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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2화 (2/166)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2화

2화. 분기점

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정우였던 시절과는 180도 달랐다.

새하얀 머리칼과 호수 같은 맑은 눈동자.

속눈썹은 길었고 13살의 어린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밝았다.

딱히 표정에 힘을 주고 있는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뜬 눈에서 타고난 기품이 흘러내렸다.

‘이게 나라고?’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거울 속의 하얀 소년은 완벽히 자신과 똑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돌리고, 눈을 깜빡이면 깜빡인다.

거울 밖에는 권정우가, 거울 속에는 유릭 로스카가.

그 두 사람의 기억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뒤섞이며 자신의 머릿속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빙하백가 로스카의 삼남, 유릭 로스카.’

옛 통일제국의 해체 이후 대륙을 좌지우지하는 10개의 대가문 중 하나인 빙하백가 로스카.

그 이름처럼 서리 마나를 사용한 마법이나 검술, 혹은 정령술 등 다방면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는 가문.

검을 쓰는 이도 있고 마법을 쓰는 이도 있고 정령을 부리는 이도 있지만, 어찌 됐든 그 근간에는 서리 마나가 깔려 있다.

하지만 유릭은 그 서리 마나를 한 톨도 쌓을 수가 없었다.

그 탓에 그는 고립되었다.

주위의 비웃음과 멸시도 있긴 했지만, 그보단 주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방에 틀어박혀 아무와도 만나지 않으며 서리 마나를 쌓기 위한 방법에만 몰두하는 나날.

제대로 먹지도 않고, 중요한 행사가 아니라면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정우로서의 삶과 비슷한 면도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권정우의 노력은 작지만 결실을 남겼지만, 유릭의 노력은 실패만 거듭하였다는 정도.

“끄응.”

하지만 아무래도 혼란스럽다.

둘 다 자기 자신이란 건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이질적이다.

그래서 결국 뭐란 말인가?

자신은 권정우로 살아야 하나? 아니면 유릭 로스카로?

사춘기에나 겪을 법한 정체성의 혼란에 머리를 감싸 매고 있으려니 살며시, 그의 감각을 간지럽히는 것이 있었다.

“아.”

그가 고개를 들었다.

고소하고 달콤한 내음과 함께 불현듯 다가오는 깨달음.

“일단 밥이나 먹을까.”

대다수의 쓸데없는 고민은 배를 채우면 해결된다는, 세상의 진리였다.

* * *

변명을 하나 하자면 유릭 로스카는 어떻게든 서리 마나를 쓰기 위해 연구만 하는 방구석 폐인이었다.

운동은커녕 제대로 끼니도 챙기지 않아 삐쩍 말랐다.

즉 배가 고플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와구와구.

무도회장 한쪽에 놓인 테이블에서 유릭이 좌우지간 요리를 입에 넣었다.

뷔페처럼 차려진 음식들을 몇 접시나 가져와 먹는다.

테이블에는, 아니, 이 회장에서 앉아서 식사를 하는 이는 그 하나뿐이었다.

‘다들 바쁘구만.’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는 고기를 씹으며 그가 무도회를 구경했다.

누구는 음악에 맞춰 춤추고 있었고 누구는 술잔 하나를 들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종종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키득거렸지만 별로 신경 쓰진 않았다.

대충 무도회에서 배만 채우고 있다니 품위가 없느니 뭐니 얘기하고 있겠지.

‘다 버려질 거면 먹는 게 낫지.’

누가 뭐라든 일단 내 배를 채우는 게 우선이다.

“후우.”

대충 1라운드를 끝내고 그가 주스로 목을 축였다.

허기가 어느 정도 가시니 조금은 침착해져 온다.

‘유릭 로스카라…….’

주스를 홀짝이며 춤추는 면면들을 바라본다.

시선은 저쪽을 향하고 있긴 했지만 머릿속은 본인에 대한 일로 가득했다.

서리명가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조금의 서리 마나도 쓰지 못했던 아이.

스스로 열등감에 빠져들어 방에 틀어박혔던 유릭 로스카.

여기까지는, 그래, 큰 문제는 없다.

폐인 같은 생활 태도야 앞으로 자신이 바꾸면 되는 문제니까.

다만 그 앞으로의 일이 문제였다.

‘20살 때던가? 아칸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게.’

적마도가 아칸.

로스카와 마찬가지로 대륙의 10대 가문 중 하나이며, 동시에 로스카와 오랜 앙숙인 불꽃의 가문.

유릭이 20살이 되던 해 둘은 기적적인 화친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수십 년을 싸워온 두 가문이 종이 쪼가리 하나로 얌전해질 리가 없었고.

‘서로 직계 하나를 유학 보내기로 했지.’

아칸에선 일곱 번째 공녀가.

로스카에선 삼공자 유릭 로스카가.

말이 유학이지 사실상 볼모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도 괜찮다.

본가인 빙하백가에서도 스스로 고립된 생활을 하던 그였다.

홀로 적대 가문에 떨어진다 하여 딱히 생활이 변하진 않았으니.

‘문제는…… 간신히 맺은 화친이 얼마 가지도 못했다는 것.’

인질의 효과는 길게 가지 않았다.

조약을 맺고 몇 년 지나기도 전에, 두 가문은 기어코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렇게 됐다면 인질의 처우야 정해져 있다.

-유릭 로스카를 처형해라!

본보기를 위한 처형.

그 즉시 적마도가의 병력이 파견됐다.

같은 편 하나 없던 유릭은 어떻게든 홀로 도망을 쳐야 했다.

수많은 기적과 우연이 겹쳐 적마도가의 영역에서 탈출할 수는 있었지만, 추적자는 언제나 따라붙었다.

이름을 바꾸고 신분을 바꾸고.

빙하백가의 삼남에서 일개 용병이 된 유릭은 몇 년에 걸친 도주 생활을 이어오다, 결국 비참하게 목이 잘렸다.

개죽음이었다.

‘파란만장하구만.’

무슨 남 일처럼 말하고 있는 그였으나 절대 남의 일이 아니다.

머지않아 자신에게 펼쳐질 미래.

지금의 자신이 13살이니, 고작 7년밖에 유예가 없는 미래였다.

‘어떻게 한다…….’

그런 고민을 하며 그가 지나가던 시종에게 주스 한 잔을 더 부탁했다.

그러고 남은 고기를 적당히 썰어 입에 넣고 있으려니.

주륵.

뭔가 머리가 차가워졌다.

침착해졌다거나 차분해졌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정말로 말 그대로 차가워졌다.

뚝뚝, 턱을 따라 흘러내리는 액체의 색깔을 보니 자신이 부탁했던 포도 주스였다.

“미안, 미안.”

비아냥거리는 목소리.

돌아보니 잘 아는 얼굴이었다.

유릭 로스카의 기억 속에 확실히 남아 있는 목소리.

“필립?”

필립 로스카.

로스카의 방계 출신으로 2살 많은 친척 형.

좋은 기억은 거의…… 아니, 전혀 없는 녀석이다.

가문 내에서 유릭을 가장 많이 비꼬거나 괴롭힌 장본인.

항상 악담을 내뱉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 구타를 당했던 일도 비일비재하다.

심할 때는 훈련을 시켜준단 핑계로 몬스터 토벌에 데려가더니 위험한 곳에 던져버린 적까지 있었다.

“미안하다. 네가 목말라 한다고 하길래 빨리 갖다 주려다 그만 손이 미끄러졌네?”

필립이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넨다.

정우가 그것을 받으려 손을 뻗으니 휘릭, 녀석의 손에서 손수건이 떨어졌다.

떨어진 손수건은 먹다 만 음식 접시에 떨어져 소스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야야야, 남이 친절을 베풀면 잘 받았어야지. 너 때문에 내 손수건이 못 쓰게 돼버렸잖냐.”

필립이 키득거린다.

뿐만 아니라 아까처럼 멀찍이서 이쪽을 보며 키득거리는 면면도 보였다.

필립의 패거리인 모양이지.

‘…….’

정우가 아주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할까.

그냥 무시하고 화장실로 가는 것도 방법 중의 하나다.

어쩌면 가장 원만히 이 자리를 넘어갈 방법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기왕이면.

‘한번 시험해 보고 싶은데.’

이번 기회에 알아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필립.”

정우가 일어났다.

“왜. 뭐 할 말이라도?”

이죽거리는 필립의 표정이 보인다.

어찌 보면 잘 된 상황이다.

아까 하던 고민 하나를 해결할 찬스.

“먹을 거 가지고 장난질 치지 말라는 건 안 배웠냐?”

“……뭐?”

툭.

정우의 발이 움직이더니 필립의 발을 걸었다.

사각을 찌른 절묘한 타이밍.

어릴 때부터 10년 이상을 단련했던 필립이었으나 정우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헉!”

필립이 몸의 균형을 잃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정우가 그의 뒤통수를 잡아 테이블에 내리쳤다.

쾅!

예의 접시에 코를 부딪쳐 필립이 컥, 비명을 토했다.

어느새 그의 팔을 정우가 꽈악 비틀어 누르고 있었다.

“너 이 새끼……!”

필립이 정우를 밀쳐내고 일어나려 버둥거렸다.

“윽!”

그러자 팔에 격통이 올라온다.

당황하며 다른 각도로 정우를 밀어보려 하였으나 전부 소용없었다.

어떻게 몸을 비틀어도 모두 팔의 고통으로 이어졌다.

그 모습을, 정우가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잘되는군.’

당연히 대한민국의 평범한 시민이던 정우에게 이런 격투 지식 따위 있을 리 없다.

이것은 유릭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것.

적마도가 아칸의 추적을 피해 용병생활을 하며 습득한 전투술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단순히 기억에 남은 것만이 아니다.

‘내가 직접 익힌 것처럼 익숙해.’

단순히 기억을 엿보는 것만으로 기술을 재현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이다니.

역시 유릭 로스카 역시 자기 자신이란 뜻이다.

정우의 인생도 유릭의 인생도 모두 자신의 것.

더 이상 정우는, 아니, 유릭은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비, 비켜, 이 새끼야!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완전히 제압당한 주제에 입은 살아서 나불댄다.

유릭이 버둥거리는 놈의 팔을 잡고는 뒤로 비틀어 올렸다.

금방이라도 뼈가 부러질 듯한 통증에 필립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악!”

곧 죽어나갈 비명이 회장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유릭은 전혀 힘을 풀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소란이 일자 경비를 서던 기사들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러나 유릭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사들을 힐긋 보곤 말없이 필립의 팔을 몇 밀리쯤 더 비틀었다.

“끄아아아아아! 그만! 그마아아안!”

유릭을 떼어내려 달려들던 기사들이 멈칫 멈췄다.

강제로 말렸다간 자칫 필립의 팔이 그대로 부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예 부러뜨려 버렸다면 기사들은 마음 놓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릭은 부러뜨릴락 말락 하는 경계선을 유지하고 있다.

칼날 위와 같은 가느다란 균형을 아주 절묘하게.

“가만있어. 아직 안 끝났으니까.”

경고를 잘 알아듣고 멈춘 그들을 향해 유릭이 태연히 얘기했다.

“예?”

“고, 공자님?”

예상외의 단호한 어조에 기사가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평소의 유릭은 벌레 하나 잡지 못하는 유약한 사내였다.

그런 공자님의 입에서 저런 목소리가 나오다니…….

그러거나 말거나, 유릭은 필립을 보고 있었다.

“필립.”

“뭐, 뭐야!”

필립이 떨면서 대답했다.

그는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팔의 고통에 반쯤 머리가 하얘진 채였다.

“먹어.”

“……어?”

“네가 더럽힌 거. 먹을 걸 함부로 버리면 안 되지.”

필립의 눈앞에 더러워진 접시가 들어왔다.

먹다가 만 고기가 놓여 있는 그 접시는 필립이 쏟은 포도 주스와 손수건까지 얽혀 있어 쓰레기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필립이 무슨 그런 농담을 하냐는 듯이 유릭을 보았으나, 당연히 유릭은 진심이었다.

“귀족의 의무를 알고 있나?”

“배,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

“그 백성들의 귀중한 세금으로 산 고기를 더럽혀 놓고 그냥 버리려고?”

필립이 벙찐 눈으로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기사들은 어찌하지도 못하고 있었고, 그의 패거리들도 멀찍이서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꽈악.

그 와중에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점점 높아져만 간다.

굳이 말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당장 먹지 않으면 분질러 버리겠단 협박.

하지만 어떻게 이런 더러운 고기를…….

뚜둑.

“아악! 아, 알았어! 알았다고!”

결국 필립은 접시에 놓인 고기에 억지로 입을 대었다.

물론 아주 조금, 최대한 더럽혀지지 않은 부분만 조심스레 베어서.

“우우우욱!”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는 역한 구토감을 느끼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평소 깔끔하고 멋들어진 음식만 먹어왔던 그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역하기 짝이 없었다.

유릭은 이 정도로 봐주겠다는 듯 손을 털며 일어났다.

‘몸은 허약하지만 기술은 제대로 남아 있군.’

별 시답잖은 시비였지만 덕분에 조금은 스스로의 현 상태를 확인했다.

이걸로 조금은 광명이 보인다.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그건 비참한 미래를 바꾸어 보이겠다는 결의의 모습이었지만.

“유릭 도련님…….”

기사들 눈에는 당혹스러운 변모로만 보일 뿐이었다.

* * *

무도회장 내에는 날카로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유약하기 짝이 없던 삼공자가 그런 일을 벌일 줄이야!

평소 유릭은 방 밖으로 잘 나오질 않는다.

설령 나오더라도 푹 고개를 숙이고 다니며, 남들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아이였다.

잔뜩 움츠린 채 복도를 지나가다 하인과 부딪혔는데, 상대가 하인인지 확인도 않고 허겁지겁 먼저 사과를 건넸던 일화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랬던 유릭이 필립을 팼다.

로스카의 이름을 받은 방계의 아이 중에서는 가장 뛰어나던 그 아이를.

-대체 무슨 일인가?

-필립 공자가 방심했던 게 아닐까요?

-바보 같은 소리! 방심해서 넘어진 건 사실이겠지만, 그 뒤의 일은 그거론 설명되지 않아!

두 사람이 시비가 붙었단 사실보다도, 유릭이 이겼단 그 사실에 무도회장은 더욱 달아올라 있었다.

모두가 그렇게 떠들어댈 때.

‘후, 추워.’

젖은 머리와 얼굴을 씻고 온 유릭은 홀로 테라스에 나와 있었다.

초저녁의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만 생각해 봤는데 오늘 무도회.’

처음에는 혼란스러워 잘 몰랐지만, 점점 침착해지니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13살에 있었던 이 정도로 대대적인 행사는 그거밖에 없지. 세례 의식.’

로스카의 세례 의식.

직계든 방계든, 13살이 된 로스카라면 누구나 치르는 의식.

선조들의 뜻과 유지가 서려 있는 기연관(奇緣館), 별의 신전이라고도 불리는 그곳에서 세례를 받는 의식이다.

아마 오늘은 그 세례 의식의 전야.

각지에 퍼져 있던 가문의 어른들과 가신들이 모이는 무도회일 것이다.

‘여기가 분기점이다!’

유릭은 민감하게 감지했다.

내일 있을 세례 의식이 가장 큰 분기점이다.

자신의 미래를 완전히 뒤바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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