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5화
15화. 고마웠어
웅성거림이 커져왔다.
그 대부분은 유릭이 혼자서, 그것도 단칼에 아이스 골렘을 베었다는 것에 대해서였다.
이 자리에 있는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조차 그 업적에 경악하는 와중.
단상 위의 엘린은 흐뭇한 미소로 유릭을 맞이했다.
“훌륭하구나, 유릭. 네가 1위란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간질인다.
남매사이란 것을 나타내듯 꼭 닮은 백색의 머리카락.
다만 같은 백색이라도 느낌은 전혀 달랐다.
유릭의 것이 눈과 같이 새하얀 것이었다면, 엘린의 것은 얼음처럼 올곧고 청아한 느낌이었다.
“고마워.”
엘린의 칭찬을 유릭이 곡해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받았다.
그녀가 유릭에게 상을 건넨다.
그것을 건네주며 유릭에게만 들리게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화염 마나 때문에 고생이 많지? 내게도 이런저런 얘기가 많이 들려온단다.”
유릭이 화염 마나를 익힌다고 하여 새된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
엘린이 그 존재를 모를 리가 없었다.
가문의 일에 별반 관심이 없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그녀는 가주 대행으로 활동할 때가 많다.
당연히 가문의 여러 이야기가 항상 귀에 들어오곤 했다.
“많이 힘들 텐데 잘 버텨주었어.”
“나보단 누나가 더 고생이지.”
“후후. 누구 동생이길래 이렇게 이쁘게 말하는지.”
흔한 입에 발린 소리였지만 엘린은 무엇보다 기쁜 듯이 웃었다.
그 미소를 보며 유릭은 조금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회귀 전, 그녀는 빙하백가의 친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유릭을 신경 써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가 볼모로 팔려갈 때 유일하게 반대했던 사람.’
오직 그녀만이 유릭의 볼모행을 반대했다.
유릭만을 감싼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볼모로 보내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 혼자 결정을 뒤집긴 불가능했다.
가주 대행이라는 지위를 가지고도, 가문 전체의 결정엔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유릭은,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말하지 못했다.
누나가 반대해 준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그때의 유릭은 볼모가 됐다는 사실만으로 짓눌려 있던 시기였기에.
“고마웠어. 정말로.”
감사 인사를 하면서도 입가에 쓴맛이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뒤늦은 감사가, 이제 와서 엘린에게 전해지는 일은 없으리란 것을.
하지만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고맙긴 무슨. 네가 열심히 한 일이잖니.”
아니나 다를까 엘린은 유릭의 감사를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냥 상을 받으며 의례적으로 하는 감사라 생각한다.
전해지지 않고, 전할 수도 없다.
그것에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번 놓쳤던 기회는, 설령 회귀를 한다고 해도 되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미 자신의 인생은 회귀 전과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터벅.
유릭이 받은 상을 가지고 단상을 내려왔다.
무사히 대회를 마치고 엘린이 폐회 연설을 시작했다.
그것을 들으며 유릭이 받은 물건을 확인했다.
‘분명 단골초로 만든 단약이라고 했지.’
단골초는 아이가 섭취하면 뼈가 튼튼해지고 키가 자란다는 약초다.
대충 뭐 좋은 영양소가 많이 들어 있는 풀이 아닐까. 영양사도 아니기에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걸로 만든 단약이 5알.
‘팀 단위라서 5알이나 들어 있나 보네.’
유릭은 혼자서 1위를 하였기에 5알을 모두 독점하게 된 것이다.
한 알이면 몸이 좀 튼튼해지는 정도지만 5알이나 있으면 또 모른다.
육체를 만드는 데 꽤 도움이 될지도.
-그럼 이것으로 칠색 마경의 토벌 대회를 마치겠습니다!
이윽고 연설이 끝나고 돌아가는 시간이 되었다.
귀가 시간이 되어 순식간에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유릭은 한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굳이 찾을 것도 없이 상대 쪽에서 먼저 다가왔다.
“도련님. 1등 축하드립니다.”
아니스였다.
“아니스가 검을 봐준 덕분이지.”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대련 상대가 되어드렸을 뿐입니다.”
본래 그녀는 대회가 끝나면 곧바로 기사단에 복귀할 생각이었다.
굳이 유릭과 대화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대회 전에 유릭이 지시한 것이 있기에 보고를 하러 온 것이다.
“어땠지?”
“별다른 수상한 점은 못 찾았습니다.”
전투1반의 알리샤를 집중적으로 감시할 것.
그 말을 따라 아니스는 알리샤가 있는 조를 주시했다.
그곳은 데릭의 조였고, 2등을 한 조였기에 나름 보는 맛은 있었다.
다만 유릭이 눈여겨볼 만한 수상한 점은 전혀 없었다.
“어떤 점에서 수상하다고 느끼신 겁니까?”
아니스가 계속 신경 쓰이던 것을 물었다.
내내 고민해 보았지만 그녀는 유릭이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알리샤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지극히 평범한 1반의 아이처럼 보였다.
“뭔가 냄새가 나서.”
“냄새…… 말입니까.”
아니스는 그것을 수상한 냄새가 난다는 일종의 비유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유릭이 한 말은 말 그대로의 의미다.
진짜 냄새가 난다.
썩은 것 같은 냄새가.
그런데 그걸 다른 사람은 달콤한 과일 향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더욱 이상한 것은.
‘회귀 전의 나도 그렇게 느꼈었단 말이지.’
회귀 전의 유릭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이었다.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알리샤는 데릭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여자였기에 몇 번 엇갈린 기억은 있다.
그 기억에 따르면 무척 달콤한 향이 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염화신무를 배운 후에 만나보니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무공이랑 상성이 안 맞을 뿐인 건가?’
차라리 알리샤가 미래에 무슨 일을 저지르는 악당이라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억은 없다.
알리샤가 저지르는 사건이라고 해봐야, 데릭이 다른 여자를 만날 때 질투하여 난리를 치는 정도.
굳이 한 가지를 추가하자면, 영웅이 된 아이작 로스카의 열렬한 추종자 중 하나긴 했다.
그러나 그건 악당은 아니다.
아이작을 적대시하는 건 유릭의 개인적인 사정이지, 아이작 자체는 평화를 이뤄낸 인물이 맞았으니까.
“그럼 어떻게 할까요. 사람을 붙여놓을까요?”
“나한테 그런 권한이 있어?”
“발터 님께 최대한 도련님의 뜻을 이뤄드리란 명을 받았습니다.”
“외숙의 ‘호의’만큼의 권한은 있다는 말이군.”
“정확하십니다.”
유릭의 빠른 눈치에 아니스가 적지 않게 감탄했다.
이런 세세한 통찰력과 순발력을 봐도, 역시 유릭은 남다른 점이 있다.
그녀가 그리 생각하며 끄덕일 때.
유릭은 힐긋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건 무뚝뚝한 데릭과 그 옆에서 깔깔 웃고 있는 알리샤.
“잠시만 지켜보고 있어봐.”
어쩌면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다.
그저 무공과 상성이 좋지 않은 것일 뿐, 아무 문제 없는 것일 수도.
‘그땐 사과하자.’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다행인 일이다.
가문에 불온한 존재가 숨어들었다는 것보다야, 자신이 사죄할 일로 끝나는 것이 훨씬 건전하지 않은가.
이런 일이라면 유릭은 얼마든지 고개를 숙여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유릭의 눈에서 결의의 빛을 본 것일까?
아니스가 작게 끄덕이며 유릭의 명을 받들었다.
* * *
한 달 뒤.
“큭!”
퍼석!
데릭이 야외 수련장의 목각 인형을 거칠게 베어 넘겼다.
마검 이솔렛에 의해 얼어붙은 인형은 잘게 부서져 떨어져 내렸다.
그의 주변에는 그렇게 박살 난 목각 인형의 잔해가 가득했다.
“하아…… 하아…….”
데릭이 땀을 닦으며 하늘을 보았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진 밤하늘 아래.
데릭은 홀로 나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미 팔다리는 부들부들 떨려오고 폐는 쥐어짜이는 듯하다.
근육이 뻐근하고 심장은 비명과도 같은 박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땅바닥에 엎어지고 싶을 정도지만, 데릭은 전혀 주저앉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금 검을 들어 올렸다.
‘아직 멀었어.’
유릭과 자신의 차이를 좁히기엔 아직도 멀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신이 수련을 할 때 유릭도 수련한다.
점심을 먹은 후에도, 저녁을 먹은 후에도 자신이 수련할 때 유릭도 수련한다.
그렇다면 녀석을 따라잡기 위해선, 모두가 잠든 이 시간에도 검을 휘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 시간만큼은 유릭도 수련을 멈추고 잠에 빠지는 시간이니까.
‘아이스 골렘을 단칼에.’
지금의 자신에겐 절대 불가능한 경지.
토벌 대회의 날부터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 한 달 동안, 데릭은 오직 유릭만을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아니, 유릭의 검을 생각했다고 해야 하겠지.
검을 휘두른 피로는 물론이고 부족한 잠에서 오는 피로도 적지 않게 올라왔다.
이런 수련이 과연 효율적인 게 맞을까?
그런 의문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제시간에 침대에 누우면 눈이 감기지 않는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검의 환영들.
검을 쥐고 있는 것은 자신의 쌍둥이인 유릭 로스카.
그 환영을 보고 있으면, 수련장에 나오지 않고는 배길 수 없어진다.
그렇게 새벽 깊은 시간까지 휘두르고 또 휘두르다 지쳐 쓰러질 정도가 되어야 방에 돌아온다.
그리고 선잠이나 간신히 자다가, 아침 일찍 1반의 연무장으로.
그런 생활이 벌써 한 달이 지속되고 있었다.
스스로를 학대하는 듯한 이런 생활이 대체 언제까지 이어질까.
‘유릭과 똑같이 아이스 골렘을 단칼에 베어낼 수 있게 되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대답은 ‘아니오’였다.
유릭도 매일을 태만히 보내지 않는다.
자신이 골렘을 단칼에 베어낼 즈음이면 유릭도 또 다른 업적을 세우고 있을 테지.
그러면 자신은 다시금 유릭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 검을 놓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끝나지 않고 반복된다.
어쩌면 영원히.
‘젠장.’
이 감정을 뭐라고 부르는지, 자신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수치스러웠다.
패배자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그것이 자신에게 싹트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생전 느껴본 적 없던 생소한 감정이 마음을 좀먹고 머리를 흐리게 만든다.
휘두르는 검은 점점 딱딱해지고, 이제 와선 아무 의미 없는 반복 작업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데릭은 그조차 알지 못했다.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는 것이 성장으로 이어지리라 굳게 믿고 그저 움직일 뿐.
그때.
-멈춰!
-헉……!
털썩. 털썩.
작은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꽉 찬 비료 포대가 쓰러지는 것 같은 소리.
아니, 데릭은 알고 있었다.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였다.
‘……!’
데릭이 눈을 번뜩이며 수련장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소리가 난 별궁의 정문으로 향해 소리 죽여 달려갔다.
대체 누구지?
별궁의 사용인들은 모두 자고 있다.
정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원도 따로 없다.
애초에 별궁은 내성의 안쪽에 있기에 따로 경비는 없었다.
쓰러지는 사람도, 쓰러뜨리는 누군가도, 이 시간에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어머, 안 자고 계셨네요.”
별궁의 정문.
이 밤에 달을 등지고 서 있는 것은 그가 잘 아는 아이였다.
전투1반의 동기인 알리샤.
“알리샤?”
데릭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근처를 보았다.
알리샤를 둘러싼 형태로 세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눈을 뜨고 있었으나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았고, 벌린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는 채였다.
기절? 아니면 마비?
그들은 가문의 기사들이 사용하는 제식 검을 차고 있다.
가문의 기사들이란 얘기였다.
정식 기사들이 셋이나 완전히 제압당해 쓰러져 있는 것에 데릭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네가 한 일인가?”
“잠깐 자고 있을 뿐이에요. 밤은 잠을 자는 시간이잖아요?”
믿기지 않는다.
전투1반의 아이. 고작 견습에 불과할 뿐인 알리샤다.
그런 그녀가 정식 기사를 셋이나, 그것도 단숨에 제압하다니.
하지만 이곳에 서 있는 것은 그녀뿐이다.
그것은 눈을 돌릴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요새 유독 수련에 열심이시네요, 데릭 공자.”
“……그게 왜?”
데릭이 이솔렛을 겨눈 채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와 같이 경계심을 북돋고 있었다.
그때, 데릭은 돌연 깨달았다.
언제부터인지 주변에 안개가 자욱했다.
이곳은 별궁의 정문이다.
그런데 얼마 떨어져 있지도 않은 별궁의 건물도, 정원사 한스의 자신작인 꾸민 듯 안 꾸민 듯 꾸민 세련된 정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안 그래도 어두운 밤을 안개가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윽……!”
데릭이 당장에라도 고함을 지르려 하였으나, 코와 목구멍을 침식해 오는 기이한 향기가 그것을 막았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공자의 도움이 되기 위해 온 거니까요.”
“날…… 도와……?”
향기에 절여져 목구멍이 부르르 떨리면서도 그 말만이 간신히 튀어나왔다.
알리샤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릭이 의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그런 데릭에게 알리샤가 치맛자락을 붙잡고 살짝 무릎을 굽혔다.
“다시금 소개할게요. 저는 향기의 마녀 알리샤. 아이작 도련님을 모시고 있는 연금술사랍니다.”
아이작 로스카.
의절당한 채 몇 년간 소식 하나 없는 큰형님의 이름.
예상치 못했던 이름에 데릭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이야기를 들을 신호라 생각했는지, 알리샤가 눈에 호를 그리며 얘기했다.
“데릭 공자. 힘을 원하지 않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