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13. 바렛 오테너(1)
* * *
도심에 위치한 어느 빌딩.
전 임대자가 사라진 후 한동안 비어있던 31층의 사무실은 오가는 사람들과 짐, 그리고 가구나 전자제품 따위로 부산스러웠다.
“그럼 TV는 저쪽으로 옮기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려요.”
“이건 어디로 두면 될까요?”
“아, 그건 이쪽으로 배치해주세요.”
한동안 비어있던 이곳은 이전 사무소에 있던 짐을 올려보내는 타워 크레인과 그것을 옮기는 이사 센터 직원들.
신체 개조를 받은 사이보그인 그들은 자신의 몸집보다 커다란 가구도 거뜬히 들어 옮겼다.
누가 도시 중심에서 영업하는 이사 센터 아니랄까 봐 슬럼에서는 구경하기도 힘든 제대로 된 개조 파츠를 이사 센터 직원들마저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들은 모두 전투용이 아닌 공업이나 개인용 개조 파츠였지만, 그것만으로 이미 슬럼에서 굴러다니는 싸구려 깡통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샤인은 직원들에게 지시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가구나 전자제품 따위를 배치하고 있었고, 애쉬는 자신에게 중요한 주거지만 적당히 본 뒤 사무실이 정리되어 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실장님, 이건…?”
“그건 이쪽! 어이, 찰리! 냉장고는 그쪽이 아니라 이쪽에 둬 달라고 하셨잖아!”
직원들은 이삿짐의 배치 지시를 내리는 샤인의 어린 외모에도 불구하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며 정성껏 일을 계속했다.
척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분위기의 애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이곳 사무실의 위치 자체가 일반인들은 꿈도 꾸기 힘든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정중앙에 자리 잡은 1구역, 그중에서도 특히나 유동 인구가 많고 땅값이 비싸며 임대료가 높기로 유명한 중심가 한복판의 빌딩에 사무실을 이전하고 있었으니 아무리 샤인의 외모가 어리다고 한들 쉽게 무시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아마 애쉬가 이 자리에 없었다고 해도 저들은 비슷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그쪽엔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네.’
벽에 몸을 기댄 채 드넓은 사무실을 바라보던 애쉬가 생각했다.
현재 그가 위치한 사무실은 다름 아닌 서령으로부터 임대받은 것.
완전히 그쪽에서 소유권을 넘겨준 것은 아니지만 임대료가 일반적인 시세에 비하면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서령은 그마저도 대외적으로 보이기 위한 것일 계약일 뿐 굳이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것까지 그냥 받아먹기엔 아무리 애쉬라도 양심에 가책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한번 얼굴을 보고 식사라도 대접하며 감사를 전해야겠다.
그렇게 애쉬가 서령을 떠올리며 결심할 때였다.
뚜루루루.
그가 뒷주머니에 넣어뒀던 단말에서 수신음이 울리며 누군가 그를 찾고 있음을 알렸다.
애쉬는 그에 누가 연락했나 싶어 단말을 꺼내 화면을 들여다봤는데, 화면에는 마침 그가 떠올리고 있던 서령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애쉬는 바로 단말을 조작해 그녀의 연락을 받았다.
애쉬! 아직 이사 중이죠?
“응, 무슨 일이야?”
잘 됐다. 직원들을 통해서 필요할 만한 물건들을 조금 보내봤는데, 슬슬 도착할 때가 돼서 연락했죠. 아직 안 왔어요?
“안 오긴 했는데 굳이 그런걸.”
마음 같아선 직접 찾아가고 싶은데 워낙 바쁘다 보니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워서요.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소중하게 써줘요.
서령은 애쉬의 말에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대답했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연락을 한 걸 보면 어지간히도 마음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 모양.
애쉬는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 픽 웃으며 말했다.
“그래. 뭘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쓸게. 그리고 사무실도 고맙고.”
세상에.
“응?”
애쉬가 다른 사람한테 고맙다고 하는 거 처음 보는 것 같아요. 괜히 기쁘네요.
“…그래?”
자신이 고맙다고 말하는 것을 처음 본다는 서령의 말에 애쉬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하는 게 정말 오랜만인 것 같기도 하고.
빌헬름에게는 가끔 고맙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서령이라면 확실히 처음 들을 법도 했다.
“뭐, 아무튼 조만간 식사나 한 끼 대접할 테니까 미리 연락하면 시간 비워 둬.”
후후. 그럼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렇다고 너무 기대하진 말고.”
작게 웃으며 말하는 서령의 목소리에 애쉬도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자신이 어디 음식점을 골라봐야 평생 최고만 누렸을 서령의 기준치를 제대로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그렇게 짧게 대화를 나누던 서령은 대화 도중 깜빡했다는 듯 얘기를 꺼냈다.
아 참, 레이라 씨도 조만간 한번 찾아가겠다고 했었는데. 그때 다 같이 모이면 어떨까요?
“레이라가?”
네. 레이라 씨도 이번에 사옥을 하나 마련했거든요. 1구역은 아니고, 3구역에요.
“그쪽도 잘 되고 있나보네.”
슬럼에서나 여왕에 가까운 위치였지, 도시 안쪽으로 들어와서까지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오히려 저 밑바닥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배척받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벌써 그 비싼 3구역에 사옥을 하나 마련했다니.
슬럼과 3구역의 땅값을 생각하면 그 금액에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기에 아무리 서령과 ‘유성 그룹’의 도움이 있었다곤 한들 정말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자.”
애쉬가 한번에 다 같이 모여보자는 서령의 말에 동의했다.
레이라, 그리고 서령과 그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아마 유성 그룹의 일이 끝난 이후로는 처음.
그 둘에게는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던 게 있기 때문에 제대로 마음먹고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생길 매우 귀찮은 일들은 샤인이나 게빌에게 대부분 떠넘길 생각이 가득하긴 했지만.
악덕사장 애쉬의 머릿속에서 직원들이란 귀찮은 일을 대신 맡기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이었다.
애쉬와 서령은 이후 있을 만남에 관련된 주제로 잠시 얘기를 계속했고, 곧 회의에 들어가야 한다는 비서의 알림으로 인해 연락을 마무리 지었다.
그럼 그때 봐요.
“어. 수고해.”
네. 사랑해요, 애쉬.
뚝.
서령은 기습적으로 그 말 한마디만을 남긴 채 연락을 끊었고, 애쉬는 잠시 연락이 끊겨 원래대로 돌아온 단말의 화면을 바라보다 그것을 뒷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자신이 뭐라고 할까 몰라 급하게 끊은 것 같은데, 꽤 깜찍한 행동을 해주지 않는가.
“흐음….”
애쉬는 잠시 이런 서령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사무실 입구에서 무언가를 들고 들어오는 이들을 발견했다.
“애쉬 론모어 님 맞으십니까?”
“어. 그쪽은 ‘유성 그룹’에서 왔어?”
“예. 유서령 상임이사님께서 보내신 물건들입니다. 어디에 놔드리면 될까요?”
애쉬는 자신의 인상착의에 대해 들었는지 곧장 다가와 묻는 ‘유성 그룹’의 직원에게 물건이 가전제품 따위라는 것을 듣고는 곧 적당한 곳에 그것을 둘 것을 지시했다.
샤인은 이미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런 와중에 이런 것까지 떠넘기기는 조금 그랬으니.
애쉬는 그렇게 샤인과 함께 사무실 쪽을 관리했고, 그것은 게빌이 이후 새로운 직원을 데리고 올 때까지 계속됐다.
*
“우리 사장님께서 간만에 일을 좀 하셨군.”
“너는 그 사장이 일을 하는데 여자 친구나 데려왔고 말이야.”
이사 센터 직원들에 의해 사무실의 정리 및 청소가 모두 끝난 저녁. 게빌이 자신을 보며 놀리는 듯한 말에 애쉬가 대꾸하며 반격했다.
게빌은 그와 샤인이 사무실 쪽에 있는 동안 이 넓고 커다란 사무실을 관리할 직원을 하나 더 구해왔는데, 그 직원이라고 구해온 사람이 바로 이전 애쉬도 ‘리퍼슨 물류’의 일을 도울 때 익히 봤던 ‘케일 로렌스’였다.
갈색 웨이브진 머리칼이 매력적인 그녀는 ‘총잡이들의 여명’과 ‘리퍼슨 물류’ 양측의 재무 관리를 하던 재무팀의 팀장이었는데, ‘웃는 악마’와의 전투 이후 ‘리퍼슨 물류’가 해체된 뒤 쉬고 있다 게빌에 의해 불려 나온 것이다.
애쉬도 짧은 시간이나마 그녀를 봐왔기에 그녀가 깐깐하고 유능한 인재이라는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애쉬가 반격한 것처럼 게빌과 미묘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여성이기도 했고.
그런 애쉬의 말에 게빌은 다시 한번 그것을 받아쳤다.
“흥, 자기를 죽이려던 암살자를 부하라고 끌고 온 것보단 낫지.”
“…….”
암살자라는 단어가 들리자 소파 애쉬의 옆자리에 멍하니 앉아있는 것 같던 린느의 신비로운 하얀 눈동자가 게빌을 향해 움직였다.
애쉬에게 사흘 동안 괴롭혀진 이후 항상 멍한 상태를 유지하던 그녀였지만, 특정 단어에는 이렇게 반응하곤 했다.
그에 움찔한 게빌은 자신을 향하는 린느의 하얀 눈동자에게서 슬쩍 고개를 돌려 저쪽에서 샤인과 업무에 관해 대화 중인 케일 로렌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럼 이럴 때는…….”
“네, 사장님께서는 대체로…….”
“아. 확실히 바쁘긴…….”
애쉬도 게빌의 시선이 향하는 샤인과 케일 로렌스 쪽을 바라봤다 다시 고개를 돌리며 작게 웃었다.
전에 있었던 휴머노이드의 습격이 꽤 인상적이긴 했는지 린느의 행동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빌이었다.
무서워한다기에는 게빌의 실력과 경험이 너무도 뛰어났고, 조금 경계하는 느낌.
그러면서도 이제는 동료가 됐다는 말에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고개를 돌린 게빌과 멍한 린느에게서 고개를 돌린 애쉬는 테이블 위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명패 하나를 바라봤다.
[론모어 해결사 사무소]
[사장 ‘애쉬 론모어’]
서령이 보낸 물건들 사이 섞여 있던 이 고급스런 명패는 이제 사무실 안쪽에 위치한 그의 집무실 책상 위로 올라갈 예정.
이제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이 추가된 직원들과 함께 새로운 일상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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