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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8화 (8/166)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8화

8화. 관두지

일순간이었다.

심판이 시작을 외친 그 순간 대련이 끝났다.

결과는 누가 봐도 일목요연했다.

유릭의 승리.

“유, 유릭 로스카 승!”

바로 방금 시작을 외친 심판이 유릭의 승리를 외쳤다.

그걸 계기로 단번에 소란이 퍼져 나갔다.

유릭이 필립을 이긴 것도 충격이다.

가문의 열등아. 허약한 공자. 방구석 폐인. 그런 이미지였던 유릭이다.

그 유릭이 필립을 일격에 쓰러뜨린 모습은 무척 충격적인 광경이었으나…….

“불꽃!”

화염 마나를 썼다는 사실보다 충격적인 것은 없었다.

“말도 안 돼! 화염 마나라고?”

“저 자식! 재능은 없어도 그래도 어떻게든 서리 마나를 익히려 노력한다길래 조금은 좋게 보고 있었더니…….”

“하필 화염 마나라니!”

빙하백가에서 화염 마나는 금기와도 같았다.

이유는 간단.

대륙의 모든 화염 마나의 종주인 적마도가(家) 아칸이 그들의 숙적이기 때문에.

라이벌이라든가 그런 미적지근한 관계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이고 납치하고 강탈하며, 상대를 멸망시키기 위한 전쟁을 벌이는 상대가 아닌가.

현존하는 모든 화염 마나의 연공법은 그 발상지가 적마도가에 있다.

때문에 화염 마나를 익히는 것은 제아무리 독학이라 할지라도 적마도가의 제자로 들어가는 셈.

……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결코 적지 않았다.

“몇 점? 말도 안 돼! 탈락이야, 탈락!”

베르겐 장로는 그런 강경파 중 하나였다.

피가 쏠려 얼굴이 시뻘게져서 고함을 지르는 베르겐 장로.

무대 위의 유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탈락이요? 어딜 봐서?”

그가 유릭을 손가락질했다.

“네놈은 방금 화염 마나를 쓰지 않았느냐! 땅을 박찰 때 불꽃이 튀던 걸 보았다! 그건 명백히 화염 마나였어!”

베르겐 장로의 말에 좌중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좋지 못한 표정이었다.

“대체 어디서 그딴 되먹지 못한 마나를 익힌 것이냐! 이 신성한 백가에서 화염 마나라니. 용납할 수 없어!”

열을 올리는 베르겐 장로와 다르게 유릭의 표정은 점점 가라앉아 갔다.

‘뭐, 이럴 줄은 알았지만.’

예상대로의 반응이다.

그걸 알면서도 유릭은 불꽃을 드러냈다.

이유는 전에 말했던 것과 같다. 불꽃을 숨기면서 소곤소곤 수련을 할 만큼 자신에겐 시간이 많지 않기에.

때문에 장로는 물론 다른 이들의 반응도 모두 상정 내의 것이었다.

“베르겐 장로. 다시 한번 묻지. 내가 정말 탈락인가?”

더 이상 유릭도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그래! 탈락이다! 1반은 후일 백가의 기둥이 될 아이들! 그곳에 화염술사 따위를 넣을 것 같으냐! 에에잇! 이럴 게 아니라 당장 가주께 달려가 보고 드리겠다! 백가의 긍지를 저버린 네놈에게 벌이 내릴 것이야!”

자신의 불꽃은 가주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니 소용없는 일이다.

하지만 거절의 뜻만큼은 아주 잘 느껴졌다.

험악한 장로의 표정과 다른 이들의 분위기를 둘러보곤 유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관두지.”

“……뭐?”

이 심각한 분위기와 반대로, 너무나 가벼운 어조에 베르겐 장로가 눈을 깜빡였다.

뭐지? 지금은 ‘부탁이니 가주님께만은 숨겨주세요!’라든가 혹은 ‘화염 마나가 뭐 어때서!’라는 식의 말이 나와야 할 때 아닌가?

“관둔다고.”

그러나 유릭이 그런 말을 할 리 없었다.

1반엔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지만 사실 딱히 상관없었다.

그가 1반에 들어가려 했던 것은 배울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1반의 교관들이 무공을 알려줄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대련 상대는 원 없이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오직 그 이유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건 딱히 절실한 이유는 아니다.

이런 반응 속에서 꾸역꾸역 들어갈 필요는 전혀 없다.

‘정 대련이 필요하면 데릭이 있으니까.’

유릭과 데릭은 같은 별궁에서 산다.

마음만 먹으면 대련을 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탁.

유릭이 폴짝 뛰어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곤 베르겐 장로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한 박자 늦게 그 의미를 알아챈 베르겐 장로가 품속에서 추천서를 꺼내 유릭에게 내던졌다.

공중에서 그걸 낚아채곤 유릭이 연무장을 떠났다.

“끄응…….”

남은 교관들과 아이들 사이에선 어색하고 긴장된 공기가 흘렀다.

가문의 직계가 화염 마나를 익혔다.

이 초유의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과연 가주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는지…….

“…….”

그리고 일련의 사건을 본 데릭은 평소와 같이 미간을 찌푸린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선 다른 이들과 같은 험한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한 가지.

이 자리에서 오직 그만은, 필립을 단숨에 쓰러뜨린 유릭의 실력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데릭 공자.”

그런 데릭에게 한 여자아이가 접근해 귓속말을 건넸다.

달콤한 과일 향이 데릭의 코를 간질여 데릭이 불쾌한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공자네 형님분 꽤나 재밌는 분이시네요.”

데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날한시에 태어나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쌍둥이다.

그랬기에 더욱 한심한 녀석이라 생각했다.

지난 13년간 보아온 유릭 로스카는 그런 취급을 받아 마땅한 놈이었으니까.

“잘 모르겠군.”

하지만 요즘은 잘 알 수가 없어졌다.

* * *

어두운 방이었다.

양쪽에 세워놓은 거대한 촛대만이 방을 밝히는 불빛의 전부.

방의 한가운데엔 장지문이 자리하여 방을 나누고 있었고, 그 너머에 거대한 사내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것을 보며 발터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접니다, 태상 가주님.”

태상 가주.

발렌티나가 가주로 오르기 이전의 선대 가주란 뜻이었다.

그것은 즉.

“하하하! 딱딱하게 태상 가주가 뭐냐, 발터야. 파파라고 불러봐라.”

“그 호칭은 10살 때 이미 졸업했잖아요, 아버지.”

발렌티나와 발터의 아버지란 뜻이기도 했다.

선대 가주 레오폴딘 로스카.

“쯧, 그때는 그렇게 귀여웠는데 말이지.”

“지금은 귀엽지 않습니까? 부모에게 아이는 언제까지나 귀여운 아이라던데.”

“귀엽긴. 징그럽다, 자식아.”

아비와 아들 사이의 훈훈한 대화가 몇 차례 오고 갔다.

어찌나 훈훈한지 두어 차례만 더 오고 갔다간 발터가 열이 뻗쳐 장지문 너머로 뛰어들 기세였다.

그쯤에서 서론을 끊고 발터가 찾아온 목적을 얘기했다.

“추천서, 잘 건네줬습니다.”

“그래. 어떻게 되었더냐?”

유릭에게 건넨 추천서.

그건 발터의 뜻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태상 가주인 레오폴딘의 뜻이기도 했다.

기연관을 계기로 무언가 변한 것 같은 손주에게 레오폴딘이 한 번의 기회를 준 것이다.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못 들어갔어?”

레오폴딘이 눈을 찡그렸다.

모처럼 내린 기회를 허망하게 날리다니, 역시 유릭은 변하지 못했단 말인가?

“아니, 말을 잘못했군요. 못 들어간 게 아니라 안 들어갔습니다.”

“음? 무슨 뜻이지?”

발터가 연무장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사실 길게 얘기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많은 일이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크하하하! 고 맹랑한 놈이로고!”

이야기를 모두 들은 레오폴딘이 크게 광소했다.

평범한 아이라면, 아니, 평범하지 않은 아이일수록 더욱 1반의 이름에 집착할 텐데.

1반을 졸업한 아이들은 후일 빙하백가의 어느 부대라도 들어갈 수 있다.

원하기만 하면 모든 부대에서 받아준다.

스스로의 뜻을 펼치기 위한 가장 좋은 등용문이란 뜻이었다.

아이들의 세계에선, 무엇보다 높은 긍지와 영예를 갖춘 이름.

그런데 그것을 미련도 없이 헌신짝 버리듯 버릴 줄이야!

“유릭이 화염 마나를 익힌 것은 어찌…….”

발터가 침잠한 표정으로 그리 물었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 달리 레오폴딘은 그런 것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놔둬라. 그럴 수도 있지.”

“하, 하지만 가문의 본이 서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백가의 긍지를 더럽혔다는 장로의 말이 딱히 틀린 얘기도 아닙니다.”

발터가 반박했다.

그라고 해서 딱히 귀여운 조카를 몰아세우고 싶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인 만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후우. 발터.”

“예.”

걱정이 가득한 발터에게 레오폴딘이 타이르듯 얘기했다.

“서리 마나에 그토록 재능이 없어 방에 틀어박혔던 아이가 아니더냐. 화염 쪽에 재능이 있었던 듯한데, 이제라도 재능을 깨달은 것을 축하해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느냐?”

“하지만 가문의 기강이…….”

“기강이 뭐 어쨌단 말이냐. 그거 하나 가지고 우리 로스카가 흔들릴 것 같으냐?”

레오폴딘의 어조는 단호했다.

“오랜 방황 끝에 겨우 길을 찾은 아이다. 그런 아이의 길을 짓밟고 기강을 세워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얄팍한 가문을 누가 존경하고 따르겠느냐?”

“……맞습니다.”

발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까지 우려를 표하던 그의 얼굴은 조금 밝아져 있었다.

이걸로 이 얘기는 끝이었다.

레오폴딘이 분위기를 환기하듯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1반을 거부했다라……. 그래, 시간 되면 네가 신경 좀 써주고 그러거라. 그 아이도 나름 생각이 있겠지만 어른의 조언이 필요할 때도 있지 않겠느냐.”

“저도 바쁩니다만.”

“발렌티나가 폐관에 들어갔는데 뭐가 바쁘단 말이냐.”

발터는 발렌티나의 호위.

그리고 가주의 폐관실은 가문 내에서도 가장 안전한 곳이다.

그 말은 지금은 발터가 가장 한가한 시간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누님을 돌보랴, 이렇게 아버지 심부름도 하랴, 기사단 일고 있고 뭐 이래저래 바쁘단 말입니다.”

“그래서 싫다고?”

“저 말고 아버지가 잘 보살펴 주시지요.”

발터가 씨익 웃으며 얘기했다.

“맹랑한 녀석 같으니라고. 기어코 이 늙은이를 끌어들이겠다?”

“원래 아버지 나이 때는 손주 재롱이나 보면서 지내는 게 행복한 겁니다.”

발터가 어깨를 으쓱이며 인사를 하고는 방을 떠났다.

“흐음.”

발터가 떠나고 레오폴딘이 방에 혼자 남았다.

그가 거친 수염이 자란 턱을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불이라……. 과연, 초대의 불꽃을 계승했나.”

선대 가주인 그는 당연히 초대가 얼음과 불을 모두 다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유릭은 기연관에 들어간 후 불꽃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연일 리 없다.

필시 초대의 불의 능력을 계승했단 뜻일 터.

“재밌어지겠어.”

가문이 세워진 후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던 초대의 불꽃.

그것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레오폴딘은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더욱 그를 즐겁게 했다.

* * *

2년이란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한때 베르겐 장로가 몇 번이고 가주를 알현해 열변을 토했단 얘기가 돌았지만, 유릭의 일상에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평화로운 매일.

“들었나? 이번에 베일 협곡 쪽에서 습격이 있었다고 하는데.”

“또 적가 놈들인가?”

이 무렵 가문 내에는 그런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격해져만 가는 빙하백가와 적마도가의 대립.

그러나 모두 가문 바깥의 이야기다.

안전한 가문 내에서만 지내고 있는 유릭과는 다소 먼 이야기였다.

물론.

‘5년 남았나.’

앞으로 5년 후에 있을 볼모 선정만 없다면 말이다.

그 일이 있는 이상 유릭은 외부 소식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좌우지간 힘부터 길러야 한다.’

그날을 대비해 유릭은 오늘도 빠짐없이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높이 뜬 태양과 우거진 수풀.

유릭이 향한 곳은 뒷산에 위치한 봉우리였다.

엘드가르드 산맥의 봉우리 중 하나인 백월봉.

2년 전부터 유릭이 마음에 들어 하여 자주 찾아오는 그만의 수련장이었다.

“후우…….”

유릭이 습관처럼 운기를 시작한다.

2년 전 이미 한 바퀴의 소주천을 돌리는 데 2시간이 걸렸던 유릭은, 지금은 30분 이내에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몇 차례 운기를 거친 후 눈을 떠보니 주변 풍경이 많이 변해 있었다.

“또 왔네, 이것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혼자였다.

그런데 염화신무의 운기를 하고 나자 다양한 이들이 주변에 몰려들었다.

새와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들부터 시작해서, 사슴이나 곰과 같은 대형 동물들.

그리고, 대낮의 반딧불처럼 반짝거리는 존재들.

‘숲의 정령.’

유릭의 지식이 맞다면 저건 정령들이었다.

다만 특별한 형상을 띤 것이 아닌 빛무리 정도인 걸 보니, 가장 하급의 개체인 모양.

저런 정령은 상위 개체와는 많이 다르다.

자아도 인격도 없는 단순한 현상 비슷한 것이라 하였다.

‘숲의 정령들은 불과는 상극이라 들었는데.’

단지 의아한 점은 그 부분이었다.

숲의 정령은 본능적으로 불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다른 동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이 있으면 피하는 것이 짐승의 본능일 텐데.

‘왜 운기만 하면 모여드는 거지?’

그런데 자신이 염화신무를 운기하고 있으면 자연스레 모여든다.

마치 볕을 쬐는 고양이처럼 늘어지며 골골거린다.

불의 마나를 숲의 존재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아는 유릭으로선,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염화신무의 내기는 평범한 불의 마나랑은 다르다는 건가.’

지금 알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었다.

아마 더욱 경지가 오르지 않고서야 이 비밀을 풀 수는 없으리라.

주변을 날아다니는 정령들과 태평하게 휴식을 취하는 동물들.

그 따사로운 공간에서 유릭이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을 자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시 운기를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저벅.

그런데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공기가 차가워지며 긴장감을 띠기 시작한다.

정령들이 흩어지고 동물들도 냉큼 일어나 후다닥 달려 나갔다.

“후.”

유릭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을 맞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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