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 14. 동료(3)
* * *
“애쉬!”
애쉬의 이름을 부른 서령은 곧장 그를 향해 달리듯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팔을 벌렸다.
그게 어떤 것을 뜻하는 제스처인지 잘 알고 있는 애쉬였기에 그는 그것을 피해야 할지, 아니면 받아줘야 할지 고민했지만, 그 고민이 너무 길어져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도착한 서령이 그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와락!
“…….”
“아가씨….”
“저 놈팽이가 뭐가 좋다고. 쯧쯧.”
서령의 일행들이 애쉬의 품에 안긴 서령의 뒷모습을 보고 한마디씩 했지만, 서령은 그런 것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애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곤 어리광부렸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마지막으로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그래두요.”
서령의 애정 가득한 목소리에 지금이라도 그녀의 어깨를 잡아 떼어 놓아야 하나 고민하던 애쉬는 끝내 그러지 못하고 그녀의 가녀린 몸을 마주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미리 도착한 손님들 쪽에서 따가운 시선이 향하는 것 같았지만,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충분히 온기를 교환한 뒤 만족스런 표정을 지은 서령이 한 발짝 물러나며 품에서 벗어나자 애쉬는 그제야 그녀를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수수한 듯 하면서도 작게 반짝이며 자신의 존재감을 발하는 귀걸이와 작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목걸이.
가느다란 손목에는 로즈 골드빛 팔찌가 자리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서령 자신의 피부만큼이나 새하얀 원단의 파티 드레스였다.
누가 보면 해결사 사무소의 개업 파티가 아닌 상류층의 사교 파티라도 온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꾸민 모습.
한 발짝 물러나 서령의 그런 디테일 하나하나를 확인한 애쉬는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생각하면서 옷을 하나하나 고르는 모습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 이 자리에서는 자신을 칭찬하라는 듯 애쉬를 향해 열렬한 눈빛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분명 그녀는 성숙한 매력을 뽐내고 있었지만, 저런 눈빛과 분위기는 어린아이가 잘 꾸며와서는 부모에게 자랑이라도 하듯 귀여운 모습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아주 제대로 차려입고 왔네. 누가 보면 이 자리의 주인공인 줄 알겠어.”
“…그게 다예요?”
“그럼?”
“그건….”
그럼 뭐가 더 필요하냐는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묻는 애쉬의 목소리에 서령은 말끝을 흐렸다.
어찌나 속내가 잘 보이는지 정말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모습이다.
그에 작게 웃음을 터뜨린 애쉬는 놀리는 걸 그만두고 그녀가 원하는 말을 해주기로 했다.
“프흐, 그래. 예쁘네.”
“치, 늦었어요.”
“그렇다고 삐지지는 말고.”
“그건 하는 거 봐서요.”
애쉬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서령이 작게 투정했다.
그에 애쉬가 무어라 반응을 보이려는 찰나, 도저히 더 이상 못 봐주겠다는 듯 늙수그레한 노인의 목소리가 둘의 분위기를 깨뜨리며 난입했다.
“이쪽은 손님도 아니냐 이놈아!”
“…영감.”
“아하하….”
하얗게 센 머리칼과 수염, 하지만 그와 달리 무척이나 건장한 체구의 노인의 목소리는 그 체구에 맞게 무척이나 카랑카랑하며 우렁찼고, 그것은 장내에 있던 시선을 모두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주변의 시선이 따갑게 모여 들어서야 자신이 파티의 주최자를 너무 오래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서령이 어색하게 웃으며 물러섰고, 그에 따라 애쉬는 서령과 동행한 다른 일행들을 볼 수 있었다.
“영감은 어울리지도 않게 웬 정장이래. 유성에서 일한다더니 거기서는 정장을 입고 일하나?”
“흥, 그럴 리가. 다만 우리 고용주님께서 어지간히도 다그치셔야지.”
“제가 뭘 얼마나….”
자신을 탓하는 에리히 슈만의 목소리에 물러났던 서령이 작게 불평했다.
에리히 영감이 저런 정장을 입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애쉬였으나, 그를 저런 모습으로 만든 게 서령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불 같은 성격의 에리히 영감이라도 결국 돈을 주는 물주에게는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인가.
혼자 그런 우스갯소리를 머릿속으로 떠올린 애쉬는 에리히 영감에 이어 서령의 경호원인 베일라와 비서인 에아임, 그 둘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아무튼 잘 왔어. 아줌마랑 아저씨도.”
“아줌마라고 하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하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애쉬 님.”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는 베일라와 웃으며 인사하는 에아임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애쉬는 여전히 찰진 반응을 보이는 베일라를 놀리는 재미에 미소 지으며 그 둘과도 간단한 근황 얘기를 나눴다.
“저야 뭐. 별다른 일이 없을땐 연구소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저쪽에 있는 다른 테스터 분과 함께요.”
“그래? 만들던 건 다 돼가나?”
“듣자 하니 거의 완성단계에 접어든 것 같습니다. 물론, 당신한테 줄 건 아직 한참 남았겠지만요.”
베일라는 게빌과 함께 시제품 테스트와 이런저런 대련 및 격투기 훈련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에아임은.
“저는 아가씨와 함께 업무를 하는 것 외엔 특별하다고 말씀드릴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아가씨의 일이 곧 제 일이니까요.”
“그렇긴 하지.”
빈말이 아니라 에아임은 그것만을 위해서 설계된 존재였다. 서령의 업무 보조 및 극한의 상황에서의 호위 등.
서령과 떨어질 거의 일이 없으니 서령의 일상이 곧 에아임의 일상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게 최근 근황에 대해 들은 애쉬였지만, 아직 그는 에아임에게 궁금한 점이 더 있었다.
“그나저나 예전 기억은 되찾은 거야? 전화로 연락할 때와는 대하는 느낌이 좀 다른데.”
전에 연락할 때와는 달라진 대응 방식. 그때는 어색함과 미묘하게 어려워하는 듯한 분위기가 가득했지만, 지금은 과거처럼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듯 편한 느낌이었다.
분명 한번 파괴되었던 에아임의 기억은 복구 불가능 처분을 받았을 텐테, 그것을 복구하는 데 성공한 걸까?
그런 애쉬의 물음에 에아임은 쓴웃음을 지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그때의 기억은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제가 파티의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
“예. 그렇지만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지금 이 자리가 즐거운 건 사실이니까요.”
에아임은 애쉬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자신의 대답이 애쉬에게 어떻게 다가왔을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쉬는 그런 에아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준비를 마친 케일이 파티의 시작을 알렸다.
“애쉬 씨! 준비 전부 끝났어요!”
“알겠어.”
애쉬는 사무실 중앙의 기다란 연회용 테이블로 향했고, 그런 그의 움직임에 미리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도 그곳으로 향해 각자 편한 자리에 섰다.
그렇게 한 명씩 술이 따라진 잔을 받고 모두가 얼굴을 마주하게 된 순간. 애쉬는 파티의 주최자로서 그들의 면면을 둘러보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다들 와줘서 고맙고. 앞으로 언제든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의뢰서를 넣어.”
여기 있는 사람들은 특별히 최우선적으로 처리해줄 테니 말이야.
애쉬는 농담처럼 진심을 얘기했고, 파티에 참여한 다른 이들은 그런 애쉬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런 짧은 말로 의례적인 얘기를 끝내고 파티를 시작하려던 애쉬는 자신의 반대편, 끝자리에 서있는 빌헬름의 목소리에 입가로 가져가던 잔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말고 건배사라도 하나 해주세요!”
“…건배사?”
“네!”
“뭘 그런 걸….”
빌헬름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애쉬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반응했지만, 파티에 참석한 이들은 오히려 그런 애쉬의 반응에 노골적으로 실망이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허허. 저놈이 흥취가 부족하구나.”
“저도 애쉬의 건배사가 듣고 싶어요.”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보겠습니다.”
에리히 슈만과 서령, 그리고 베일라로 이어지는 목소리들과.
“그러지 말고 짧아도 좋으니 한번 해보지 그래.”
“주최자라면 건배사 하나 정도는 준비해뒀어야죠.”
“사장님.”
게빌과 케일, 그리고 주스를 든 샤인의 목소리까지.
레이라나 에아임, 그리고 레이라의 부하인 케인은 별말 않았지만, 내심 기대하고 있는 게 보였다.
갑자기 건배사라니, 대체 자신에게 뭘 바라고 있는 건지.
애쉬는 자신이 그렇게 말재주가 있는 편이라곤 생각하지 않았기에 갑작스런 건배사 부탁에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이던 애쉬는 다시 한번 자신의 좌측부터 천천히 다른 이들의 얼굴을 돌아봤다.
유서령.
에아임.
베일라.
에리히 영감.
빌헬름.
케인.
샤인.
케일.
게빌.
레이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와 한때 함께했던 이들이며 지금도 계속해서 도움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이들이었다.
일종의 동료들이라고 봐도 좋을 이들만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들의 기대 섞인 눈빛을 받으며 잠시 뜸을 들이던 애쉬는 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함께한 모든 동료들의 번영을 위하여. 그리고 나는 마음에 안드는 놈들의 개박살을 위하여.”
“푸훗.”
“에잉. 저런 것도 건배사라고.”
“애쉬 씨다운 건배사긴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애쉬의 건배사에 여기저기서 작은 웃음소리와 목소리들이 흘러나왔지만, 그들의 표정만큼은 자신들의 말처럼 실망한 느낌이 아니었다.
밝은 얼굴에 피어오른 웃음들.
설마 애쉬의 입에서 동료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미소지은 이들은 한 마디씩 하다가도 기분 좋게 잔을 들어올리며 다같이 재창했다.
““““위하여!!””””
*
떠들썩한 파티는 계속되고, 애쉬는 이곳저곳 오가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자리를 즐겼다.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세요? 지금은 진짜 사람이 바뀌었어요.”
“정말요? 물론 애쉬를 처음 볼 때는 조금 무섭긴 했는데….”
“말도 마세요. 그때는 진짜 귀신이었다니까요.”
“…나도 얘기는 들었어. ‘미친 칼잡이’라는 별명도 그때 붙었다고 하던데.”
‘오마르의 망치’ 때의 얘기를 떠드는 빌헬름과 그런 그의 얘기에 귀 기울이는 서령, 레이라.
“내가 그때 말했지. ‘세계 최고의 검을 만들어주겠다’라고.”
“오….”
“…낭만적인 얘기군요.”
“그, 그래서 어떻게 됐죠? 영감님!”
애쉬와 처음 만났을 때의 얘기를 하고 있는 에리히 슈만과 그것을 듣는 에아임, 베일라 그리고 케인.
“솔직히 그때는 완전히 끝난 줄 알았지. 우리가 명백히 밀리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저 녀석이 나타난 거야.”
“완전 영웅 출현이네.”
“하, 영웅은 무슨. 그냥 망나니지.”
“왠지 사장님이 나타나서 뭐라고 하셨을지 상상이 가네요.”
‘총잡이들의 여명’ 때의 일을 얘기하고 있던 게빌이 케일의 목소리에 그것을 부정하고, 샤인이 머릿속에서 그런 광경을 그려보며 떠든다.
각자의 개성이 너무도 강한 이들이기에 어색한 분위기가 되면 어쩌지 하던 걱정과 달리,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얘기를 주고받는 모습.
애쉬는 그런 모습들을 둘러보던 와중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의 모습에 자신이 깜빡하고 있던 존재를 떠올렸다.
그리고 명령했다.
“린느. 모습을 드러내.”
그의 명령에 따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뒤편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하나 나타났다.
얼마 전부터 그를 주인으로 모시기 시작한 순백의 닌자가.
“그러니까…….”
“아, 그래서 애쉬가…?”
갑자기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얼마 되지 않아 빌헬름의 얘기를 들으며 애쉬를 흘깃 바라보던 서령의 눈에 들어왔고, 애쉬는 때마침 잘됐다는 듯 린느를 보며 말했다.
“너도 숨어있지만 말고 즐겨. 저쪽 아가씨랑 놀면 적당하겠네.”
“…명령…?”
“글쎄.”
잠시 고민하던 애쉬는 린느를 발견하고 놀란 눈의 서령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린느의 성격상 명령이 아니라면 더 나서지 않을 것 같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단은 명령이라고 하자.”
“…명령이라면.”
그렇다면 따르겠다는 듯 린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서령에게 집중했고, 서령도 애쉬에게 다가와서는 그녀에 대해 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누구예요?”
“내 부하.”
“그런데 차림이….”
서령의 시선이 몸의 곡선을 명확히 드러내는 슈트 차림의 린느를 한 차례 훑었다.
그냥 부하라고 치부하기에는 조금 묘한 느낌이 아닌가.
애쉬를 흘겨보던 서령은 덥썩 린느의 손을 잡았다.
“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린느. 린느 데 파르셰.”
“언제 이런 분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린느 씨는 제가 데려갈게요!”
“그러든가.”
애쉬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서령은 린느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이 있던 그룹으로 데려갔다.
조금 막무가내 같지만 린느에게도 나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애쉬는 린느를 끌고 가다시피 하는 서령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고, 파티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