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20화
20화. 섀도우
아니스는 곧바로 복귀하여 레오폴딘에게 알현을 신청했다.
유릭에게 글렌을 보낸 것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방 양쪽의 횃불만 일렁이는 거대한 방에서, 아니스가 장막 너머의 레오폴딘을 향해 부복했다.
“호오, 글렌을 만났느냐? 어땠느냐. 임무엔 성실히 임하고 있었겠지?”
혹시 숨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레오폴딘은 의외로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예. 글렌은 무척 뛰어난 기사니까요.”
“하긴, 녀석이 임무를 대충할 리는 없지.”
“성실한 녀석입니다.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는 말을 들으면, 정말로 목숨만 붙여놓을지도 모릅니다.”
아니스가 걱정하는 것은 그 점이었다.
글렌의 임무 성공률은 100%다.
무척 믿음직스러운 후배였지만, 그 성실한 점이 지금은 오히려 걱정이 되었다.
융통성 없이 임무를 수행하다 유릭이 크게 다치지는 않을까?
“성실? 후후.”
그러자 레오폴딘이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가 어째서 웃는 것인지 아니스는 알지 못했다.
“그 꼬맹이는 성실한 놈이 아니다. 단지 지기 싫어할 뿐이지.”
“오기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러니 더욱 재미있을 거다. 녀석과 유릭을 붙여보면.”
사람과 사람이 맞부딪히면 반드시 불꽃이 튀게 마련이다.
그 불꽃이 얼마나 커다랄지, 어떤 색깔을 띠고 있을지, 온도는 차가울지 뜨거울지.
레오폴딘은 그 결과가 기대되어 참을 수 없었다.
“그래도 뭐,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꽤 걸리겠지.”
“그 말씀은…… 도련님이 바로 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시는군요.”
“그럴 게다. 뭐냐? 너는 유릭을 믿지 않는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만…….”
“후후. 유릭은 쉽게 당하진 않겠지. 하지만 글렌 녀석도 오기가 대단하니 간단히 결판이 나진 않을 게다.”
레오폴딘이 걱정할 것 하나 없다는 듯 크게 웃었다.
글렌의 임무를 취소하거나 중지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인다.
아니스는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참아야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듣긴 했지만, 결국 그녀의 걱정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으니까.
* * *
“끄아아아아악! 그 노친네! 노친네가 시켰다고! 네놈을 테스트해본다면서!”
“진짜?”
“진짜아아아아-!!”
바닥에선 글렌 클라인이 벌레처럼 뒹굴고 있었다.
어디선가 우드득, 빠드득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어디서라고 할 것도 아니다.
글렌의 몸에서 나는 소리였다.
올라오는 극도의 통증을 2시간 정도는 버틴 글렌이었으나, 그 이상은 기어코 버티지 못했다.
“도, 도련님! 대체 무슨……!”
글렌의 비명 소리에 시종과 시녀들이 몰려왔다.
그러나 유릭이 손을 젓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굳을 뿐이었다.
“별일 아니니까 나가 있어.”
“하지만…….”
“나가 있어.”
부드럽지만 단호한 유릭의 말에 그들은 결국 발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방을 나가면서도 뒤쪽을 힐긋 돌아보며, 정체 모를 손님이 바닥을 뒹구는 모습을 보았으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시종과 시녀들을 모두 물리고 유릭이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아, 미안.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
[“그건 분근착골이에요. 뼈와 혈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을 주는 무공이죠. 전에 알려주지 않았나?”]
‘까먹어서.’
[“아하. 아저씨네엔 없는 문자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근데 왜 갑자기 물어봐요? 응? 혹시, 사람한테 쓰려는 건 아니죠?”]
유릭이 힐긋 발광하는 글렌을 보았다.
쓰려는 게 아니라 이미 썼다.
‘그럴 리가. 네가 부모의 원수쯤 되지 않으면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잖아.’
[“조심하세요. 진짜진짜진짜 아프다고 하니까. 적당한 생각으로 쓰면 안 돼요!”]
‘응.’
유릭이 태연스럽게 시치미를 떼며 대답했다.
그때쯤 글렌은 이미 인내심의 한계를 넘은 지 오래였다.
“끄아아아아악! 말했잖아! 왜 안 풀어, 이 새끼야!”
“다 말한 거 맞지?”
“말했다고오오오!”
순간 이 기회에 말버릇이라도 고쳐놓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심한 것 같아 그만두었다.
‘유화야, 아저씨가 일이 좀 남아서 이만 끊을게.’
[“아, 네! 수고하세요~”]
연결을 끊고 유릭이 애벌레처럼 뒹굴고 있는 글렌을 발로 탁 잡았다.
그리고 세심하게 그의 혈 몇 군데를 탁탁 두드렸다.
중간에 실수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기에, 나름 신중하게 시도했다.
“허억! 허억!”
해제하니 고통은 금방 가신 모양이었다.
비명을 그친 녀석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머리는 땀에 푹 절어 있었고 옷도 땀과 먼지로 잔뜩 더럽혀져 있었다.
굳은 의지로 형형히 빛나고 있던 눈도 지금만은 흐리멍덩하기만 했다.
“역시 할아버지가 보낸 게 맞았군.”
“그래, 이 개 같은 놈아! 과연 그 노친네의 핏줄답구나. 아주 징해. 징하다고!”
“할아버지가 왜 나한테?”
녀석의 욕설은 대충 흘리고 유릭이 질문했다.
거친 말에도 꿈쩍도 하지 않으니 글렌이 킁, 얼굴을 찡그렸다.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다른 선배한테 듣기론 마녀의 일로 네게 흥미를 가졌다고 하는데. 뭐 마녀 계집이랑 놀아나기라도 했냐?”
“역시 그거였군.”
뭐 최근 있었던 일이라고 해봐야 그것밖에 없다.
아무래도 알리샤를 처치한 일을 생각보다 대단하게 보는 것 같았다.
하긴, 그 마녀는 6성 기사 셋을 단숨에 제압한 녀석이다.
<외우주>의 노인 덕택에 자신에겐 저주가 통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낭패를 봤을 게 분명했다.
자칫했다간 데릭과 함께 백치 상태로 처박혀 있었을지도.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이대로 보고 할 거냐? 유릭 도련님은 ‘단 하루’ 만에 시험에 통과하셨습니다, 라고?”
“큭…….”
유릭이 킥킥거리며 얘기하자 글렌이 빠득 이를 갈았다.
그러곤 다시 눈을 번뜩이기 시작했다.
이미 방금까지의 흐릿한 기색은 모두 없어진 후였다.
“……그래. 보고해야지. 성공이든 실패든, 보고하는 것까지가 임무니까.”
생각보다 받아들이는 게 빠른 녀석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내일도 또 덤비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잘 있어라, 유릭 로스카. 이 설욕은, 언젠가 반드시.”
“만나서 반가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말투 한번 고약하군!”
마지막까지 성을 내는 녀석에게 유릭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글렌이 칫, 혀를 차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마치 증발이라도 한 듯이 사라진 것이다.
남은 것은 부서진 천장과 녀석이 뒹굴며 부숴 버린 가구들뿐.
“엠마!”
유릭이 시녀의 이름을 불렀다.
-넷!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고 엠마가 들어왔다.
그 뒤로 별궁의 사용인들과 심지어 기사들까지 모인 것이 보였다.
그들은 유릭의 방 앞에서 무슨 뒤숭숭한 일이 일어난 것인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유릭이 직접 명령한 탓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도련님! 대체 무슨 일이…… 어? 아까 그분은요?”
“별일 아니야. 잠깐 고양이가 숨어들어 와서.”
유릭이 웃으며 얘기했다.
물론 그 말을 믿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릭이 간단하게 명령했다.
“방 좀 치워줘.”
그렇게 말하곤 별궁의 야외수련장으로 향했다.
* * *
유릭의 방에서 일어났던 일은 별궁 내에서 잠시 소란이 되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유릭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소문이 더 퍼질 수가 없었다.
그냥 괴담처럼 뜬구름 잡는 소문만 건너 건너 전해질 뿐.
시녀와 시종들이 방을 치우는 사이 유릭은 수련장에서 수련을 마치고, 방에 있는 샤워실에서 땀을 씻고 있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물이 몸으로 쏟아진다.
그 물방울들을 맞고 있으니 새삼스레 옛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글렌 클라인.’
그날, 회귀 전 적마도가에 도착했을 때.
갖가지 습격을 물리치고 겨우 도착한 그곳에서, 드디어 자신이 볼모로 넘어가던 순간.
-네놈은 패배한 개다.
글렌이 유릭에게 경멸하는 듯한 어조로 그리 얘기했다.
유릭이 패배자라는 사실을.
유릭은 울컥했다.
자신은 노력했다. 피를 토할 정도로, 지쳐서 혼절할 정도로 노력했다.
그래도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하찮은 것.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나. 졌기 때문에 패배자인 것이 아니다.
-뭔 개소리야?
-패배에 순응하고 안주하기 때문에 패배자인 거다.
유릭은 말문이 막혔다.
-지금 네놈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 상관 없다. 산의 초입에 있든 중턱에 있든, 혹은 아직 오르지도 않았든.
처음에는 ‘산’이란 것이 적마도가를 뜻하는가 했지만, 듣다 보니 아니었다.
보다 넓은 개념. 아마 인생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겠지.
-정상에서 눈을 돌리지 마라, 유릭 로스카.
어쩌면 그건, 녀석 나름의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평생을 핍박받다 남은 인생마저 좋을 대로 이용당하게 된 로스카의 막내를 향한.
그러나 녀석의 말은 전혀 와닿지 않았다.
당시의 유릭은 번드르르한 말 몇 마디로 희망을 찾을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쯧.’
기억을 떠올리며 유릭이 혀를 찼다.
샤워를 마치고 몸을 닦는다.
가운을 걸치고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그 순간,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
“오셨습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잘못 감지한 것이 아니었다.
아까 떠나갔던 글렌 클라인.
녀석이 멋대로 남의 방 중앙에서 부복을 하고 있지 않은가?
“너 뭐냐?”
“축하드립니다. 도련님의 시험은 통과라고 노친네가 전하라더군요.”
얼핏 정중해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손자를 앞에 두고 그 할아버지보고 노친네라 그러는데 정중할 리가 있나.
“거 잘됐네. 뭐 상이라도 주냐?”
“있습니다.”
그냥 해본 소린데 진짜 뭐가 있다고?
퉁명스레 내뱉던 유릭의 눈이 조금 느슨해졌다.
“저보고 당분간 도련님의 섀도우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뭐?”
그러나 이어진 글렌의 말에 유릭의 입이 벌어졌다.
섀도우란 그림자에 숨어 주군을 비밀리에 호위하거나, 정보를 캐오거나, 기타 잡다한 명령을 듣는 부하를 말한다.
말할 것도 없이 13기사단의 주요 보직 중 하나였다.
“사실 제가 강하게 제안했습니다. 이 정도 상은 필요하지 않겠냐고 말이죠.”
녀석의 설명을 듣기론 이랬다.
보고를 들은 노친네, 레오폴딘은 무척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근래 들어 가장 기분 좋아 보이는 호탕한 웃음이었다.
그 좋은 기분을 틈타 글렌이 제안했다.
노친네의 제멋대로인 시험에 통과했으니 선물이라도 주는 게 어떠냐고.
“그 선물이 너라고?”
“정확히는 섀도우를 붙여 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 지원했을 뿐이죠.”
“…….”
“아주 흔쾌히 허락해 주더군요. 아주 흔쾌히.”
두 번이나 강조하며 얘기하는 글렌을 보며 유릭이 눈을 찡그렸다.
글렌은 자신에게 설욕하고 싶어 한다. 그 사실을 레오폴딘이 모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흔쾌히 허락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뻔하다.
글렌이 자신에게 설욕하는 것을 할아버지가 수긍했다, 그 이유 외엔 없었다.
“하아. 내가 꺼지라고 하면 꺼질 거냐?”
“물론입니다. 안 보이는 곳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 아예 가라고, 그냥.”
“제 명령권자는 레오…… 노친네입니다. 도련님께선 저를 거부하실 수 없습니다.”
이 자식, 지금 평범하게 레오폴딘 님이라고 하려다 일부러 노친네로 바꿔 불렀다.
‘섀도우라고 하면 충성과 헌신의 대명사 아냐?’
글렌은, 외적으론 이보다 충직할 수 없어 보이지만 실제론 전혀 아니었다.
충성이나 헌신 같은 것과는 백만 광년은 거리가 먼 녀석이다.
“하아……. 설마 이것도 할아버지의 시험인 건가.”
“시험은 끝났습니다. 저는 시험을 통과한 상으로 온 거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한마디도 안 지는 녀석을 보며 유릭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이런 녀석을 앞으로 섀도우랍시고 달고 다니라고?’
벌써부터 앞날이 캄캄한 유릭 앞에서, 글렌은 조용히 부복하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