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3화
13화. 풍령
서재를 가득 채우는 불길.
녹빛의 얼굴이 입을 벌렸다.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분명 눈앞에 있는 꼬마는 15살이나 됐을까 싶은 어린아이다.
그런데 그 손에서 흘러나오는 불꽃은 어지간한 마법사들 못지않은 것이 아닌가?
그 불꽃을 보고 있자니.
‘이 녀석이다!’
더욱 탐이 났다.
풍왕의 가슴이 설레며 떨려왔다.
‘육신을 잃고 영혼만이 남아 잔류하길 수백 년.’
그의 영혼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아마 몇 년만 더 지났더라면 힘이 다해 자연히 소멸해 버렸으리라.
그런 와중에 찾아온 어린 사내아이.
이 아이의 육신을 빼앗는 것만이 그에게 남은 마지막 찬스였다.
-후우!
그가 바람을 불어 홀의 불꽃을 흩어냈다.
밀려난 불꽃이 애꿎은 벽과 카펫만을 태우기 시작했다.
-아이야. 진정하거라. 나는 네 적이 아니란다.
풍왕이 사뭇 친절한 어조로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유릭이 쏟아내던 불꽃을 잠시 멈추었다.
물론 뽑은 검은 여지없이 풍왕을 겨눈 채였다.
불꽃을 멈추는 유릭을 보며 풍왕이 속으로 미소 지었다.
‘무슨 대단한 재능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봤자 아이는 아이다. 꼬마 하나 속이는 거야 손쉬운 일이지.’
풍왕이 혀로 입술을 축이곤 유릭에게 차분히 이야기를 건넸다.
-꼬마야. 나는 유령이긴 하지만 악령이 아니란다. 그 증거로 이렇게 또렷이 의식이 남아 있고 이야기도 통하잖니.
“악마잖아.”
유릭이 툭하니 뱉은 말.
풍왕이 잠시 말문이 멎었다.
조금의 틈도 없이 답하는 유릭의 태도.
일이 마냥 편하게는 풀리지 않을 것임이 느껴졌다.
-종의 분류로 보자면 그렇겠지. 하지만 보거라. 같은 인간 중에서도 착한 이와 나쁜 이가 있지?
유릭이 끄덕였다.
-거봐라. 악마라 하여도 착한 악마랑 나쁜 악마가 있게 마련이야.
“착한 악마는 죽은 악마뿐이라던데.”
이 빌어먹을 꼬마가.
풍왕이 올라오는 혈압을 느끼며 눈을 씰룩였다.
물론 유령인 그에게 진짜 혈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지 않아요. 나는 네게 친절을 베풀고 싶어서 나타난 거란다.
“친절?”
-네 소원을 이뤄주마. 아니, 정확히는 네가 스스로 소원을 이룰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안겨주마.
“강한 힘이라면 어느 정도지?”
풍왕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 나이대의 꼬마다.
딱 저 나이대의 젊은 사내아이만큼, 힘이라는 단어에 취하기 좋은 시기가 없었으니.
-칠색의 마왕은 들어보았느냐?
“옛날에 이 땅을 지배했다던 마왕 말이군.”
-그래, 맞다. 사람들은 칠색의 마왕이 이 마경에서 가장 강한 이라고 생각했다만 사실은 달라.
“그래?”
-물론 그가 강대한 이였던 것은 맞다. 하지만 그 거대한 마왕조차 이 나를 함부로 하지 못했단다. 녀석은 나와의 정면승부가 두려워 비겁한 술수를 부려 나를 이 변방으로 쫓아 보냈어.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마왕보다 내가…….
말이 길어지며 설명이 이어지는 것을 유릭이 툭 끊었다.
“졌네.”
풍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비겁이니 뭐니 하지만 어쨌든 진 건 진 거잖아.”
-무슨 소리! 네가 녀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녀석은 무려…….
“뭔 말을 하든 결국 살아남는 녀석이 승자지.”
유릭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 태도를 보며 저도 모르게 무언가가 올라오는 풍왕이었으나.
-그, 그건 그렇지만…….
차마 반론하지는 못했다.
유릭의 말대로 결국 살아남는 이가 가장 강한 것이고, 애초에 비겁한 술수라는 것은 악마에게 있어 칭찬과 다를 바 없는 얘기였으니.
순간 유릭에게 넘어갈 뻔한 풍왕.
그러나 이내 목적을 떠올리곤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됐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다! 나는 단순한 전투력만큼은 마왕에 뒤지지 않아. 이런 내 힘을 얻는다면 이 혹한의 땅이 모두 네 아래 무릎 꿇게 되리라!
사내로서 어찌 이 원대한 꿈을 꾸지 않을 수 있으리!
풍왕이 유릭에게 그리 토로했다.
이야기의 효과를 위해 바람을 일으켜 주변의 번져 있던 불을 번쩍번쩍 빛나도록 만드는 노력까지 아끼지 않았다.
어찌 보면 참으로 눈물 나는 노력이었으나.
“이 북쪽 대지를 내 발아래 말인가…….”
유릭은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채 풍왕이 연설을 이어갔다.
-그렇다! 비록 아이지만 너도 사내가 아니겠느냐. 패자(霸者)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는 하지 말거라.
크게 외치는 그에게 유릭이 얘기했다.
“네가 보장할 수 있는 건 겨우 이 구석진 땅 쪼가리뿐인가?”
-……뭐?
“세계 정복 같은 것도 아니고, 고작 한 지역의 패자라니. 마왕보다 셌다던 놈치곤 제시하는 게 쪼잔하군그래.”
고작 한 지역의 패자.
물론 유릭이 말처럼 이 땅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빙하백가가 자리한 이 엘드가르드는 전 대륙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함락하기 어려운 곳이리라.
하지만, 그래봤자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니.
-꼬마야……. 네가 아직 어려 뭘 모르는 것 같다만, 세계는 네 생각보다 아득히 넓단다. 당장 이 칠색의 마경 또한 수십 개나 있는 마경 중 하나에 불과해.
“사내로서 원대한 꿈을 꿔야 하느니 뭐라니 얘기해 놓고, 정작 본인은 상당히 소심한데.”
유릭이 휙 허공을 한번 그었다.
<화룡검화>.
검로를 따라 피어오른 불길이 순식간에 검을 감싸기 시작했다.
“나는 이 추운 땅 안에서 아등바등 왕 놀이를 할 생각은 없어서.”
유릭이 단호히 얘기했다.
성인이 되면 마음껏 대륙을 주유할 것이다.
그는 이 땅과 가문에 갇혀 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풍왕의 제안은 전혀 그의 가슴을 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흥! 네깟 게 이 넓은 세상에서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세상에 비하면 너는 먼지만도 못한 티끌에 불과하다!
“어른이 된 내가 무슨 일을 하고 다닐지는 모르겠지만.”
유릭이 팔을 들었다.
“적어도 그곳에 네가 있을 자리는 없어.”
화륵!
유릭이 주저 없이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불에 휩싸인 그의 검이 풍왕의 바람을 베어 갈랐다.
참다 참다 이를 드러낸 맹수처럼.
그것을 보며 풍왕이 한껏 이를 갈기 시작했다.
-이익! 네놈이 감히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들어!? 더는 못 봐준다! 다음 플랜으로 가겠다!
다음 플랜?
유릭이 갸웃거렸다.
그러나 다음 플랜의 정체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죽어!
단순히 유릭을 시체로 만들고 몸을 강탈하겠단 수작.
시체에 깃드는 것은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것에 비해 수많은 제약이 생기긴 하지만, 풍왕은 이제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말로 농락하는 것이 실패한 이상 남은 것은 실력행사뿐.
풍왕의 바람이 분노한 맹수와 같은 불꽃을 제압하려 들었다.
“후우-”
유릭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염화신무의 구결을 외웠다.
전신 세맥이 더욱 가열되며 불의 기운을 더욱 강하게, 그리고 빠르게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불꽃이 울컥하고 한층 더 쏟아져 나왔다.
-질리지도 않고 나오는구나!
풍왕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동시에, 그래서 더 탐이 났다.
저 화염의 신과도 같은 육체를 가질 수만 있다면, 자신의 바람의 권능과 함께 엄청난 파괴력을 낼 수 있으리라!
‘꼬마 놈! 내 모든 걸 걸겠다!’
풍왕이 이를 악물고 바닥부터 힘을 끌어모았다.
그의 힘은 육신을 잃고 나서 오랜 세월 동안 풍화되어왔다.
거기에 얼마 안 남은 힘 역시 영혼을 세상에 붙들어 놓는 것에 쓰고 있다.
그 최후의 최후의 힘.
그마저도 모조리 끌어왔다.
‘어차피 여기서 이 꼬마를 제압하지 못하면 미래는 없어!’
유릭의 몸만 차지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영혼을 붙들어 놓는 것에 힘을 쓸 필요는 없어진다.
그렇게만 되면 자신의 세상이다.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해주리라.
약한 놈들을 노예로 부려먹고 마음가는 대로 여자들을 취하고 온갖 부귀영화를 끌어모으고.
악마답게 그의 속내에 담긴 탐욕은 끝이 없었다.
‘…….’
점점 밀리는 불꽃을 보며 유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마에는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불꽃으로 인한 더위 때문에 흘리는 땀이 아니었다.
‘놈의 힘은 말하는 것보다는 훨씬 약하다.’
녀석은 스스로가 마왕보다 강하다 하였다.
그 말이 사실이었다면, 지금은 과거에 비해 극도로 약해진 상태라는 것일 터.
하지만 그 약해진 힘조차 유릭에겐 버거운 것이었다.
그나마 염화신무가 뛰어난 무공이기에 이 정도로 버티는 것이지, 일반적인 3성의 검사였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해 버렸으리라.
하지만.
‘놈은 날 얕보고 있어.’
한 가지는 안다.
풍왕은 자신을 얕보고 있었다.
타고난 재능으로 엄청난 마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걸 다루는 것은 기껏해야 15살짜리 어린아이라 생각하고 있다.
‘단순하게 힘으로만 제압하려 하고 있다.’
확실히 유릭은 15살의 아이가 맞다.
염화신무를 익힌 지 2년이 갓 지난 정도다.
하지만, 전투에 있어서의 경험만큼은 15살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
속절없이 밀리는 와중에도 유릭의 눈이 날카롭게 놈의 바람을 살폈다.
풍왕의 바람은 딱히 대단한 묘리가 깃들어 있지 않다.
그저 있는 힘껏 쏟아져 나와 유릭을 제압하려 할 뿐.
이치가 깃들지 않은 힘만큼 공략하기 쉬운 것도 없었으니.
‘저기다!’
이윽고 풍왕의 힘의 흐름을 파악했다.
그리고 그 핵이 되는 장소도.
검을 휘둘러 바람을 베어내면서 유릭은 몰래 손가락 끝에 기운을 모았다.
그리고, 바람의 핵을 향해 <연화지>를 쏘았다.
-컥!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자그마한 불꽃 탄환이 풍왕이 조종하던 바람의 핵을 정확히 관통하고 지나갔다.
일순간 바람이 제어를 잃고 흔들린다.
풍왕이 곧바로 그것을 다시 수습하려 했으나.
“네 바람, 잘 쓸게.”
유릭은 그 일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짧은 순간 제어가 풀린 바람을 이용하여 유릭의 불꽃이 순식간에 서너 배 이상 몸집을 부풀렸다.
풍왕이 곧바로 다시 바람을 제어했다.
하지만 늦었다.
이미 유릭의 불꽃은 맹수를 넘어 용과 같이 커져 있었다.
-안 돼애애애애!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불꽃을 목도하고는 풍왕이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녹빛의 얼굴을, 불꽃의 용이 단숨에 삼키고 지나갔다.
콰아아아앙!
동시에 그것은 이 낡은 건물의 절반을 부수며 쏘아졌다.
유릭 혼자서는 아직 불가능했을, 풍왕의 바람을 이용했기에 가능한 파괴력이었다.
“후우-”
유릭이 차분히 호흡을 고르며 남은 잔불을 회수했다.
그가 서 있는 곳의 홀의 바닥은 아직 멀쩡했지만, 저택의 절반 정도는 모조리 부서져 버린 후였다.
-딸랑.
잠시 서서 전투의 잔열을 식히고 있자니 그런 소리가 들렸다.
쳐다보니 바닥에 연녹색의 작은 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그가 다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방금까지 바로 눈앞에서 느꼈던 풍왕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놈이 가지고 있었군.”
그건 유릭이 이 유적에 온 목적이었다.
회귀 전 발굴대가 발견한 바람의 힘을 가진 물건.
분명 풍령(風鐸)이란 이름이 붙었었던가.
‘발굴대는 비어 있는 저택에서 발견했다고 들었는데.’
아마 둘 중 하나이리라.
3년 후에는 풍왕이 아예 소멸하는 것이든가, 아니면 마주치고 쓰러뜨렸으나 그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든가.
전자라면 아마 힘이 다해서 영체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소멸한 것일 테다.
그렇다면 소멸하기 직전까지 풍령의 힘을 쪽쪽 빨아가고 있었을 터.
휘잉-!
지금의 풍령은 내기를 조금만 불어넣어도 강풍이 뿜어져 나왔다.
회귀 전에 한 번 보았었던 풍령이 가진 힘보다 2배는 더 강력한 느낌이었다.
‘전자가 맞나 보군. 딱 적당할 때 얻었어.’
지금보다 일찍 왔다면 수련이 부족해 풍왕에게 졌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늦게 왔다면 풍왕이 풍령의 힘을 훨씬 소모한 후였겠지.
운이 좋게도 알맞은 타이밍에 찾아온 것 같았다.
“읏차.”
그가 저택을 나와, 남은 폐허의 잔해에 불을 놓았다.
풍령으로 살짝 바람을 일으켜 주니 낡은 목조 건물은 금세 활활 타올랐다.
저택이 있었다는 흔적까진 지우지 못했지만, 그래도 유릭 본인의 흔적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3년 내에 발견될 곳이니까.’
그러면 조사단이든 발굴단이든 조직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조사해도 발견하는 것은 타다 만 유물들뿐.
자신이 왔다는 사실은 누구도 밝혀낼 수 없으리라.
그렇게까지 만들고 나서야 유릭이 뒤를 돌았다.
이제 돌아갈 때였다.
‘1반은 아이스 골렘을 잡는다고 했던가?’
자진해서 토벌 대회에 참가한 만큼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 시간 동안 뭘 했냐고 질문이나 타박이 돌아올 테니까.
가는 길에 적당히 사냥 거리를 잡아 돌아가자고 마음먹으며, 유릭이 불에 탄 폐허를 뒤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