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0화
10화. 녹시아
유릭의 머릿속에는 염화신무의 비급이 그대로 들어 있다.
하지만 영혼에 새겨져 있는 기억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정우로서 읽었던 책, 유릭으로서 읽었던 책.
회귀 전에 읽은 모든 책의 페이지가 그의 영혼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아마 제대로 정우의 몸으로 회귀를 했다면 수능 만점은 물론이고, 대학 성적도 간단히 올 A+을 맞을 수 있었겠지.
<외우주>의 이름 모를 노인이 베풀어준 힘.
그것은 기억상실이나 건망증 따위로 잊거나 묻히거나 할 수 없는 상위 차원의 각인이었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적마도가에서 읽었던 마법서가 그대로 있단 말이지.’
적마도가에서 볼모로 있던 시절 읽었던 마법서도 스캔본처럼 선명히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물론 모든 마법서를 다 본 건 아니지만.’
볼모 신분인지라 비전이나 고위의 화염 마법서 같은 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적당한 수준의 것들은 생각보다 많이 열람할 수 있었다.
개중에는 모든 화염 마법사들이 익히는 기본 마법은 물론, 시중엔 돌아다니지 않는 다소 희귀한 서적도 있었다.
그 기억을 바탕으로 마법을 수련한다.
당장은 기초 마법 중에 가장 위력적인 <파이어 볼트>부터.
쾅!
쾅!
그가 방출한 내기가 손에서 주문의 띠를 만들어 원을 그린다.
그 사이에서 불꽃이 뭉쳐지며, 불꽃 화살을 쏘아낸다.
튕기듯 날아간 그것은 바위에 박히며 드릴과 같은 상흔을 남겼다.
“후우.”
생각보다 쉽지 않은 마법이다.
불꽃의 속성을 불러들여 화살의 형태로 만드는 것 정도는 쉽다. 그건 1성의 마법사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포탄처럼 쏘아지는 추진력.
비거리와 관통력을 늘리기 위한 회전.
거리가 멀어져도 열기가 사그라지지 않게끔 하기 위한 안정화 작업.
그밖에도 이 한 대의 화살을 더욱 강력히 만들기 위한 추가 술식이 여럿 필요하다.
여기까지 오면 1성의 마법사 정도론 흉내도 내기 힘든 수준이다.
‘그래봤자 2~3성 정도지만.’
유릭이 쓴웃음을 지었다.
거창하게 얘기하곤 있지만 4성 이상의 마법에 비할 건 아니다.
그래도 3성 이하의 마법 중에서 기본기로 사용하기론 이보다 좋은 마법은 없었다.
때문에 유릭은 날마다 <파이어 볼트>의 단련을 빼먹지 않았다.
‘어쩌면 벽에 막힌 염화신무를 뚫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고.’
염화신무는 여타의 검술이나 창술과 같은 무술과는 달랐다.
정해진 검로나 구체적인 초식이 없다.
그곳에 있는 건 두루뭉술하고 뜬구름 잡는 것만 같은 무(武)의 묘리뿐이었다.
그 묘리를 어떻게 받아들여 해석하는지는, 오로지 유릭 자신의 몫.
‘무슨 무기를 쓰든 적을 제압하면 되는 일이니까.’
당장은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사용하는 것이 검이든 창이든, 혹은 방패나 활이라도 상관없다.
염화신무란 불의 기운을 통해 펼치는 무(武) 그 자체.
그렇다면 사용하는 무기가 검이 아니라 ‘마법’이라도 괜찮겠지.
쾅!
유릭이 계속해서 불꽃 화살을 쏘며 수련을 이어갔다.
그러나 썩 만족스럽지 않은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위력과 속도는 부족함이 없다.
오히려 이 마법 하나만으로도 전투1반 정도는 대번에 합격할 정도로 완성도 높은 마법이었다.
문제는.
“에임이 좀…….”
명중률이 많이 들쑥날쑥했다.
마법의 문제는 아니다.
애초에 고위 마법이 아니고서야 적을 추적하는 술식 따위는 넣을 수 없다.
추적 술식은 그것만으로 고위에 속하는 술식이다. <파이어 볼트> 정도에 짜 넣기엔 배보다 배꼽이었다.
‘결국 내 문젠데.’
하위 마법의 명중률은 오롯이 마법사 본인의 문제.
즉 유릭의 숙련도 문제였다.
“크릉.”
언제 온 것인지 바위 위쪽에서 하얀 호랑이가 유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대령. 지금 비웃는 거야?”
손을 털어 불꽃을 흩어내며 유릭이 물었다.
대령이 이를 보이며 웃었다.
원하는 곳을 제대로 맞추지도 못하는 유릭에게 보내는 비웃음이었다.
“한판 하자 이거지.”
대령이 전의를 태우며 폴짝 바위 아래로 내려왔다.
유릭이 다시금 주문의 띠를 자아냈다.
아까의 <파이어 볼트>와 같은, 그러나 불의 기운 만큼은 최대한 억제한 마법이었다.
숲에 불이라도 붙으면 안 되니까.
대령의 자세가 낮아지며 다리 근육이 부푼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게 시작의 신호였다.
쾅-!
쏘아진 내기의 탄환이 대령을 꿰뚫었다.
그러나 그건 잔상일 뿐, 옆으로 뛰어 피한 대령이 유릭에게 달려왔다.
몇 달 전부턴가 시작된 둘의 경기.
서로 충분히 거리를 두고 시작을 하며, 대령이 유릭에게 도착하기 전까지 유릭이 마법으로 그를 맞추는 경기다.
참고로 수개월 동안 유릭은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쾅-!
또다시 내기의 탄환은 애꿎은 흙만 파헤칠 뿐이었다.
유릭이 혀를 찼다.
‘내가 원래 총 게임 같은 것도 못 하긴 했는데.’
한때 관심을 가진 적은 있지만, 너무나 처참한 에임 탓에 바로 접었다.
그 후로 어떤 게임을 하더라도, 설령 RPG를 하더라도 원거리 캐릭터는 고르지 않았던 그였다.
조준 따위 필요 없는 근접 캐릭터만 골랐지.
쾅!
쾅!
쾅!
그 뒤로 세 번의 탄환을 더 쏠 기회가 있었다.
대령은 지그재그로 날렵히 움직이며 그 모두를 피해냈다.
그리고 한달음에 달려와 그대로 유릭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그게 골인의 표시.
대령의 승리였다.
골인을 할 때까지 쏘았던 5발의 화살이 모조리 빗나갔다.
아까웠던 적조차 없었다.
“크릉.”
그 정도론 어림도 없다는 듯 대령이 고개를 쳐들며 웃었다.
유릭이 끄응 신음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뭔가 획기적인 개선 방법이 없을까.’
이 문제만큼은 검과 같이 맹목적인 단련만으론 해결할 수 없어 보인다.
유릭이 팔짱을 끼곤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그날 저녁.
해가 떨어져 산에서 내려온 유릭은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방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나다. 방에 있나?
데릭의 목소리였다.
유릭이 일어서 문을 열었다.
“웬일이야?”
먼저 방에 찾아오다니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같은 별궁에 살고 있다지만 둘은 마주치는 일조차 적었다.
가끔 야외 수련장에서 우연히 만날 때 말고는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탁.
데릭이 검 한 자루를 쥔 손을 유릭의 가슴께에 내밀었다.
유릭이 엉겁결에 그것을 받았다.
“설욕전을 신청한다. 설마 거절하진 않겠지?”
대련의 요청.
데릭이 절대 거절할 수 없다는 눈으로 유릭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2년 전엔 내가 억지로 선빵을 갈겼던가.’
싫다는 녀석한테 먼저 주먹을 날렸었지.
자신은 그런 식으로 대련을 걸어놓고 이제 와서 거절하는 건 조금 양심에 찔렸다.
뭐 애초에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언제나 환영이지.”
매일 아니스와의 격렬한 대련을 벌이는 유릭이었으나, 그럼에도 대련은 언제나 환영이다.
그만큼 그는 강함에 목말랐다.
두 사람이 야외 수련장으로 향했다.
데릭이 앞장서고 그 뒤를 유릭이 따랐다.
“이 검은 뭔데?”
유릭이 방금 받은 검을 살짝 뽑아보며 물었다.
약간만 뽑아도 느껴졌다.
상당한 검이었다.
“보검 녹시아다. 날도 날이지만 특히 단단하기로 유명한 검이지.”
“오.”
보검이라니 굉장히 귀한 물건이었다.
흔히 검이라고 하면 마검, 신검 종류를 최상으로 친다.
그 아래가 바로 보검.
마검과 신검이 오랜 역사와 위업에서 오는 마력이 새겨진 물건이라면, 보검은 그것들을 따라잡기 위해 장인이 두드린 검이다.
그러나 어떤 훌륭한 장인일지라도 세월이 부여하는 힘을 따라잡을 순 없는 법.
마검, 신검에 비해 확실히 격은 떨어진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충분히 귀한 보물이다.
이런 보검들이 대개 위업이나 오랜 역사를 거쳐 마검, 신검 등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니까.
“어디서 난 거야, 이런 걸?”
“예전에 어머니께 하사받았지. 이솔렛에 부러지지 않는 보검이다.”
“…….”
어째서 이 검을 건넨 것인지 유릭이 납득했다.
평범한 검은 이솔렛에 닿는 것만으로 산산이 부서진다.
그러면 대련이 성사되지 않을 테니, 그걸 막을 수 있는 단단한 검을 가져왔단 뜻이리라.
그건 즉.
“진검으로 하자는 말이군?”
“그래.”
녀석은 이솔렛을 들고 설욕전을 치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솔렛 앞에서 평범한 검을 든 유릭을 이겨봤자 의미가 없으니 보검 녹시아를 가져온 것이고.
스릉-
유릭이 검을 뽑으며 검집을 휙 던져 버렸다.
녹시아의 서늘한 날에서 풍겨오는 기운이 단번에 투지를 끌어올린다.
자고로 훌륭한 검이란 뽑는 것만으로 사용자를 전장 한복판에 떨구는 법.
데릭이 역시 차분히 검을 뽑았고 그 순간 분위기가 돌변했다.
이솔렛의 냉기가 자욱이 진을 치며 데릭의 형상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
먼저 공격한 것은 데릭이었다.
냉기 속에서 그가 사라지나 싶더니, 유릭의 옆에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유릭이 녹시아를 휘둘러 그 검격을 막았다.
쩌엉-!
순간 거대한 파공음과 함께 둘의 검이 살짝 떨어졌다.
데릭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검을 찔러 들어갔다.
녹시아의 검로를 틀어막으며 자신은 찔러 들어가는 절묘한 공격이었다.
공격과 수비를 동시에 펼치는 극도로 합리적인 검술.
‘이겼다.’
데릭의 눈동자에 승리가 깃들었다.
데릭은 이 대련을 오래 끌 생각이 전혀 없었다.
‘녹시아는 움직이지 못해. 그렇다고 검을 놓고 뒤로 뺄 수도 없을 테지.’
단 한 수로 끝낸다.
지난 2년간 이 설욕전을 위해 준비한 이 필사의 일격으로.
유릭 역시 데릭의 수를 눈치챘다.
확실히 녹시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솔렛은 이쪽으로 뻗어오고 있다.
그에 맞서 유릭은.
“생각 좀 했네.”
피식 웃으며 왼 주먹을 쥐었다.
상체를 틀어 이솔렛을 피한다.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검이 옷을 베고 얇게 생채기를 내었다.
그렇게 튼 상체를 비틀며 그가 주먹을 내질렀다.
“소용없어!”
데릭이 빗나간 검을 그대로 내려그으며 소리쳤다.
복부에 주먹 한 방? 얼마든지 맞아주지. 그 정도에 쓰러질 만큼 약하게 단련하지 않았다!
이솔렛을 당겨 그으며 그가 배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도 무색하게.
<파이어 볼트>.
유릭이 복부를 가격함과 동시에 왼 주먹에 준비한 마법을 발동시켰다.
콰앙!
“커헉!”
지근거리에서 폭발이 일며 데릭의 몸이 나가떨어졌다.
그냥 마나가 실린 주먹질 정도가 아니다.
바위도 파내는 마법이 작렬한 것이다.
유릭 역시 무사하지만은 않았다.
손목에서 뻐근한 고통이 올라오며, 반동으로 그 역시 두세 걸음 물러나야 했다.
수련장에 대자로 엎어진 데릭이 멍한 얼굴로 하늘을 보았다.
손엔 차가운 이솔렛을 굳건히 쥐고 있었지만 복부에서 올라오는 화끈한 고통은 지울 수 없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왼쪽 손목을 빙빙 돌리고 있는 유릭이 보였다.
“미친놈! 마법을 그렇게 쓰는 사람이 어디 있어!”
데릭이 얼굴을 구기며 얘기했다.
파이어 볼트는 폭발하는 마법이다.
그걸 0거리에서 썼으니 사용자에게 데미지가 들어가는 게 당연하다.
너무도 비효율적인 사용 방법이었다.
“그래서 허를 찌를 수 있었잖아?”
“…….”
하지만 유릭의 말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래서 정통으로 한 방 먹었다.
데릭은 유릭이 화염 마나를 익힌 것을 알고 있다.
당연히 화염 마법을 쓸 걸 알았고, 그에 대한 대비도 해놓았다.
하지만 그건 모두 멀리서 마법을 쏠 때를 대비한 것이었지, 주먹질을 하며 터뜨릴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멀리서 쏴봤자 안 맞는데 어떡하냐.”
유릭이 투덜거리며 얘기했다.
나름 고민의 결과였다.
멀리서 쏴봤자 잘 맞출 자신이 없다. 그렇다면 그냥 붙어서 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폭발 마법인 만큼 위력적인 동시에 리스크도 크다.
실제로 이렇게 쓰는 건 두 번 정도가 한계였다.
거기서 더 쓰라고 하면 손의 뼈가 아자작 부러져 버릴 질도 모른다.
‘내 몸이 받는 데미지는 앞으로 해결할 과제로군.’
좀 더 궁리를 하거나 적당한 도구를 얻거나 하면 극복할 수 있으리라.
유릭은 오늘의 성과에 나름 만족했다.
반대로.
“……졌다.”
데릭은 입술을 씹으며 그리 얘기했다.
그리고 검을 검집에 넣곤 그대로 수련장을 뒤로했다.
“뭐야, 한 판으로 끝이야? 야, 야! 이건 안 가져가?”
데릭은 대답하지 않고 터벅터벅 사라졌다.
유릭의 손에는 데릭이 건넨 보검 녹시아가 들려 있었다.
‘나 주는 건가?’
녹시아의 형형한 검신을 보며 유릭이 눈을 빛냈다.
‘짜식.’
귀한 검을 얻어서인지 마법이 잘 써져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기분 좋게 웃으며 그가 녹시아를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