기보다 먼저 상황을 살폈다.

­ 삐이. 삐이.

­ 수고했어. 그럼 계속해서 지켜보고, 주기적으로 상태 보고해.

“예, 알겠습니다.”

몸이 연결된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으로 신호음이 들려오고, 지금 그가 누워있는 침상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는 여전히 두 목소리의 대화가 이어지다 뚝, 끊긴다.

아무래도 연락을 끝낸 모양.

이런 주변 상황으로 보아 다행히 그는 안전한 곳까지 옮겨진 상태인 것 같았다.

“윽.”

누워있던 침상에서 상체를 일으키려던 애쉬는 팔로 몸을 지탱하자마자 어깨 쪽에서 몰려오는 통증에 작게 신음했다.

정신을 잃기 전에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상처가 깊었던지 통증이 상당하다.

그렇게 애쉬가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키고 있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연락하던 발걸음 소리가 급히 다가오더니 그에게 말을 건넸다.

“일어나지 말고 좀 더 누워 계십시오. 아직 수술이 끝난 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여긴 어디고 넌 누구야.”

“지금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여긴 올란스 병원이고 저는 선생님의 수술을 진행한 의삽니다.”

“올란스 병원…?”

“예. 그러니 안심하고 몸을….”

의사는 애쉬의 상태를 걱정하며 몸을 바로 눕힐 것을 권했지만, 아무리 의사라도 타인의 간섭에 따를 애쉬가 아니었다.

억지로 상체를 일으킨 애쉬는 흰 가운을 입고 있는 의사를 보다가, 현재 자신이 위치한 올란스 병원이 어디에 있던 것인가를 떠올렸다.

‘71구역에 있는 유일하게 멀쩡한 병원이었나.’

온갖 돌팔이들이 난립한 71구역 슬럼. 그중에서도 올란스 병원은 애쉬도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웨인 시에서 설립한 제대로 된 병원이었다.

정신을 잃기 전 레이라에게 연락한 결과 애쉬를 찾아낸 그녀의 부하들이 이곳까지 옮겨온 것 같았다.

아마 의사가 방금 전까지 연락하고 있던 대상도 레이라였겠지.

그렇게 생각을 마친 애쉬는 곧장 의사에게 물었다.

“내가 정신을 잃은 지 얼마나 됐지?”

“…병원에 오기 전은 모르겠지만, 병원에 와서는 수술 3시간 이후 2시간 동안 더 정신을 잃고 계셨습니다.”

“총 다섯 시간?”

“예. 적어도 병원에 들어온 이후로 다섯 시간 동안은 깨어나지 못하셨습니다.”

그럼 레이라의 부하들이 그를 찾고 이곳까지 옮기는 시간을 생각하면 길게 잡아도 여섯 시간 정도에 불과할 터.

어쩐지.

어지간한 독은 제대로 먹지도 않고, 부상을 입어도 재생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회복이 빠른 몸이었는데, 아직도 몸이 멀쩡하지 않더라니, 그냥 시간 자체가 얼마 흐르지 않은 것이었다.

애쉬가 아직 독과 마취약의 기운에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있자, 의사는 때마침 일어났으니 설명해야겠다는 듯 그에게 말했다.

“일단 저희가 진행한 수술은 어깨 쪽의 봉합과 혈관을 타고 흐르던 독을 해독, 혹은 뽑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어깨 쪽의 봉합은 쉽다면 쉬운 수술이었지만, 독 쪽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의사는 애쉬의 몸에 투입된 독에 대해 얘기했는데, 그것은 의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종류의 독이었으며, 급히 채취해 살펴본 결과 혈관을 타고 흐르며 신체 내부의 모든 세포를 파괴하는 극독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애쉬 님의 몸은 말도 안 될 정도의 저항력을 갖고 있더군요. 실시간으로 몸 내부의 방어 체계가 독을 잡아가는 게 보였고, 저희가 취할 수 있던 조치는 그런 신체 작용을 조금 더 도와주는 일 뿐이었습니다. 혹시 최근에 비슷한 종류의 독에서 회복된 적이 있으신가요?”

“…최근에 고생을 조금 하긴 했지.”

독이라고 하니 ‘유성 그룹’ 사건 때 그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갔던 그 곤충형 드론들이 떠올랐지만, 그것을 굳이 의사에게 말할 필요까진 없어 보인다.

그때 의사들도 반쯤 포기하고 있던 것을 어떻게든 살려낸 게 바로 그의 면역 체계와 회복 능력이었다.

한 번 온갖 극독을 겪으며 더 발달한 면역 체계의 힘이 지금 제대로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차도가 괜찮은 상황이나 아직은 함부로 움직이시면 좋을 게 없습니다. 일단은 편히 쉬시는 게….”

“쉬기는 무슨.”

애쉬가 의사의 권유에 손을 내저었다.

수술이 막 끝나 회복 중이고 뭐고, 적이 그의 사정을 봐줄 리가 없지 않은가.

중독도 시켰겠다, 일단은 치안 유지국을 피해 물러난 놈들이었지만, 애쉬 자신이 그 극독을 버티고 살아있다는 걸 안 순간 다시 덮쳐들 것이었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겠어.’

그가 박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괜히 슬럼에 유일하게 멀쩡한 병원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당장 치안 유지국 근처에 있는 호텔에서도 그 일을 벌였던 암살자니만큼 병원도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다.

더 쉴 것도 없이 이동하기로 마음먹은 애쉬는 바로 몸을 일으켰고, 의사는 그런 그를 보며 기함했다.

“무슨 짓입니까! 지금 일어나시면 몸이…!”

“됐고, 내 단말기나 가져오, 우욱!”

일어선 애쉬가 올라오는 토악질을 참지 못하고 속을 게워냈다.

유성 그룹 사건 때 그만큼이나 독에 시달리며 적응했을 터, 하지만 이번 건 투입량이 그때의 수십, 수백 분의 일에 불과한데도 그때보다 한층 더 위험한 물건이었는지 몇 시간 정도로는 괜찮아질 생각을 않았다.

“역시 안 되겠습니다. 당장 침상으로 돌아가 누우세요!”

의사는 애쉬의 그런 모습을 보며 억지로 그를 눕히려 했지만, 애쉬는 입안에 느껴지는 위액의 신맛을 뱉어내며 자신의 팔을 잡는 의사의 손길을 떨쳐냈다.

“퉤! 됐다니까. 내 단말기나 가져와.”

지금 당장 암살자가 그를 노릴 가능성도 가능성이었지만, 게빌과 의뢰인 측에도 연락을 해봐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바로 도우러 가겠다고 했는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이쪽이 도움을 받아선 안 되지 않겠는가.

“정말 제 목숨이 위험해서 그럽니다. 선생님을 이대로 보내면 저는….”

“레이라한테는 내가 멋대로 빠져나갔다고 해.”

어차피 그녀도 애쉬 자신이 마음먹고 움직이고자 한다면 일개 의사 따위가 막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나중에 애쉬 자신이 직접 연락이라도 한번 하면 되고.

레이라로부터 있을 보복을 걱정하는 의사에게 그렇게 말한 애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단말기를 건네는 의사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여기 있는 게 그쪽한테 더 위험할걸.”

“그게 무슨….”

“내가 그 구하기 힘든 극독을 어디서 맞고 왔을 것 같아?”

민간에서는 제조하는 것도, 어딘가에서 구하기도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그런 독극물이었다.

그런 것에 당해서 왔다면 분명 뭔가가 있지 않겠는가.

의사 앞에서 스스럼없이 병원복을 원래 입고 있던 옷으로 갈아입은 애쉬는 곧 병실을 떠났고, 의사는 그런 그의 뒤로 소리쳤다.

“제가 ‘뱀파이어’ 측에서 얘기를 들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의사로서 드리는 말씀인데, 최대한 격한 운동을 피하십시오! 아직 몸에 독 기운이 남아 있어서 심장의 혈류가 가속되면 그게 온몸에 퍼져 더 오랫동안 고생한 뒤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가능하면!”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의사의 조언에 대답한 애쉬는 피딱지가 굳은 상의를 보며 일단 옷부터 갈아야 할 것을 느꼈다.

아직 이른 아침이지만 연 곳은 어디든 분명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단말의 전원을 켜 화면을 확인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게빌로부터 연락이 몇 통 와 있었다.

*

­ 3시간 21분 전

방금 습격을 받았는데, 일단은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어서 처리했어.

이번엔 확실히 ‘아메르아’ 쪽이야. 당장은 도움이 필요할 것 같지 않아.

나중에 필요하면 다시 연락하지.

그쪽도 멀쩡하면 답장 하나 달라고.

*

2시간 전

이봐, 답장이 없는 걸 보면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살아 있어?

아니면 일이 터진 와중에 단말기를 부숴 먹었나?

확인하면 바로 연락해.

*

1시간 전

젠장, 무슨 일이 생기긴 한 모양인데. 이쪽에도 한번 습격자들을 처리하고 여유는 있으니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

게빌로부터 수신 받은 메시지.

대충 한 시간 간격으로 보내진 메시지들의 사이에는 부재중 연락도 대여섯 통 정도 와있었다.

“많이도 보내놨네.”

아닌 척 하면서도 이쪽에 제법 신경을 써주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을 모두 확인한 애쉬가 게빌에게 연락했다. 그러자 연락을 받는 상대방, 게빌은 그 신호음이 한번 전부 이어지기도 전에 연락을 받았다.

­ 뚜르르… 뚝.

­ 이봐, 애쉬. 괜찮아? 듣자 하니 번화가 외곽에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전화를 받자마자 급히 물어오는 게빌의 목소리. 평소에는 상상도 못한, 걱정이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에 애쉬가 멀쩡하지 않은 몸 상태에도 픽 웃으며 대답했다.

“일이 좀 있긴 했는데, 괜찮아. 그쪽은?”

­ 메시지로 봤겠지만, 이쪽은 한번 습격을 받은 뒤야. 네가 상대했던 그 사이보그처럼 살벌한 놈들은 아니었지만 나름 준비는 한 것 같더군. ‘아메르아’ 측에서도 꽤나 열이 오른 모양이야.

“의뢰인은 멀쩡하고?”

­ 당연하지. 이 ‘골든 캐니언’의 호위 대상을 어떻게 하려면 너 같은 괴물 정도나 돼야 한다고. 그나저나 네 쪽은 무슨 일이야? 몇 시간 동안 연락도 안 되던데.

“꽤나 성가신 놈들을 만나서.”

게빌의 물음에 애쉬가 자신을 습격했던 휴머노이드들, 그리고 한 암살자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휴머노이드들의 전투 프로그램 수준도 굉장히 높았지만, 마지막에 그의 허를 찌른 그 여자.

그 여자의 움직임은 광학미채를 탐지하기 위해 곤두세운 그의 감각으로도 감지할 수가 없었다.

시야는 물론이고, 소리, 발걸음의 흔적, 공기의 흐름까지 완벽하게 제어하던 것을 보면 최소한 2등급에 달하는 광학미채 기술을 적용했을 것이며, 그것을 사용하는 사용자의 은밀성 또한 여태껏 봤던 모든 이들 중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아무리 전투 중에 신경이 분산된 감이 없잖아 있었다고 해도, 지근거리까지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 못한 건 애쉬 자신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어쩌면 1등급의 광학미채일지도.’

원작 게임 속에서도 1등급의 광학미채 기술은 등장한 적이 없었지만, 현존하는 그 어떤 탐지 기기로도 찾아낼 수 없는 물건이라는 묘사가 있었다.

그야말로 현대 군사 기술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물건인 것이다.

…그래. 일단 이쪽은 습격자가 지금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그쪽의 도움은 필요 없을 것 같아.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다시 연락하지.

“어. ‘론모어 해결사 사무소’에 첫 의뢰 실패를 만들지는 말자고.”

게빌의 말에 대답한 애쉬는 그 뒤로도 짧은 대화를 나누다 연락을 끊었고, 옷 가게로 향했다.

이용 감사합니다, 고객님.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옷을 고른 뒤 결제를 마치자 AI가 인사한다.

옷 가게에서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온 애쉬는 기존에 입고 있던 옷을 지저분한 길거리에 대충 버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준비를 좀 해야겠어.’

상대방이 입고 있던 슈트가 진짜 1등급의 광학미채 기술이 적용된 물건이라면 애쉬 자신의 감각으로도 제대로 탐지할 수 없었던 게 어느 정도 이해됐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그것의 접근을 알아챌 방법을 구하는 수밖에.

1등급의 광학미채는 분명 어떤 탐지 기기로도 찾아낼 수 없는 진짜배기 투명인간이라고 해도 좋을 물건이었지만, 물리적 한계는 분명 존재했다.

때로는 첨단 과학 기술보다 아날로그적인 방식이 나을 때도 있는 법.

애쉬는 이곳저곳에 들르며 각종 물건을 챙겼고, 곧 어딘가로 향해 준비를 마친 뒤 자신을 쫓고 있을 암살자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번에는 안 놓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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