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2화
12화. 죽어라
‘여기도 오랜만이군.’
한 발자국 들어가니, 그 순간 전혀 다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단 한 걸음 차이로 푸르렀던 하늘이 검게 물든다.
밤하늘에 펼쳐져 있는 것은 아름다운 보랏빛 천.
오로라였다.
하늘을 덮고 있는 보랏빛 오로라.
얼어붙은 대지가 그 빛을 반사하며 신비로운 공간을 자아내고 있었다.
칠색의 마경의 가장 초입.
자색 지대.
‘서리 마법 없이 올 수 있는 유일한 구역.’
과거 자신은 이 자색 지대 이상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서리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일반인이 버틸 수 있는 구역은 이곳이 마지막.
이 앞의 남색 오로라가 펼쳐진 남색 지대부터는 서리술 없이 버티지 못한다.
한층 더 거세진 추위에 입술이 얼어붙고 심장이 멎어간다.
물론.
-화륵.
반드시 서리 마법일 필요는 없다.
어떤 방법이든 추위만 버티면 되는 일이니까.
단전에 있는 3성의 염화신무가 고동치며 전신의 세맥으로 따스한 내기를 돌린다.
살을 엘 듯한 바람에도 유릭은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포근하기까지 했다.
‘일단 사람들 뒤를 따라가자.’
온기를 되찾은 유릭이 인파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자색 지대에서 사냥을 할 일부 인원을 제외하곤, 모두 더욱 깊숙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다음 구역인 남색 지대를 목표로 하는 전투1반도 있었다.
‘아이들 수준이면 남색 지대 정도가 한계일 테니까.’
그 남색 지대에서 출몰한다는 아이스 골렘.
그 마물은 남색 지대에서도 특히나 강력한 마물이다.
특징은 그저 거대하고 단단할 뿐.
얼음 가시를 쏘아 보내지도 않고 냉기의 숨결을 뿜어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단순한 특징만으로 청색 지대의 마물과 비견할 정도의 강한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을 사냥하겠다니…….
‘그럼 청색 지대의 가까운 곳까지 가겠군.’
마침 운이 좋았다.
유릭이 편안하게 1반의 뒤를 쫓았다.
덕분에 청색 지대 근처까진 마물들과 싸울 일 없이 편안히 갈 수 있을 것이다.
1반의 아이들이 다 길을 뚫어줄 테니까.
“장로님. 따라오고 있는데요.”
“하이에나 같은 놈 같으니. 어떻게든 주워 먹을 게 없을까 따라오는 것일 테지.”
멀찍이서 따라오는 유릭을 보고 베르겐 장로가 콧잔등을 씰룩였다.
재수 없는 자식.
2년 전부터 느꼈다. 유릭은 자신이 싫어하는 발터와 꼭 닮은 건방진 놈이었다.
“신경 쓰지 마라! 우린 우리 할 일만 하면 된다!”
곧 그가 아이들을 보고 그렇게 얘기했다.
베르겐 장로와 달리 유릭에게 별반 감정이 없는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곤 길을 뚫기 시작했다.
앞을 막는 마물들을 얼리고 베어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의 목적지는 남색 지대.
정확히는 아이스 골렘이 발견된 남색 지대와 청색 지대의 경계선 부근이었다.
이내 보랏빛 오로라가 사라지고 군청빛의 오로라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마저 옅어지며 푸른빛 오로라와 맞닿는 경계선에 다다랐다.
아이스 골렘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이 근방이라고 했으니 금방 찾을 게다! 각자 흩어져 탐색하도록!”
“예!”
그렇게 지시를 내리고 베르겐 장로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유릭은 보이지 않았다.
“흥, 제 주제를 알고 자색 지대로 돌아간 모양이군.”
그가 이죽거렸다.
이럴 줄 알았다.
칠색의 마경은 구역을 넘어갈수록 버티는 것이 몇 배로 힘들어진다.
자색 지대에 비해 남색 지대는 훨씬 더 기온이 내려가, 어지간한 실력 없이는 숨 쉬는 것조차 고통인 곳이었다.
그들 1반의 아이들도 오랜 시간은 버틸 수 없는 곳.
그 시건방진 유릭 따위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 시각.
“블루 마운틴이 어디지. 청색 지대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 들었는데.”
유릭은 이미 남색을 넘어 청색 지대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인 블루 마운틴의 유적을 찾기 위해서.
* * *
블루 마운틴은 청색 지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이곳은 온통 얼음과 바다밖에 존재하지 않는 남극과도 같은 지형.
가장 높은 산은 그것만으로 좋은 표식이 되어주는 지형이었다.
그 블루 마운틴에서 미발굴 상태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성인식 때쯤이었나.’
물론 회귀 전의 이야기로 자신이 18살이 되어 성인식을 치를 무렵의 일이었다.
‘가문의 조사단이 몇 달 동안 발굴 작업을 했었지.’
당시 유릭은 청색 지대에 발도 들이지 못하는 몸이었다.
그래서 직접 보진 못했지만, 발굴 과정은 충분히 전해 들었었다.
혹시 그곳에서 자신에게 서리마법의 재능을 안겨줄 보물이 발견되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했었지.
‘그런 건 없었지만.’
그곳에서 발견된 것은 과거 시대의 평범한 유물들뿐이었다.
낡은 식기나 헤진 서적들이나 그런 것들 말이다.
‘그래도 단 하나.’
쓸모 있는 유물이 하나 발견되었다.
이번 유릭의 목표는 바로 그 유물이었다.
‘이쪽인가?’
블루 마운틴에 도착한 유릭은 바로 유적이 발견된 곳으로 향했다.
산의 뒤편, 깎아지를 듯한 낭떠러지.
그곳에 유적으로 통하는 동굴이 있다 하였다.
‘여기다.’
이윽고 입구를 발견한 유릭이 조심스레 낭떠러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몸에 끈을 매어 위쪽에 단단히 묶어둔다.
그걸 의지하여 껑충껑충 절벽 아래로 내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간쯤 위치한 동굴 입구에 도착한 유릭이, 자그마한 불꽃 하나를 띄웠다.
크기는 작지만 굉장한 빛을 뿜어내는 그 불꽃은, 컴컴한 동굴 속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가보자.’
유릭이 조심스레 동굴 안쪽을 향했다.
* * *
칠색의 마경은 본래 인간의 땅이 아니다.
마신을 추종하는 칠색의 마왕의 영토였던 곳.
당연히 이 마경엔 마왕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악마들도 있었고, 그 악마들이 부리는 지성 없는 마수들도 가득했었다.
마신이 토벌되는 과정에서 마왕도 그를 따르는 악마들도 모두 토벌되었지만, 사악한 영토만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
그리고 과거 그들이 살았던 흔적 역시도.
“…….”
유릭이 눈을 빛냈다.
거대하고 웅장한 저택.
천 년 전의 유적이 그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마왕의 문양!’
그 저택에는 기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거대한 얼음 덩어리를 감싸고 있는 일곱 머리의 괴조가 그려진 문양.
칠색의 마왕 크레마뉴를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그렇다고 마왕 본인의 유적은 아니지만.’
물론 마왕의 유적은 아니다.
이곳은 청색 지대다.
자색 지대에 비하면 꽤 깊은 곳이지만, 마경 전체로 보면 아직도 초입.
마왕의 유적이 발견되기엔 마경의 중심지에서 지나치게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유릭은 실망하지 않았다.
“어쨌건 마왕의 문양을 달고는 있으니까.”
마왕의 문양은 아무나 내걸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왕의 측근이라든가, 아니면 능력을 인정받은 고위의 악마라든가, 무슨 공적을 세웠다든가.
아무튼 마왕의 눈에 들 정도로 대단한 녀석들에게 하사되는 것이었다.
즉 최소 고위 악마 이상의 물건.
그렇기에 마경에서 마왕의 문양이 그려진 유적이나 유물은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근데 그런 것치곤 별게 없긴 했단 말이지.’
그 부분이 조금 의아하긴 했으나 뭐 상관없다.
하나라도 얻을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유릭에겐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
그런데 유적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막는 것이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그것을 느끼곤 유릭이 바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녹시아의 손잡이를 가져다 대보았다.
“바람?”
강풍이 건물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 어린 몸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을 만한 풍속이었다.
‘이쪽은 바람 한 점 안 부는데.’
제어력이 대단한 결계였다.
한 걸음만 물러나도 바람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직접 들어가려 하기 전까지 바람 결계가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뭐 대단한 건 대단한 건데…….
‘어떻게 들어가지?’
그 대단한 걸 어떻게 돌파하느냐가 문제다.
더 단련하고 오면 억지로 밀고 들어갈 수도 있을 거 같긴 한데, 그때까지 묵혀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반드시 회귀 전처럼 18살에 발견되리란 보장도 없다.
미래는 언제나 변하는 법.
그전에 누군가가 발견해서 채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민을 하던 유릭이 건물 주위를 돌며 자세히 관찰을 시작했다.
혹시 결계의 핵이 되는 물건이 있지 않을까 싶어.
“아.”
그리고 찾아냈다.
건물의 뒤편, 다 무너져 내린 창문 너머의 방에 수상쩍은 마법진이 보였다.
바람은 그곳을 중심으로 퍼져 나오고 있었다.
‘저거군.’
유릭이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팔을 들었다.
염화신무의 불꽃이 그의 팔을 감싸며 피어올랐다.
유릭이 세심하게 조준을 맞춰, <파이어 볼트>를 쏘았다.
콰앙!
폭음과 함께 발사된 불꽃의 화살이 결계를 뚫고 나아간다.
그대로만 나아간다면 창문을 뚫고 바닥 채로 마법진을 부숴버릴 위력이었다.
아무리 명중률이 좋지 않은 자신이라도 저만큼 표적이 크면 대충은 맞출 수 있다.
빗맞으면 맞을 때까지 쏘면 그만이고.
-휘잉!
그러나 나아가질 못했다.
유릭이 쏘아 보낸 불꽃은 창문만 슬쩍 건드렸을 뿐, 바람에 휘말려 하늘 높이 흩어졌다.
‘그냥 해선 안 되나.’
유릭이 눈을 찌푸리며 몇 차례 더 <파이어 볼트>를 쏴보았다.
그러나 모두 실패.
가장 멀리 간 것이 창문을 부수긴 하였으나 결국 방 안에서 흩어져 사라졌다.
‘이걸론 안 되겠어.’
평범한 불꽃으론 안 된다.
유릭이 무지성으로 쏘아 보내던 <파이어 볼트>를 멈추고 그대로 기운을 손바닥에 모았다.
그것을 가다듬어 손가락 끝에 모았다.
‘일단은 작게.’
유릭의 팔을 덮으며 피어오르던 불꽃이 작게 압축되기 시작했다.
조그맣게, 더 조그맣게 줄어드는 불꽃이 유릭의 손가락 끝에 맺혔다.
단순히 작게만 만든 것이 아니다.
내기의 형질을 단련하여, 그것은 불꽃임에도 강철과 같은 단단함을 가지고 있었다.
<연화지(蓮火指)>.
그의 손가락 끝에 작게 정제된 화염의 탄환이 만들어졌다.
“이걸로도 안 되면 답이 없는데.”
<연화지>는 마법이 아닌 무공.
염화신무의 비급에 기록된 기술 중 하나다.
이것은 그가 익힌 마법과 무공 모두를 통틀어서 가장 파괴력이 낮다.
사거리는 어느 정도 되었으나 폭발력과 확산 능력이 아예 없다시피 했다.
그 대신 관통력 하나만큼은 제일이다.
눈앞의 바람의 결계를 뚫고 마법진을 훼손하기에 딱 어울리는 기술.
다시 말해 이게 실패한다면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만.
…….
콰직!
다행히 성공했다.
한 번에 성공한 것은 아니고 바람에 흔들리는 조준점을 잡기 위해 다섯 번 정도를 쏘긴 했지만, 그래도 성공은 성공이었다.
마법진의 한곳에 손가락만 한 구멍이 뚫렸다.
양궁의 과녁이라 생각하면 5점이나 간신히 받을 위치였지만 상관없다.
마법이란 극히 섬세하다.
술식을 조금만 훼손해도 심하게 어그러지게 마련이었다.
-사아아…….
주위를 감싼 바람이 점차 잦아들었다.
유릭이 씨익 웃으며 유적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유적이라고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고대의 신전이나 그런 것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저택.
아니, 폐허가 된 저택과 같았다.
마신과 마왕이 건재하던 천 년 전, 한 고위 악마가 살았던 저택이겠지.
시대의 차이는 느껴지지만 주거를 위한 공간이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때.
-콰앙!
“……!”
1층 홀에 발을 들이니, 방금 열고 온 정문이 갑자기 쾅 닫혔다.
동시에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촤르륵!
어디 구석에 쌓여 있던 것인지, 책과 찢어진 종이들이 홀 안에서 강하게 소용돌이쳤다.
유릭이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곤 금방이라도 뽑아 들 듯 녹시아의 손잡이를 잡은 채, 이 기현상을 관찰했다.
-드디어 사람이 찾아왔구나. 오랜 세월을 기다렸다.
바람이 뭉친 곳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연녹빛의 빛.
그 녹빛의 바람이 뭉치더니 사람의 얼굴 같은 형상이 되었다.
마치 화가의 작업실에 있는 흉상과 같은 모양새였다.
다만 보통의 인간 같은 크기가 아닌, 거인의 것과 같은 크기였다.
-꼬마야, 나와 계약을 하지 않겠느냐?
녹색 흉상이 입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유릭이 눈을 찌푸렸다.
-너에게서 숨길 수 없는 한(恨)이 느껴지는구나. 이 풍왕의 손을 잡는다면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으리니.
“…….”
스스로를 풍왕이라 얘기한 그 녹빛의 얼굴을 유릭이 바라보았다.
-너는 그저 아주 작은 대가만 지불하면 된단다. 나의 힘으로 네가 이룰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작은 대가지. 그게 무엇이냐면…….
가만히 얘기를 하던 풍왕이 서서히 말을 멈췄다.
그러곤 눈을 찌푸렸다.
뭐지? 보통 이쯤 되면 반응이 있어야 되는데, 저 꼬마 놈은 아직까지도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지 않은가?
혹시 뜬눈으로 기절이라도 한 것인가?
-꼬마야. 말을 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더냐?
풍왕이 그리 얘기했다.
그러나 유릭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니, 듣고는 있는 것이냐?
그것이 못내 답답한지 풍왕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런 그에게 유릭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잘 들린다.
아까부터 주의 깊게 경청하고 있었다.
-그럼 뭐라도 말을 좀 해보거라.
풍왕이 재촉한다.
그제야 간신히 유릭이 입을 열었다.
“죽어라, 악마 놈.”
녹시아를 뽑음과 동시에, 온 저택을 환하게 비추는 불꽃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