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 14. 동료(6)
* * *
휘이잉.
열린 창문 틈새로 바깥의 후끈한 공기가 흘러들어온다.
애쉬는 잠결에도 느껴지는 바깥 공기의 뜨거움과 땀에 젖은 몸의 끈적함에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더워.”
전날 저녁 깜빡하고 에어컨을 켜놓지 않고 잠든 모양인지, 상쾌해야 할 기상 시간이 불쾌함으로 가득하다.
평소였다면 깨어난 이후로도 수십 분 간은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시간을 때웠을 텐데, 지금은 자면서도 땀을 뻘뻘 흘렸을 정도로 끔찍한 더위에 그럴 엄두가 나질 않았다.
다행이라면 열린 창문을 통해 슬럼처럼 역겨운 오물 냄새가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일까.
깨어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 애쉬는 곧장 창문을 닫고 샤워실로 향했다.
쏴아아.
샤워기를 열자 시원한 물이 쏟아진다. 안 그래도 더위로 인해 막 깨어난 것 치고는 또렷했던 정신이 찬물을 뒤집어쓰며 아주 말짱히 자리잡았다.
적당히 시원한 물로 샤워를 끝내고 나온 애쉬는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창문은 대체 누가 열어둔 거야?”
에어컨이라면 자신이 깜빡하고 안 켰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애쉬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창문을 여는 경우가 없었다.
슬럼에서는 창문만 열면 코를 찌르는 오물 냄새가 방 안의 공기를 오염시켰으니까.
그것은 일종의 버릇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창문이 열려있는 걸 보면 애쉬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길이 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샤인인가?”
샤인이 자신의 방 청소를 하다 깜빡하고 창문을 열어둔 것인가 생각한 애쉬였지만, 잘 생각해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샤인은 슬럼 출신답지 않게 무척이나 깔끔한 성격이었던 데다 그에 못지않게 꼼꼼했기에 창문 닫는 걸 잊었을 리가 없다.
특히나 애쉬가 더운 걸 아주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더욱 깜빡했을 가능성이 낮았다.
그렇게 샤인이 용의선상에서 벗어난다면 남은 건 게빌과 케일.
둘 중 하나라는 건데, 그중에서도 케일일 확률이 높다고 예상하는 애쉬였다. 게빌이 구태여 자신의 주거공간까지 올라올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가서 한마디 해야겠네.”
간만에 사장으로서의 위엄을 살릴 생각…보다는 그냥 그걸 핑계로 쉬어볼 의도로 옷을 갈아입은 애쉬는 곧장 사무실로 내려갔고, 자신보다 한참은 먼저 출근해서 간단한 전화 업무를 하고 있던 샤인과 케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네, 자세한 사항은 직접 방문하셔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네. 의뢰서를 넣어주시면….”
그 둘은 오랜만에 모두 전화를 받아 의뢰인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확실히 1구역의 콜드 스팟에서 모습을 드러낸 성과가 있었는지 며칠 정도 지나자 전화가 바쁘게 걸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애쉬가 모습을 드러낸 것보다는 게빌과 바렛 오테너 쪽의 사건이 더욱 영향을 크게 미치긴 했지만, 어쨌든 1구역으로 사무실 이전 직후 아무런 일도 없었던 때보다 한참은 바쁜 상태였다.
“예, 알겠습니다. 위치는 1구역의 그랑 헤레스 빌딩 31층이고, 방문 시간은 영업 중이라면 언제든 편하게 방문해주시면 되니 그때 뵙겠습니다.”
뚝. 연락을 마친 케일이 구식 유선 전화의 수화기를 내려두곤 서류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전화 업무는 일단락된 그 모습에 애쉬가 다가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내 방 창문 열어둔 게 그쪽이야?”
“네? 바쁜데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케일은 자신에게 다가와 시답지 않은 소리를 내뱉는 그를 황당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애쉬는 안면에 철판을 깔고 제 할 말을 계속했다.
“덕분에 간밤에 땀 좀 뺐는데, 기운이 빠져서 일을 못 하겠어.”
“언제는 일을 했다는 듯이 말하시네요.”
“아무튼. 오늘은 쉴 테니까 별일 없으면 부르지 마.”
“흥, 그러시던가요. 이제 한동안 바쁘실 텐데 쉴 수 있을 때 많이 쉬어두세요.”
케일은 자신이 깜빡하고 열어둔 창문 하나를 핑계로 일을 쉰다는 애쉬에게 위협하듯 말했다.
앞으로 일을 왕창 잡아서 놀고 있는 애쉬를 괴롭히겠다는 생각이 엿보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중의 애쉬 자신이 알아서 처리할 일.
지금의 그는 나중의 자신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놀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애쉬가 오늘은 뭘 하면서 놀아볼까 고민할 때였다.
딸랑딸랑.
“다녀왔…. 오, 마침 일어나 있었구만.”
커다란 캐리어 하나를 챙긴 게빌이 어딘가 다녀오다 애쉬를 발견하곤 반갑다는 듯 인사했다.
그에 무슨 일인가 싶은 애쉬가 게빌을 바라보자 그는 자신이 들고 있는 캐리어, 아니, 캐리어 형태로 뭉쳐 있는 나노 머신 파워슈트를 적당한 곳에 걸쳐 세워두며 말했다.
“안 그래도 너한테 전해달라는 소식이 있어서 말이지.”
“전해달라는 소식?”
“그래. 그저께 파티에서 받았던 그 검. 나중에 완성 단계의 준비가 끝나면 연구소로 호출할 테니 미리 말 좀 전해달라더군. 연락을 잘 안 받는다나.”
게빌이 가져온 소식은 다름 아닌 그가 선물 받은 검, 뒤랑달에 대한 것이었다.
에리히 영감이 아직 미완성품이라 못 박았던 그것의 완성 준비가 되면 곧장 작업에 들어가 세계 최고의 검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전언.
저 캐리어 형태로 모여 있는 파워슈트를 왜 갖고 외출했나 했더니, 유성의 연구소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합법적으로 쉬는 날을 만들어낸 애쉬는 소파로 향해 그 시트에 몸을 묻었다.
“아주 연구소 일에 진심이네.”
“그야 당연한 얘기를. 겨우 테스트에 몇 번 참여 하는 걸로 이런 물건을 받을 수 있는데 지금보다 더한 걸 하라고 해도 따라야지.”
“그게 그렇게 성능이 좋아?”
“물론. 게다가 성능을 따지기 이전에 파워슈트라는 점에서부터 그 가격이 말도 안 될 정도로 비싸지는데, 심지어 이건 유성 그룹에서 시중에 발표하지도 않은 기술로 제작된 프로토타입이다.”
일반적인 파워슈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휴대성, 그리고 편안한 착용감에 더해지는 신체 능력 보조 기능까지.
그 모든 것이 정말로 대단한 수준이었다. 이런 물건을 겨우 테스트 몇 번 참여하는 조건으로 받았으니 당연히 최선을 다할 수밖에.
“이런, 뭐가 묻었군.”
게빌은 애쉬의 맞은편 소파 자리까지 캐리어를 끌고 와서는 티슈로 겉면의 먼지 한 톨까지 닦아내는 정성을 보였고, 애쉬는 그런 광경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예전에 슬럼에서 차량이 박살 나기 전에도 저런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 적 있었다.
그만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겠지만, 그래서야 험한 전투에 제대로 사용이나 할 수 있을지.
“아주 총알에 스친 자국이라도 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겠어.”
“이 아가에게 그런 짓거리를 벌이는 놈들이 있으면 끝까지 따라가서 복수해줘야지.”
물론, 게빌의 파워슈트는 극도로 작은 나노머신들이 모여 형태를 이룬 것이라 흉이 지더라도 바로 복구하면 그만이었지만, 기분이 나쁘다는 것은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에 따른 대가는 치르게 만들어야지.
캐리어 형태의 파워슈트를 닦으며 기분 좋다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게빌의 모습에 애쉬는 자신도 이번에 선물 받은 검을 한번 볼까 고민했다.
“후우…. 갑자기 연락이 많아지는 게 사장님이 저번에 홍보 하나는 제대로 하신 것 같아요.”
“그래, 계속 이런 식으로 이어지면 둘로도 일손이 부족할 수 있겠어.”
그 물건은 지금 업무에 바쁜 케일과 샤인의 업무용 책상 사이를 지나 저 안쪽 애쉬의 집무실로 들어가면 한쪽 벽면에 잘 거치되어 있을 것이다.
그 희귀성과 값어치만 따지자면 게빌의 나노머신 파워 슈트보다도 더한 물건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애쉬는 애초에 물건을 애지중지하며 사용하는 타입은 아니라 그것을 받았던 첫날과 어디 멀리 나갈 때가 아니면 굳이 꺼내 쥐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케일이 내일부터는 의뢰도 정식으로 수주받을 것 같다던데, 너도 당연히 움직이겠지?”
“봐서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어느새 파워슈트의 먼지 제거를 모두 끝낸 게빌의 말에 애쉬가 적당히 대답했다.
그다지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게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하루종일 놀고먹기만 하기에는 괜히 눈치가 보인다.
‘편하고 빨리 끝날 것 같은 일로 한 달에 몇 개 정도씩 집어서 하면 되겠지.’
어차피 넘쳐나는 게 돈이었고, 일은 하는 시늉만 조금 해주면 될 터였다.
1구역으로 사무소를 이전하고도 슬럼에 있을 때와 기본적인 생각은 바뀌지 않은 애쉬였다.
그렇게 앞으로의 간단한 계획을 세운 애쉬는 잠시 주변을 돌아보다 지금도 이 자리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한 명을 불렀다.
“나와, 린느.”
“…그 여자, 지금도 여기 있는 건가?”
“아마.”
애쉬가 게빌의 꺼림칙하다는 듯한 물음에 대답했다.
애쉬 자신조차 제대로 기척을 감지해내지 못했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자리를 비우고 어디론가 일을 보러 갈 때면 반드시 보고를 하던 린느였다.
최근에는 그런 게 없었으니 지금도 옆에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스르륵.
그리고 그런 애쉬의 예상대로, 린느는 그가 앉아있는 소파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머리칼과 눈동자. 그리고 창백하게까지 보이는 하얀 피부.
몸에 딱 달라붙어 병약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탄탄한 몸매를 드러내는 슈트까지.
그녀는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단한 미인이었지만, 여전히 게빌의 표정은 펴질 생각을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게빌은 애쉬와 린느의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아무것도 몰랐고, 또 어째서 자신들을 습격했던 암살자를 부하랍시고 데려왔는지도 몰랐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그것이 인간을 죽일 만한 독과 가시를 갖고 있다면 꺼려지는 것이 당연한 일.
심지어 한 번 직접적인 위협을 받았던 만큼 그런 느낌이 더했다.
오히려 애쉬와 같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 게 이상한 것이다.
“이리와서 앉아.”
“…….”
애쉬는 그런 게빌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린느에게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고, 린느는 아무 말 않고 그 말에 따랐다.
발걸음 소리 하나 없이 움직인 그녀가 애쉬의 옆자리에 앉는다. 다만 수십 센티 정도 떨어진 자리에.
그에 애쉬는 픽 웃으며 그 자신이 엉덩이를 떼고 린느를 향해 움직였다.
털썩.
애쉬가 린느의 바로 옆자리에 앉자 움찔, 하고 반응하는 그녀의 몸.
애쉬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확인하며 이번에는 소리내어 웃었다.
“프흐,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네.”
“…….”
린느는 그렇게 웃는 애쉬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른 방향을 바라봤지만, 바짝 가시 세운 감각만큼은 어쩔 수 없었는지 애쉬가 숨이라도 자신을 향해 훅 내뿜으면 미세한 떨림과 함께 긴장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벌써 애쉬가 며칠 동안 공들여 그녀를 길들인 지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그때의 충격이 어지간히도 컸는지 그 날 이후로 항상 애쉬가 다가가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그녀였다.
“너무 긴장하지 마. 별다른 일이 없으면 그때처럼 괴롭히진 않을 테니까.”
“…….”
“아, 그리고 앞으로 그 슈트도 어지간하면 입지 말고.”
“어째서…?”
애쉬의 말에 처음으로 돌아온 물음.
그에 애쉬는 길게 설명할 것 없이 한마디 단어로 그 의문에 대답했다.
“그냥.”
“…….”
린느는 다시 한번 침묵에 빠졌다. 다만 이번에는 앞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침묵이었다.
사실 이유라면 여럿 있었으나 그것들을 시시콜콜 설명하기엔 너무도 잡스러웠기에 대충 넘어간 것이다.
별다른 설명이 따르지 않은 애쉬의 명령에도 잠시 침묵하던 린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명령이라면.”
다소 사건이 있어 호르몬과 감정선에 변화가 있긴 했으나, 자신을 닌자로서 유지하려는 그녀였기에 ‘도구는 주인이 원하는 대로 쓰여야 한다’라는 원칙을 어기지 못했다.
그런 린느의 대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애쉬는 과감히 그녀의 허리를 자신의 품으로 끌었다.
“…!”
“이봐, 애정행각은 올라가서 하지그래.”
그런 행동에 린느가 깜짝 놀란 듯 한 차례 몸을 떨고, 게빌이 안 그래도 구겨져 있던 인상을 더욱 구겼지만, 그런 사소한 부분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애쉬는 자신의 품에 들어온 닌자의 체온과 미세한 떨림을 즐기며 푹신한 소파에 몸을 완전히 묻었다.
‘이런 게 인생이지.’
최근 너무 바쁘게 움직인 일이 많아서 그런가, 이렇게 쉬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돈도 많은데 앞으로는 열심히 일하지 말아야지.
소파에 앉아 린느를 데리고 장난치며 다시 한번 다짐한 애쉬였으나 그것은 결코 지켜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인구가 억 단위에 달하는 거대 도시의 중심에 위치한 제 1구역, 그중에서도 막 슬럼에서 올라온 해결사가 차린 사무실에 멀쩡한 의뢰가 들어오기나 하겠는가.
바로 다음 날.
타다당!
“죽여!!”
양아치들 몇을 손봐달라는 의뢰에 따라 목적지로 향한 순간 그를 향해 탄환과 고함이 쏟아졌다.
기습적인 공격이었지만 이미 기척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던 터라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었다.
“피, 피해…?”
단순 양아치인지, 갱인지, 아니면 용병인지 모를 놈들이 그런 그의 움직임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런 시선을 받고 있는 애쉬는 잠시 다른 곳에 신경을 돌리고 있었다.
“나한테 의뢰로 사기를 쳐?”
감히 자신에게 사기를 친 의뢰인을 향해.
‘슬럼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인데, 여기서도 다시 한번 기강 좀 잡아야겠네.’
오자마자 이딴 짓을 당하다니, 확실히 슬럼과는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그의 악명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다.
애쉬는 대체로 귀찮은 일을 불러오지만 이런 방면에서는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는 악명의 필요성을 느꼈고, 슬럼에 이어 몇 년 만에 다시 한번, 이번에는 1구역에 자신의 악명을 되새겨주기로 했다.
“그러니까 우선.”
너희는 죽어라.
빗발치는 탄환 사이를 뚫고 달려나간 애쉬가 단숨에 자신을 향해 총구에서 불을 뿜어내던 놈들 몇을 갈라버렸다.
귀신 같은 움직임과 칼 솜씨.
그것이 슬럼에서 여러모로 유명하고 악명 높았던 ‘미친 칼잡이’라는 별명이 제 1구역 도심에서 다시 한번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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