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이버펑크 게임 속 칼잡이가 되었다-197화 (197/230)

〈 197화 〉 11. 죽음과 함께하는 자(15)

* * *

‘유성 그룹’ 사건 당시 지원을 나가서 비슷한 프로그램과 기가 빠지도록 싸워본 빌헬름이었기에 그것만큼은 확언할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회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처음 부딪혔을 인간 해커가 아니라 프로그램이 아닐까 의심했던 것이 지금 진실로 밝혀진 것이다.

‘대체 ‘회사’는 뭐하는 곳이지?’

빌헬름이 심각한 얼굴로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항상 빌헬름 본인이 자신하는 것처럼 그는 인구가 억 단위에 달하는 이 거대한 도시, 웨인 시의 앞뒤를 통틀어서도 한 손안에 꼽히는 해커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고전할 정도의 보안 프로그램을 이렇게 찍어낼 수 있는 곳이 존재하다니.

애쉬를 돕는 것 이전에 빌헬름 자신의 의문점 또한 풀고 싶었기에 어떻게든 해보려 했지만, 그게 불가능한 게 아쉬웠다.

“이쯤 되면 ‘회사’의 정체도 어느 정도 윤곽이 그려지네요.”

“그래.”

빌헬름의 말에 애쉬가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듯 대답했다.

지난 사건들과 이번 일을 모두 본다면 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이 정도 규모와 기술력을 갖고 있는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회사’는 아무래도 ‘리델’이나 ‘츠미모토’ 중 하나겠지.”

“네, 하지만 거기에 가능성만 본다면 한 곳이 더 있긴 해요.”

“한 곳이 더 있다고?”

“네. ‘연방 정부’요.”

“‘연방 정부’….”

빌헬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애쉬가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다며 반응했다.

이 정도의 재력과 권력, 그리고 기술력을 갖고 있는 곳을 꼽아본다면 기껏해야 몇 곳 되지 않는 기업체들을 가장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었는데, 빌헬름의 말대로 가능 불가능의 여부로만 본다면 ‘연방 정부’ 또한 포함되긴 했다.

“하지만 지금 ‘연방 정부’는 기업들에 반쯤 장악당한 상태일 텐데.”

“네. ‘연방 정부’일 확률은 낮긴 한데, 그래도 가능성은 열어둬야죠.”

비대하다 못해 거대해진 기업체들의 힘은 이미 시 정부를 넘어 연방 정부까지 닿은 지 오래다.

애쉬의 말에 가능성만 열어두는 것이라며 대답한 빌헬름은 곧 어떤 생각에 빠졌고, 애쉬는 그런 빌헬름을 둔 뒤 아직 가만히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린느 데 파르셰’, 믿을 수 없지만 자신이 닌자라 주장하는 순백의 암살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쪽은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까.

가장 안전한 방법은 이 자리에서 목을 베는 것이겠지만 꺼려지는 게 사실.

‘역시 처음 생각한 대로 빌헬름의 실력을 믿을 수밖에 없나.’

신경 인터페이스에 바이러스를 심어두고 일정 조건을 설정한 뒤, 그것을 어기는 순간 터져 나오도록 조정해놓는 것이다.

신경 인터페이스는 뇌와 직접 연결된 기관인 만큼 바이러스는 치명적이었고, 그것으로 인간 한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온갖 호르몬 폭주로 거품을 물며 죽게 만들거나, 뇌를 과열시켜 익혀버리는 것도 가능한 만큼 어느 정도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겠지.

물론, 빌헬름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의 해커가 나선다면 그것조차 풀어버릴 수 있기야 하겠다만 그런 이가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당장 연방을 통틀어도 빌헬름보다 실력이 확실히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을 해커가 한둘이나 있을까 말까 한데.

그렇게 애쉬가 생각을 한 쪽으로 굳혀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를 향해 손을 뻗어오는 린느 데 파르셰의 모습에 애쉬는 반사적으로 몸을 뺐다.

“내가 허튼 짓거리는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렇게 빠르지도 않은, 느릿한 손길이었지만 머리칼 사이에서 독침을 뿌려대던 것을 생각하면 무슨 짓을 벌일 수 있을지 모르니 경계해야 했다.

그러나 애쉬가 경계하던 것과 달리 그녀는 조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피 한 방울.”

“…피?”

끄덕.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는 린느 데 파르셰.

보아하니 피를 한 방울 달라는 것 같은데, 애쉬가 그것을 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피 한 방울 가져갔다고 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인간의 클론을 찍어낼 기술력이 있는 세상인 만큼 혈액의 유출은 끔찍한 참사를 만들 수도 있었다.

“내가 그걸 왜 줘야 하는데.”

웃기지 말라는 듯 애쉬가 말했지만 린느 데 파르셰, 그녀는 이유를 말하지도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에 애쉬도 그녀에게 더 묻지 않고 빌헬름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마무리하자.”

“아, 네. 그럼 조건은 어떻게 할까요?”

“웨인 시에 진입하는 순간 폭발하게 해.”

“그럼 조건은 GPS 위치가 웨인 시에 찍히는 순간, 그리고 외부에서 프로그램에 손을 대는 순간 발동하도록 하고 작동까지는 이틀 정도….”

빌헬름은 중얼거리며 아직 연결을 해제하지 않은 린느 데 파르셰의 신경 인터페이스로 바이러스를 담은 프로그램을 업로드했다.

애쉬는 계속해서 그녀가 반항하지는 않을지 경계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가만히 자신의 신경 인터페이스 속에 치명적인 독이라고 할 수 있는 바이러스가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여전히 시선은 그에게 향한 채로.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에 알 수 없는 찜찜함을 느낀 애쉬였지만, 끝내 그것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빌헬름의 작업은 얼마 이어지지 않았고, 애쉬는 곧 빌헬름으로부터 작업이 끝났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말씀하신대로 바이러스를 심어 뒀고, 웨인 시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한 여유 시간도 이틀 정도로 설정해뒀어요.”

“그래, 수고했어.”

“이번에 하고 있는 의뢰가 꽤 큰 건수라면서요? 수고비도 잘 챙겨주세요.”

“오냐.”

빌헬름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애쉬가 대답했다. 갑자기 불러 위험할지 모르는 일을 시키는 만큼 그 대가는 잘 챙겨줄 생각이었다.

빌헬름은 그런 애쉬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린느 데 파르셰의 신경 인터페이스에 연결했던 단자는 이미 회수해 정리한 뒤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래, 너도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네.”

철컥. 빌헬름이 떠나며 문 닫히는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이제 방에는 남은 것은 단둘뿐.

애쉬가 아직도 가만히 있는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뭐해, 안 가고. 시간이 없을 텐데.”

분명 양손을 뒤로 묶어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방금 손을 뻗어온 걸 보니 용케도 그가 묶어뒀던 결박을 잘 빠져나온 것 같았기에 더 풀어주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그것으로 완전히 그녀를 결박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빌헬름이 설정해둔 여유 시간은 단 이틀.

만약 주거지가 웨인 시에 있다면 물건을 챙기고 빠져나가기에도 벅찬 시간일 텐데 이 여자는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애쉬가 어서 가라는 듯 눈짓하자 침상에서 일어난 그녀는 자연스럽게 옆에 널브러져 있던 옷가지를 주워 창가로 향했다. 그리곤 끼이익, 오래된 창문을 열어 자신이 나갈 길을 만든다.

열린 창문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에 하얀 머리칼이 나부끼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과 같이 보였다.

애쉬는 잠시 그런 린느 데 파르셰를 굳이 붙잡지 않고 바라봤지만, 곧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옷가지 사이의 검은색 광학미채 슈트를 발견하곤 외쳤다.

“음? 잠깐. 그건 두고…!”

­ 펄럭!

애쉬가 말을 모두 마치기도 전에 창밖으로 몸을 던져 뛰어내리는 그녀.

급히 창가로 달려가 봤지만, 중력에 의해 낙하하며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이 퍽이나 인상적이다.

현재 있는 방의 위치는 5층.

자신을 닌자라고 밝힌 여자답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착지해서는 길거리의 놀란 주민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사무실도 옮길 겸 유성 쪽에 선물 하나 챙기나 했더니.”

애쉬는 자신의 사무실 자리를 구해준다던 서령의 얼굴을 떠올리다 이내 고개를 저어 그것을 떨쳐냈다.

그리고 덜컹, 창문을 닫고 다시 방 안쪽으로 향했다.

‘이러면 일단은 정리된 건가.’

암살자 측의 위협도 이제 사라졌다고 봐도 좋았으니 의뢰에만 집중하면 될 것 같았다.

애쉬는 피곤한 몸을 침상에 누인 뒤 슬쩍 눈을 감았다.

가장 위급한 일은 이제 모두 끝냈으니 조금 쉬어도 되겠지. 독에서 몸을 회복하는 와중에 기력이 어지간히 많이 빨린 모양인지 전에 없을 정도로 피로가 가득한 상태였다.

‘뭔가 일이 있으면 알아서 깨워라.’

바깥 거실에 있을 게빌과 의뢰인이 듣지 못할 목소리를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애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마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

“이봐 애쉬. 일어나. 벌써 하루가 지났다고.”

한심하다는 듯 말하고 있지만 조금은 걱정이 느껴지는 게빌의 목소리.

애쉬는 아침부터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깨어난다는 사실에 영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의뢰중이라는 것을 떠올리곤 곧장 눈을 떴다.

“…별일은 없었지?”

“그래. 네가 의뢰 중 하루 동안 눈을 뜨지 않은 걸 제외하면 말이야.”

“으음. 괜찮았다는 소리네.”

게빌의 핀잔을 가볍게 넘기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던 애쉬가 여전히 어깨를 찌르는 통증에 인상을 찡그렸다.

단검의 날이 뼈에 닿을 정도로 깊이 박혔었으니 적어도 며칠 이상은 달고 살아야 할 고통이다.

애쉬의 뛰어난 재생력으로도 이 정도의 상처는 순식간에 회복할 수가 없었다. 그런 게 가능하면 남들이 부르는 것처럼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었겠지.

“의뢰인은?”

“거실에. 불만이 상당한 것 같던데.”

“그럼 어쩔 건데. 의뢰만 멀쩡하게 완수하면 되지.”

의뢰인이 불만을 갖고 있는 것 같다는 게빌의 말에도 애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쪽이 의뢰 기간 동안 잠만 자든 뭘 하든 무슨 상관인가. 게빌의 존재가 없었다면 애쉬도 할 말이 없었겠지만, 믿어도 되는 실력자 한 명이 지속적으로 붙어서 관리하고 있었으니 의뢰만 무사히 끝내면 될 것 아닌가.

게다가 그 책상물림이 먼저 나서서 귀찮게 따질 것 같지도 않았고.

기껏해야 은근슬쩍 눈치 주는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하아. 그래. 그래도 남은 기간 정도는 확실하게 하자고.”

“어.”

애쉬의 느슨한 태도에 한숨을 푹 쉰 게빌이 말했고, 애쉬도 순순히 그러마 했다.

제일 위험하고 귀찮을 일이 마무리됐으니만큼 이제는 다른 곳에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이 남은 시간을 보내면 끝이었다.

­ 철컥.

그렇게 대화를 마친 애쉬와 게빌은 거실로 나와 의뢰인에게 다가갔고, 역시 애쉬 자신의 예상대로 의뢰인은 찍소리도 못한 채 그런 둘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 둘에게 달려있었으니.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 아마 애쉬 씨가 그쪽에 고용됐다는 소릴 듣고 ‘아메르아’ 쪽에서도 손을 놓은 것 같아요. 일단 용병들이 애쉬 씨와 부딪히는 일을 피하고 있으니까요.

“그래? 덕분에 지루하긴 해도 편히 쉬었네.”

애쉬가 단말을 통해 들려오는 빌헬름의 목소리에 대답했다.

의뢰인, 다니엘 벡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첫날의 습격 이후 ‘아메르아’측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애쉬가 운영하는 ‘론모어 해결사 사무소’가 이번 일을 맡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기존에도 슬럼에서 전설적이었던 애쉬의 이름은 유성 그룹을 포함한 여러 사건을 통해 바깥으로도 널리 알려졌고, 그런 만큼 애쉬와 맞붙고 싶어 하는 해결사도, 용병도 찾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직접 나서서 처리하자니 제약 회사에 불과한 ‘아메르아’ 쪽에서 전투 훈련을 받은 요원들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그쪽에서도 분풀이에 불과한 행위로 얻을 손해를 계산해본 결과 그냥 손을 떼버리자는 결론이 나온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독과 부상으로 인해 피로를 느끼던 애쉬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그런 이유도 모르고 첫날 이후 습격이 없자 괜히 호위 기간을 늘린 의뢰인의 입장에서는 배가 아플 일이었고.

그렇게 애쉬와 게빌의 첫 합동 의뢰는 무사히 끝나는 듯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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