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9화
19화. 자판기
남자가 받은 명령은 이것이었다.
그동안 익힌 암살술로 들키지 않게 유릭을 제압해 봐라.
약물이든 야습이든 뭐든 가능하다.
정면에서 격투술로 제압하거나 하는 것만 아니라면, 유릭에게 들키지 않는 방식이라면 뭐든 좋았다.
-‘암살술’이라고 한 이유를 잘 알고 있겠지. 결코 들켜선 안 된다.
-걱정 마십시오. 제대로 수행하겠습니다.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오늘 오전의 일이니까.
그런데.
‘젠장!’
착수한 순간에 들켜 버리다니!
남자의 눈앞에서 화륵 불꽃이 피어오른다.
칼같이 제어된 불꽃이 남자가 올라앉은 천장을 원형으로 태워 버렸다.
파사삭!
쿠웅!
천장이 쑥 내려가며 복면의 남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에도 낙법을 취해 멋들어지게 착지한 그였으나.
“왜 사람을 무시해.”
직후, 목에 겨눠진 녹시아의 칼날을 보곤 쩌적 몸이 얼어붙었다.
그 짧은 순간, 유릭의 눈이 남자의 모습을 스캔했다.
‘온통 새까만 옷에 얼굴을 가리는 복면. 옷에는 아무 특징도 없고…….’
얼핏 보기론 아무런 단서도 없다.
발치에 널릴 정도로 흔한 암살자의 작업복이다.
하지만 유릭의 눈썰미를 피해 갈 순 없었다.
‘역시 13번대가 맞군.’
소매를 접은 방식. 허리춤의 매듭. 단추의 모양 등, 작전지에서 피아를 식별하기 위한 미세한 표식들.
그것들이 유릭의 눈에 환하게 들어왔다.
“가문의 그림자가 내겐 무슨 볼일이지?”
“…….”
“대답 안 해?”
“……위대한 가문의 후예를 뵙습니다.”
그제야 마지못해 대답한다.
유릭이 그를 향해 물었다.
“너 뭐야? 나한테 뭔 짓을 하려고 한 거지?”
정황상 할아버지가 시험 삼아 보낸 놈이라 생각한다.
진짜 암살자라면 이렇게 부복하고 있는 것부터 말이 안 되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선 놈의 입을 열어야 했다.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유릭 도련님은 본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신 분. 그렇기에 혹시나 있을 불상사를 막고자 저 같은 비밀 호위들을…….”
“아~ 불상사 말이지? 그럼 이건 뭔데?”
유릭이 코웃음 치며 테이블에 튄 포도 주스를 손가락으로 찍어 혀끝에 대었다.
대자마자 느껴지는 찌릿한 느낌.
단전의 내기가 고동치며, 즉시 염화신무의 불꽃이 끓어올라 혀끝에 닿은 그것을 태워 버렸다.
변명의 여지 하나 없는 독극물이었다.
“하도 당당하게 지껄이니까 난 또 무슨 영약이라도 타준 줄 알았네.”
“……!”
그러자 녀석이 눈을 크게 떴다.
허를 찔렸다기보다는 일부러 하는 듯한 과장된 몸짓.
“잔에 독극물이 하독(下毒)되어 있었습니까!? 당장 기사단에 보고해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가장 수상한 것은 식사를 옮겨온 시종이겠군요. 지금 바로 제압해 올까요?”
오히려 유릭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이 새끼 보소?’
약을 탔다는 사실 자체를 시치미를 떼려는 모양이다.
자신이 천장에 숨어 있던 것과 잔에 독이 타져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별개의 사건이란 주장이다.
물론 약이 떨어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던 유릭에겐 씨알도 안 먹힐 말이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도련님의 착각입니다.”
“뭐?”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필시 방에 돌아다니는 먼지를 잘못 보신 게 틀림없습니다.”
녀석이 세상에 다시없을 진리를 말하는 듯한 눈으로 얘기했다.
마치 진심이 가득 들어 있는 듯한 올곧은 눈동자.
뻔뻔하게 나오는 녀석을 보며 유릭이 기가 차 있을 때.
‘이 뻔뻔한 태도에 비취색 눈동자…… 설마?’
비취색 눈동자는 딱히 드문 색깔도 아니다.
하지만 13기사단과 비취색 눈동자라면 유릭에겐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마침 나이도 젊어 보이고, 뻔뻔한 태도 역시 녀석과 똑 닮았다.
“야, 복면 벗어봐.”
“예?”
“벗어보라고.”
유릭이 칼끝으로 놈의 턱을 들었다.
그러나 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위협을 느끼기는커녕 복면을 벗을 생각조차 일절 없어 보였다.
순간 유릭의 칼끝이 흔들렸다.
“……!”
남자가 복면을 지키기 위해 순간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하지만 무의미한 반응이었다.
유릭이 노린 것은 복면이 아니라 놈의 옷깃이었기에.
“역시.”
가슴팍을 길게 베자 놈의 쇄골 아래로 독특한 문양이 보였다.
그것은, 수십 년 전 멸망한 옛 제국의 문양.
보다 정확히는.
“너, 글렌 클라인이구나?”
황실의 일가인 클라인 가(家)의 문장이었다.
* * *
천 년 전 대륙을 통일하여 지배했던 통일제국.
그러나 그 어떤 강대한 국가도 천년이나 지나면 쇠하게 마련이다.
‘황족도 귀족들도 세상 무서울 게 없이 오만했다고 했었지.’
천 년이나 유일한 제국으로서 대륙을 통치해온 그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썩은 상태였다.
황실과 귀족들의 부패로 내부의 고름은 썩다 못해 문드러질 정도였고, 오만한 그들을 증오하는 백성들과 외적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리하여 결국엔 갈래갈래 찢어져 버렸으니.
그게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의 일이었다.
빙하백가과 적마도가를 포함한 10가문이 극적으로 팽창하여 대륙의 패권을 잡은 것이 바로 이때부터다.
“글렌 클라인. 하필 네가 올 줄이야.”
제국의 마지막 황자인 글렌 클라인.
그는 사실, 황실의 직계라고 하기엔 꽤나 거리가 멀었다.
제국이 멸망하고 모든 황족이 성난 군중에게 돌팔매질을 당할 때.
당시 젊었던 레오폴딘은 그 근처에서 임무를 수행하다, 황제의 26번째 후궁에게 망명 요청을 받았다.
말석이라고 하나 황실의 일원인 만큼 어딘가 쓸모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그는 임신한 후궁을 가문에 데려왔다.
그 배 속에 있던 황제의 아이가 태어나 어른이 되어, 누군가와 결혼을 하여 낳은 아이가 바로 이 글렌.
26번째 후궁에게 태어난 자식의 자식이라니, 보통은 황위 계승권과는 한참은 떨어져 있는 신분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통의 경우.
그 외의 황족은 모조리 죽은 지금에 와선, 그야말로 유일무이한 후계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모두 의미 없는 가정이다.
제국은 이미 멸망했고, 글렌 본인 역시 제국의 재건 따위엔 일절 관심이 없었으니까.
“…….”
글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껏 부복하고 있어서 가려져 있었지만, 상당히 키가 큰 녀석이었다.
나이가 자신보다 5살 위였으니, 지금은 아마 20살일 터.
“유릭 로스카.”
놈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방금까진 감정을 죽인 기계 같은 소리였던 반면, 지금은 뱃속에 분노의 마수라도 들어 있는 듯한 이글거리는 울림이었다.
글렌이 복면을 벗었다.
그러자 상당한 미형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미 보이고 있었던 비취색의 눈동자. 그 눈에 잘 어우러지는 벌꿀색의 빛나는 금발.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암살자가 아니라, 황자의 관록에 걸맞은 귀공자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표정만은 뒷골목 왈패와 같이 거칠게 일그러져 있었다.
“어떻게 나란 걸 안 거지? 아니, 내 존재를 어디서 들었지?”
“글쎄.”
유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놈의 얼굴을 보는 것은 이걸로 두 번째였다.
-네놈은 패배한 개다.
회귀 전, 유릭이 적마도가로 팔려가던 시절.
그를 데려다 적마도가에 떨궈 놓는 임무를 맡은 것이 바로 이 남자, 글렌 클라인이었다.
‘아마 그것도 할아버지의 명령이었겠지.’
아무래도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사람을 붙인다고 하면 글렌부터 떠올리는 모양이다.
나이가 비슷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건지.
‘그땐 개고생이었지.’
유릭이 글렌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그 여정에서였다.
북쪽 끝의 빙하백가에서 남쪽 끝의 적마도가까지.
대륙을 종단하는 기나긴 여정에서 결코 적지 않은 일이 있었다.
빙하백가와 적마도가의 화친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다른 10가문의 습격이라든지, 혹은 순수하게 빙하백가에 원한을 가진 이의 습격이라든지.
혹은 유릭이 아닌 글렌을 납치하려는,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비밀 세력의 습격이라든지.
-내가 패배자라고?
당시에 꽤 많은 일이 있었고, 글렌과 유릭도 생각보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의 글렌은 한껏 유릭을 경멸하던 시기.
시도 때도 없는 녀석의 독설에 유릭은 울컥하여 대꾸하곤 했었다.
-하찮은 것.
그러나 결국 넋두리에 불과했다.
그런 넋두리를 할 때마다 글렌은 더욱 자신을 경멸하곤 했었지.
“당장 말해. 레오폴딘 그 노친네한테 들었나? 그 자식, 나한텐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하겠다고 해놓고 거짓말을 해?”
지금의 글렌이 유릭을 노려보았다.
과거의 경멸의 눈빛과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손자 앞에서 할아버지 욕을 해?”
“하! 알 게 뭐야.”
“할아버지는 네 은인이 아니던가?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던 것도 할아버지 덕분일 텐데.”
“결국 어딘가 이용할 데가 있을까 싶어 데리고 있는 거에 불과하잖아? 그딴 취급에 감사하란 말이냐?”
“…….”
“…….”
유릭과 글렌이 잠시 동안 서로를 노려봤다.
그것은 상대를 납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압하여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노려보는 것만으론 결론이 나지 않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글렌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듣고 싶은 것이 있다. 그렇다면 해야 할 건 한 가지겠지.”
“결투라도 하자고?”
“결투는 대등한 두 사람이 하는 것이다. 너와 나는 신분도 실력도 대등하지 못해.”
유릭은 빙하백가의 직계다.
반면 글렌은, 의미 없는 황족이란 타이틀을 떼면 결국 가문의 기사 중 하나.
공정한 결투를 치르기에 적절한 신분은 아니었다.
실력은 둘째 치고.
“게임을 하지. 13기사단에는 훈련을 겸해서 종종 하는 게임이 하나 있거든.”
글렌이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풀었다.
“이 상황을 봐라. 나는 널 암살하러 왔고 너는 나를 간파했지. 간파당한 암살자의 말로는 한 가지밖에 없지 않겠느냐?”
“음…… 보통은 고문실에 처박히지. 정보를 뽑아야 하니까.”
“잘 아는군. 나를 고문해서 네가 원하는 정보를 손수 뽑아봐라. 그게 안 되면 네 패배다.”
“고문?”
“시간은, 그래…… 반나절 정도면 되나? 단, 중상을 입히는 순간 네 패배다. 그런 규칙이야.”
얼핏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보이지만 나름 이유가 있는 룰이었다.
본디 가장 뛰어난 고문이란 상대를 죽이지 않고, 죽을 만한 상처를 입히지 않고 정보를 뽑아내는 것.
이 게임은 그것을 단련하기 위한 것이다.
“요는 ‘제대로’ 고문을 할 수 있겠냐는 말이군.”
“그런 게임이다. 아니, 훈련이지만.”
그리 말하는 글렌의 눈에는 모종의 광기까지 어려 있었다.
하지만 유릭은 알고 있었다.
이 제안도, 저 눈에 비치는 광기도, 모두 합쳐서 녀석의 술수다.
‘끝까지 기세 싸움을 할 생각이군.’
글렌의 노림수는 보다 단순했다.
유릭을 위압하여, 기세 싸움에서 이기고자 한다.
본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선 신분이나 입장 따위를 뛰어넘는 본능적인 서열이 있게 마련.
글렌은 그 서열에서 유릭의 위에 있고 싶었다.
그는 패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남자였다.
“자, 해봐라. 그 칼로 냅다 찔러볼 테냐? 아니면 묶어놓고 구타라도 할 테냐? 뭘 생각하든, 네 상상의 범주에 있는 방법으론 결코 내 입을 열진 못할 거다.”
글렌은 이미 어릴 때부터 충분한 훈련을 받았다.
설령 자결을 할지언정 누구에게도 정보를 누설하지 않는 훈련.
실전도 아닌 이런 장난 같은 게임에서, 그것도 15살짜리 애송이 도련님을 상대로 굴복할 리가 없었다.
“……좋아.”
그 의지를 받으며 유릭이 검을 거뒀다. 날붙이를 거두곤 손가락을 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글렌이 득의양양 웃었다.
‘아직 애송이군. 맨손부터 할 생각인가.’
이 게임의 정석과도 같은 시작이지만,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다.
반나절은 길어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짧은 시간이다.
맨손 구타 따위 나약한 방법을 시험해보다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터.
“이거에 견디는지 한번 시험해 볼까.”
검을 집어넣고는, 유릭이 손가락을 폈다.
그 끝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은 내기의 바늘이 돋아났다.
“흐흐, 고작 그 정도 마나로 뭘 어쩌겠다고?”
극도로 미약한 마나의 흐름.
집중하면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미하다.
그 정도 마나를 내보이곤 기뻐하는 유릭의 모습이 사뭇 웃긴 글렌이었다.
그 비웃음을 한 귀로 듣고 흘리곤, 유릭이 놈의 아혈을 짚었다.
“웁……!”
목소리가 나오지 못하게 하는 혈.
곧바로 몸의 이상을 느꼈는지 글렌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저항하려는 낌새는 없다.
오히려 더욱 투지를 불태우며 유릭을 노려봤다.
“으읍읍!”
무슨 이상한 수작인지 몰라도, 고작 손가락 하나로 자신의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을 거다!
글렌이 얘기한 것은 그런 소리였다.
“뭔 소릴 하는지.”
물론 읍읍거리기만 하는 걸 유릭이 알아들을 수 있을 리 없다.
그가 으쓱이며 글렌의 몸 곳곳의 혈을 몇 군데나 연달아 찔렀다.
유화에게 배운 점혈법 중 하나.
이런 상황에 딱 걸맞다는 훌륭한 기술이 있었다.
‘이름이 뭐더라. 분…… 뭐시기였었는데.’
들어본 적 없던 한자라 까먹었다.
뭐 이름을 모르는 정도야 사소한 문제다. 나중에 유화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뭐, 기대해.”
“으읍?”
“널 버튼 하나 누르면 대답이 나오는 대답 자판기로 만드는 기술이 있거든.”
가벼운 어조로 얘기하며 유릭이 글렌의 혈을 마저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