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 11. 죽음과 함께하는 자(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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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정화시설이 돌아가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 도심과 달리, 길거리에 온갖 쓰레기와 오물이 뒹굴고 불법 폐기물 따위를 버리곤 하는 이곳 슬럼의 공기는 언제 맡아도 매캐하고 불쾌한 느낌이 가득하다.
타아앙!
“또 소란이군.”
공사가 중지된 지 오래된 고층 폐건물의 옥상, 그 난간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바깥을 내려다보던 애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총성을 듣고 중얼거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사건 사고가 터지는 곳이 바로 이곳 슬럼이다.
애쉬가 총성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몇몇 갱으로 보이는 이들이 거리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멀리서 불이 꺼진 네온사인이 총탄에 맞아 불똥이 튀는 것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다.
물론 이렇게 일이 대놓고 터지는 만큼 ‘론모어 해결사 사무소’에도 의뢰서가 많이 들어오는 것이겠지만, 역시 사람이 살기에는 그렇게 좋은 곳이 되지 못했다.
‘진짜 옮겨야 하나.’
신분이 곧 나올 것 같으니 저 도시 안쪽으로 오라던 서령의 말을 떠올린 애쉬가 사무소의 이전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샤인도 조금 걱정됐고, 또 이제는 신분이 생기는 만큼 이곳에 붙어있을 이유도 없다.
결국 인간이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다는 말이 있었지만, 만약 그가 지금 도시 중심에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암살 시도를 받았을까?
‘당연히 암살 시도 자체는 있었겠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대놓고 일을 벌이진 못했겠지.
그 여자 암살자가 그만한 숫자의 휴머노이드들을 끌고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이곳이 공권력의 힘이 미약한 슬럼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곳이 도심이었다면 꿈도 못 꿀 일.
슬슬 꼬맹이 샤인도 걱정이 됐고, 굳이 냄새나고 위험한 슬럼에서 살 필요도 없었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신분이 나오는 대로 사무소를 옮겨도 좋을 것 같다.
‘그 녀석도 분명 반기겠지.’
게빌, 그가 박살 난 자신의 애마 얘기를 하며 이를 갈던 모습을 떠올린 애쉬가 픽 웃었다.
이제는 지난 몇 년 동안 고운 정 미운 정 다 든 슬럼과 작별을 할 때가 된 것이다.
애쉬가 때아닌 추억에 젖어 내려다보이는 슬럼을 쭈욱 돌아보고 있을 때였다.
휘이잉, 하고 바람이 부는 옥상에 애쉬 자신의 것 외에도 다른 기척들이 하나둘씩 잡히기 시작했다.
“왔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보이는 것은 뿌연 하늘뿐이다.
이번에도 광학미채를 이용해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한 휴머노이드들의 기척에 애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들을 반겼다.
“마침 잘 왔네. 모습이나 한번 보이지 그래, 하고 싶은 얘기도 있는데.”
‘회사’에서 이 정도 숫자의 휴머노이드들을 지원받았으니만큼 상대방과 직접 얘기해본다면 그의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니라 이번에는 확실히 마무리 짓겠다는 듯 빈틈없이 그를 둘러싸는 기척들이었다.
저 사이 어딘가에 그 여자도 숨어 자신을 노리고 있겠지.
애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경을 곤두세운 채 검을 뽑아들었다.
이리저리 갈려 나가 슬슬 교체해줘야 할 때가 된 새까만 칼날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게 신호라도 된 듯 먼지 가득한 폐건물 옥상 바닥에 발자국이 찍힌다.
쿠웅!
향하는 방향은 당연히 난간 근처에 서 있는 애쉬 쪽.
이미 위치를 숨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 묵직한 발소리를 하나도 숨기지 않고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런 휴머노이드들의 반응에 애쉬는 품속에 손을 넣어 미리 준비해뒀던 격발기를 눌렀다.
콰아앙!!
퍼엉!
이 오래된 폐건물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건물 전체가 뒤흔들린다.
애쉬는 그 흔들림에 조금 괜찮아졌던 속이 다시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가 미리 준비해뒀던 것들을 사용해 상대방을 제대로 서치하고 잡아야 한다.
‘슬슬 때가 됐는데.’
뒤흔들리는 폐건물의 난간에서 근처에서 균형을 잡고 있던 애쉬는 레이라의 부하의 도움을 받아 설계한 지금 이 상황에서 타이밍을 재고 있었고, 곧 그가 노리던 타이밍이 왔다.
콰앙! 쿠르릉!
연이은 폭발에 의해 옥상 전체가 아래로 무너져내린 것이다.
애쉬는 옥상에 있던 모든 것이 서너 층 아래로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 쏟아지는 콘크리트 덩어리와 먼지들 속에서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떨어지며 허리춤에 권총을 들어 미리 준비해뒀던 포대들을 맞춰 터뜨렸다.
타앙! 탕! 타아앙!!
떨어지는 위치를 계산해 적당한 위치에 매달아뒀던 포대들이 터져나가며 페인트와 희뿌연 가루를 쏟아낸다.
가루의 정체는 독이나 연막 같은 건 아니었고, 그냥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사용하는 밀가루였다.
최첨단 탐지 기기로도 찾아낼 방법이 없다는 1등급 광학미채를 잡기 위해 준비한 것이 아무런 과학 기술도 적용되지 않은 식료품과 페인트인 것이다.
쿠우웅!
콘크리트 덩어리들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애쉬가 균형을 잡으며 착지했다. 별다른 피해 없이 착지한 것은 휴머노이드들 또한 마찬가지.
애초에 애쉬에게는 이것으로 적에게 피해를 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에 쏟아진 밀가루들, 그리고 페인트를 이용해 그 여자 암살자를 잡아내는 것이 목표였으니.
원하는대로 모든 상황이 만들어졌다.
애쉬는 이곳에 떨어지자자마자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휴머노이드들의 기척에 대비하며 눈에 온 신경을 돌려 주변을 스캔하듯 훑었다.
씨이잉!
공기를 울리는 특유의 소리와 함께 가동하는 초진동 블레이드가 그가 서있던 곳을 지나간다.
상체를 뒤로 빼 블레이드의 날을 피한 애쉬는 바로 검을 상대방에게 찔러넣으며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콰직!
상대방이 몸을 다시 숨길 방법을 찾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상대방을 찾아야 한다.
그가 준비한 것은 여기까지가 끝. 그 뒤로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애쉬의 눈이 페인트와 밀가루, 먼지를 뒤집어쓰며 어색하게 드러난 광학미채 기술의 휴머노이드들을 살폈지만….
‘…없어?’
없다.
어디에도 먼지와 밀가루를 뒤집어쓴 그 여자의 실루엣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 자리에 오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 휴머노이드들은 왜 보낸 거지?
아무리 주변을 뒤져도 보이지 않는 그 여자 암살자의 모습에 애쉬는 당황을 숨긴 채 몸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아니, 여기 없을 리가 없어.’
이 휴머노이드들만 보내선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상대방이었다. 그런데도 이곳에 함께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무리 ‘회사’라도 이 정도 기술력으로 개발된 휴머노이드들을 수십씩이나 내다 버리는 것은 약간이라도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 암살자는 이 자리에 있을 터.
그런데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를 뜻했다.
‘그래도 최고 등급의 광학미채다 이거지.’
소리, 적외선, 온갖 스캐너를 비롯한 최첨단 탐지 기기로도 찾을 수 없다는 최고 등급의 광학미채답게 표면에 이물질이 묻는 것 따위로는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찾아야 할까.
다시 한번 그 독니에 찔려 아픈 꼴을 겪고 싶지는 않은 애쉬였기에 더욱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계속되는 휴머노이드들의 공격을 받아냈다.
2등급 폭발물 투척.
그의 정면에서 초진동 블레이드를 휘두르던 휴머노이드 하나가 물러나자 각종 폭발물들이 허공을 날아온다.
그에 애쉬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으로 뛰어들며 검을 휘둘렀다.
“그딴 장난감에 또 당할 것 같아!”
느려진 시간 속에서 찰나의 순간 수십 번의 검격이 그를 향하던 폭발물들을 가른다.
그중에는 대인용으로 사용되는 세열 수류탄이나 일전에 한 번 그를 놀라게 했던 섬광탄 같은 것도 있었지만, 과감한 그의 움직임에 제대로 폭발하지도 못하고 조각난 채 흩뿌려졌다.
그렇게 애쉬가 폭발물들을 모두 베어 떨구자 이제 광학미채는 포기했는지 모습을 드러낸 휴머노이드들이 기관총을 드르륵 긁었다.
터더더더덩!!
굵직한 탄환들이 비 오듯 쏟아지자 애쉬는 몸을 튕겨 옆에 있던 기둥을 발판삼아 뛰어오른 뒤 벽을 밟고 달렸다.
그를 따라 움직이는 기관총의 총구들이 불을 뿜음에 따라 벽에도 탄흔이 마구잡이로 새겨졌고, 그중에는 애쉬 자신을 향하는 탄환도 제법 숫자가 있었으나 그것들은 모조리 쳐내는 것으로 빠져나간다.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움직임으로 벽을 타고 달려 한 휴머노이드에게 접근한 애쉬는 한 차례 벽을 박차고 빛살같이 칼날을 움직여 놈의 몸통을 대각선으로 베어버렸다.
휴머노이드와 함께 넓은 범위를 갈라버리는 새까만 선과 진청색의 안광.
지지직, 퍼엉!
그 휴머노이드가 전기불을 튀기며 폭발하는 것과 동시에 몸을 띄운 애쉬는 곧장 다음 타깃을 향하려 했지만,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저건….’
슬슬 콘크리트 먼지와 밀가루가 섞인 분진이 가라앉고 있는 상황에 유난히 그 분진의 밀도가 적은 공간.
그냥 지나칠 뻔했지만, 미묘한 그 느낌에 시선을 빼앗긴 애쉬는 이어서 그 공간이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고 등급의 광학미채.
그것은 몸에 묻어나는 분진이나 페인트 따위로 인해 모습이 드러날 정도로 허술한 물건은 아니었으나, 물리적으로 착용자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기다!’
일순간 분진의 일부가 사라졌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자 애쉬는 그곳에 자신의 어깨에 단검을 박아넣었던 암살자가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광학미채 슈트의 코팅으로 인해 몸에 붙는 순간 함께 투명해졌던 이물질은 움직일 때마다 떨어져 나타나며 제법 자연스럽게 보이고 있었지만, 한순간 의심을 갖게 된 애쉬의 눈썰미는 피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우연히 발견된 상황.
아무리 애쉬라도 전투에 신경이 분산된 채 주변을 완벽히 살필 수는 없었지만, 운 좋게도, 상대방에게는 운 나쁘게도 그의 시선이 공간을 훑으며 발견할 수 있었다.
“찾았다…!”
그것을 발견한 애쉬는 상대방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로 몸을 움직였고, 그에 놀라기라도 한 것인지 상대방도 빠르게 애쉬를 피해 움직였다.
‘지금 안 잡으면 못 잡는다!’
당장 눈앞에 분진이 사라졌다 흩어지며 나타나는 모습이 아니었다면 그 암살자가 자신의 주변에 존재한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정도로 완벽한 은신이다.
지금 이 상태에서 분진만 사라져도 상대를 잡아낼 방법이 없을 것임을 직감한 애쉬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고 전력을 다해 달렸고, 그런 그를 피하는 상대방과의 추격전이 시작됐다.
이동 제한.
“비켜!!”
제 주인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앞을 가로막는 휴머노이드.
애쉬는 놈의 금속질 머리통을 이가 나간 검으로 갈라버리며 옆으로 밀어 찼고, 아직 완전히 현장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암살자의 위치를 감 잡아 몸을 날렸다.
퍼어억!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허공을 검의 옆면으로 후려치자 손끝에 와닿는 둔탁한 감각.
자신이 제대로 목표물을 가격했음을 느낀 애쉬는 상대방이 날아갔을 곳으로 향했고, 거기서 다시 한번 몸을 던져 허공을 끌어 안았다.
그런 그의 품 안에 잠시 봤던 그 가녀린 체구가 들어오자 곧장 그 몸의 형태를 느낀 애쉬는 상대방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벗어나기 위해 발악하는 전신을 단번에 제압하며 웃었다.
“하, 잡았다.”
이차전 상황 종료. 이제는 사로잡은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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