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195화 (195/230)

〈 195화 〉 11. 죽음과 함께하는 자(13)

* * *

“어디 얼굴 좀 제대로 볼…!”

­ 촤악!

말을 잇던 애쉬가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피하자 방금 전까지 그의 머리가 있던 곳을 예리한 무언가가 관통했다.

뺨 근처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

아직 광학미채로 가려진 상태라 보이지는 않지만, 그의 밑에 깔려 있는 상대방이 날카로운 무기를 찔러왔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당장 그와 닿아 있었기에 근육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그대로 맞았을지도 모르는 공격.

애쉬는 절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일단 이 광학미채부터 어떻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휴머노이드들은 자신들을 통제하는 이 여자에게 피해를 줄 수 없도록 프로그램된 모양인지 사격도 멈춘 채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는 상황.

이 망할 광학미채만 어떻게 하면 더 이상 상대를 놓칠 이유도 없었기에 애쉬는 자신의 밑에서 몸부림치는 상대방을 느끼며 검을 들어 휘둘렀다.

­ 채앵!

애쉬가 들고 있는 검과 보이지 않는 날붙이가 부딪히며 불똥을 튀긴다.

용케도 애쉬의 검을 받아낸 상대방이었으나, 근력의 차이는 명확했다.

상대방의 날붙이는 그의 검과 맞부딪힌 순간 바깥으로 튕겨 나갔지만, 애쉬의 그것은 굳건히 자리한 채 이어서 뜻대로 움직였으니.

“민첩성 특화 쪽의 강화인간인가 본…데!”

­ 채앵!

말하던 애쉬가 다시 한번 자신에게 향하는 날붙이를 쳐냈다. 이번에 상대방의 보이지 않는 칼날이 노리는 곳은 그의 심장이 있는 가슴이었다.

역시나 보이는 것도 없고, 느껴지는 거라곤 자신과 닿아 있는 근육의 움직임밖에 없다 보니 한 박자 늦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애쉬가 황급히 그것을 막아냈다.

광학미채라는 게 이렇게나 거슬리고 위험한 물건일 줄은 몰랐던 애쉬가 상대의 무기를 튕겨낸 즉시 검을 휘둘렀고, 그의 칼날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쭈욱 길게 베어냈다.

그러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 있던 허공에서 노이즈 같은 것이 생겨나며 곧 일전에도 한번 봤던 순백색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애쉬가 칼끝에 무언가 닿는 순간 최대한 그 외피만 베어낼 수 있도록 조절한 만큼 상대방에게 큰 부상은 없었지만, 조금 곤란한 것이 있긴 했다.

“오, 절경이네.”

그녀의 몸을 탱탱하게 감싸고 있던 슈트.

그것만 완벽히 베어내는 신기를 보인 애쉬였지만, 슈트를 입고 있던 여성이 그 밑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검에 상체 부분이 몇 조각이 나자 몸에 딱 달라붙던 슈트가 탄력에 따라 줄어들었고, 그에 따라 슈트가 감추고 있던 하얀 속살이 모조리 드러났다.

“흐읍!”

애쉬가 광학미채 슈트 아래에 숨겨져 있던 그 모습에 감탄했지만, 상대방은 자신의 뽀얀 젖무덤이 드러난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쉬며 오른팔을 움직였다.

­ 쇄애액!

대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

애쉬가 고개를 뒤로 빼자 그 눈앞을 세 줄기 칼날이 훑고 지나간다.

직전까지 광학미채를 통해 모습을 감추고 있던 날붙이의 정체, 그것은 바로 손목에 고정해 사용하는 짐승의 발톱을 형상화한 무기, 클로였다.

“그만 포기하지 그래.”

애쉬가 그 덧없는 발악을 보며 권유했다.

광학미채가 적용되고 있을 때나 근육의 움직임을 읽느라 한 박자 늦게 피했지, 이렇게 모습이 전부 드러난 상태에서는 도무지 맞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권유에도 상대방은 다시 한번 오른손의 클로를 휘두르려 했고, 애쉬는 그 손목을 콱 잡아 그것을 봉쇄했다.

“아니, 그러고 보니 이쪽 손목은 완전히 박살 내놨을 텐데.”

손목을 콱 잡아 막은 순간 불과 몇 시간 전 자신이 박살 내놓은 손목이 바로 클로를 끼고 있는 오른 손목이라는 것을 깨달은 애쉬가 자신에게 붙잡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그곳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음….”

상대방은 완전히 박살 나 움직이지 못하는 게 당연할 손목을 회복한 게 아니었다. 클로를 고정하는 장치로 억지로 붙잡아 뒀을 뿐.

어쩐지 한 손에만 클로를 끼고 있다 했는데, 사용하지 못하는 손목을 어떻게든 더 활용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손목의 뼈가 완전히 바스라져서 근육과 신경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을 그 부상에서 느껴질 고통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애쉬 자신이라도 무시할 수 없었을 통증일 텐데도 저런 손목으로 자신의 검을 몇 번 씩이나 받아냈다는 것이 독하다는 생각을 조금 질릴 정도였다.

다시 자신에게 붙잡힌 손목의 고통에 찡그린 표정을 본 애쉬가 왠지 모를 죄책감에 손목을 잡고 있는 힘을 살짝 풀자, 상대방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반응했다.

상체를 살짝 들어 올리며 고개를 홱 돌린다. 그에 따라 그녀의 새하얀 머리칼이 융단처럼 펼쳐지며 애쉬의 시야를 가득 채웠고, 동시에 머리칼 사이에 숨겨져 있던 은빛 바늘들이 쏟아졌다.

예리한 첨단과 거기에 묻어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

독이 분명할 그것을 본 애쉬는 제자리에서 상체만 트는 것으로 피할 수 없다는 판단에 곧장 몸을 일으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 틱, 티디딕.

그것을 쏘아내는 동력이 겨우 고개를 트는 목의 힘이 전부라 멀리까지 날려 보낼 수는 없었던 바늘들이 물러난 애쉬에게까지는 닿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목적은 완수된 것이었다.

애초에 그것이 상대방에게까지 닿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그저 그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으니까.

“하, 끝까지.”

애쉬가 몸을 빼는 그녀의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으로선 몸을 빼는 게 최선.

그녀는 열 체 정도 남은 휴머노이드들에게 목표물을 막으라 명령했고, 곧장 뻥 뚫린 창문 쪽을 향해 뛰었다.

‘시뮬레이션 오류. 새로운 플랜으로 재시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몇 개씩이나 겹쳐 역으로 몰리고 말았지만, 다음에는 이번처럼 쉽게 꼬리를 잡히지 않을 것이다.

­ 휘이잉!

유리창도 없이 뻥 뚫린 폐건물의 창가에 선 그녀가 바람 소리를 들으며 바깥을 내려다봤다.

현재 높이는 대략 20층.

손상된 슈트의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잘못하면 조금 위험할 수는 있어도 지금은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휴머노이드들의 방해를 뚫고 다가오는 목표물, 애쉬 론모어를 한 차례 돌아본 그녀는 바로 창을 박차고 바깥으로 뛰었다.

­ 펄럭!

몸을 최대한 펼쳐 공기 저항을 많이 받게 하는 것으로 속도를 늦추고 착지의 순간, 슈트의 기능으로 충격을 흡수한다.

그렇게 계획한 그녀였으나, 이번에도 그녀가 예상치 못한 변수가 하나 끼어들었다.

­ 콰지직! 퍼엉!!

“이번엔 안 놓친다고 했을 텐데!!”

기어코 휴머노이드 하나를 박살 낸 목표물, 애쉬가 함께 창을 박차고 뛰어든 것이었다.

강화 인간이라도 20여 층에서 아무런 장비 없이 뛰어내리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깝다. 그런데도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이다니?

각종 시뮬레이션과 연산에 오류와 오류, 또 오류가 반복된다.

몸을 펼쳐 최대한 속도을 줄이며 낙하하는 와중에 마저 대책 없이 일자로 떨어지는 애쉬의 접촉을 피할 수는 없었고,

“잡았다…!”

그녀는 자신의 등에 목표물이 닿는 순간 들려온 목소리, 그리고 숨통을 강하게 조여오는 감각에 몸부림치다 정신을 잃었다.

*

“…그러니까 이 여자가 우릴 새벽에 습격한 그 녀석이라고?”

“어. 나중엔 내 어깨에 칼침을 한 번 제대로 놔주던데.”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게빌의 물음에 애쉬가 대답했다.

애쉬는 기절한 암살자에게서 슈트를 벗기고 적당히 구해온 일상복을 입혀 이곳까지 데려왔는데, 지금처럼 이렇게 정신을 잃고 눈을 감은 모습만 보면 그냥 보기 드문 미인일 뿐이다.

누가 이런 얼굴을 보고 새벽에 그런 짓을 벌인 습격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잠시 새하얀 머리칼은 물론이고, 눈썹과 속눈썹까지 모든 체모의 색이 하얀 미인을 바라보던 게빌이 애쉬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심문은 해봤나?”

“그건 아직. 이제부터 해봐야지.”

애쉬는 저 여자 암살자를 제압하고 이곳까지 끌고 왔다뿐이지 아직 심문은커녕 말 한마디 주고 받아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저, 정말 ‘아메르아’에서 전문 암살자까지 고용하다니.”

“…우리 의뢰인 님은 나랑 잠깐 빠져 있자고. 곧 저 녀석이 심문을 진행할 테니 말이야.”

다니엘 벡의 목소리에 게빌이 차마 그쪽을 노리고 온 게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한 채 그를 이끌어 바깥방으로 나갔다.

새벽에 이어 몇 시간 전에도 습격을 받았던 만큼 다니엘 벡은 꽤나 불안정한 상태라 괜히 트러블을 만드는 건 그닥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렇게 게빌과 의뢰인, 다니엘 벡이 방을 나서자 여전히 잠들어 있는 여자 암살자를 보던 애쉬가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자는 척은 그만하고 일어나지그래.”

게빌과 얘기할 때부터 긴가민가하고 있었는데, 한순간 흐트러졌던 호흡은 결코 우연적인 게 아니었다.

애쉬는 지금 이 순간 그녀가 깨어있음을 확신했고, 게빌에게 신호를 주는 것으로 의뢰인과 함께 나가게 했다.

그렇게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는 상대방과 제대로 얘기를 해볼 시간이었다.

상대가 입을 열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그리고 그런 애쉬의 예상대로 순백의 그녀는 눈을 떠 신비한 하얀 눈동자로 애쉬를 바라봤다.

이미 주변 상황은 물론이고, 결박당한 자신의 상태까지 파악이 끝났는지 저항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기에 애쉬는 의자를 끌어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괜히 허튼짓은 하지 마. 나도 진짜 귀찮아지겠다 싶으면 팔다리 정도는 잘라버릴 수도 있으니까.”

지금은 완전히 결박당한 상태라고 해도 애쉬 자신의 목숨을 실제로 위협했던 진짜배기 암살자였다.

아무리 최고 등급 광학미채의 힘이 있었다곤 해도 위협적일 수밖에 없는 날카로운 단검.

제대로 제압할 필요성을 느낀다면 정말 그 팔다리를 잘라 완전히 저항을 지워버릴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진심이었다.

그런 애쉬의 경고에 순백의 암살자 또한 별다른 저항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진짜 저항을 포기한 것 같지는 않지만, 일단은 어느 정도 경고가 된 것 같으니 애쉬는 천천히 질문을 시작했다.

“이름은?”

“…….”

“이름.”

“…….”

연단 질문에도 그저 자신을 바라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는 상대방.

애쉬는 그 하잘것없는 반항인지 저항인지 모를 행동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쪽이랑 기싸움 할 시간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그쪽도 고용된 용병 비슷한 입장이지? 괜히 의뢰인 측과 의리나 지킨답시고 하나뿐인 목숨을 낭비하지는 말자고.”

애쉬가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정말로 이쪽에 협조하지 않고 계속해서 적대할 생각이라면 목숨을 거둬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만큼이나 위협적이고 날카로운 암살자의 존재는 애쉬 자신에게도 꺼려지는 게 사실.

이번에야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극도로 경계했기에 겨우 잡아낼 수 있었지만, 모습을 감췄다가 수면 중에 저 말도 안 되는 은신술로 목을 노린다면 완벽히 막아낼 수 있으리란 법도 없었다.

아무리 애쉬가 미인에게 손대는 걸 꺼린다고 해도 결국 자기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저쪽에서 제대로 협조하고 이쪽의 질문에 사실대로 대답한다면 약간의 조치를 취할지언정 그 목숨을 거둘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애쉬는 자신이 불러 이곳으로 향하고 있을 빌헬름을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한번 물었다.

“이름은?”

“……린느 데 파르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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