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21화
21화. 믿는다
사각사각.
별궁 내 유릭의 개인실.
웬 건장한 사내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과일 껍질을 깎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그 손에 들린 것이 과도가 아니라 손가락만 한 작은 단검이란 점이었다.
글렌 클라인.
녀석이 기어코 유릭의 방에 자리 잡은 지 벌써 며칠이 흘렀다.
“드십시오.”
깎은 과일을 글렌이 적당히 던졌다.
유릭이 그걸 받곤, 가늘게 뜬 눈으로 글렌이 쥔 단검을 보았다.
“이럴 때만 쓰는 단검입니다. 아무리 저라도 사람을 찌른 검으로 과일을 깎거나 하진 않습니다.”
“그럼 받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유릭이 과일을 입에 옮겼다.
아삭.
달고 청량한 과일이 유릭의 입안에서 부서져 내렸다.
과일을 베어 먹으며 유릭이 팔랑팔랑 책 페이지를 넘겼다.
초대 가주의 조사를 위해 이전부터 보고 있는 가문의 역사책이다.
글렌은 뒤쪽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기척을 죽이고 서 있었다.
잠시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중.
페이지를 넘기던 유릭이 물었다.
“쥐새끼 찾는 건 어떻게 됐지?”
“쥐새끼요?”
“형님이 침투시킨 부하 놈들 수색 말야.”
아이작이 보낸 수하의 수색.
그게 글렌에게 유릭이 가장 먼저 명령한 것이었다.
“아직은 아무 단서도 없습니다. 며칠 밖에 지나지 않았구요.”
“기사단 측에는 뭐 정보 없어?”
“애초에 13기사단은 도련님의 명령과는 별개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엘린 로스카의 지휘로요.”
“누나의?”
“가주에게 받은 명령이라고 합니다. 노친네가 13기사단도 그쪽에 협력하라고 해서 손이 남는 이들은 다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유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머니도 그냥 넘어가진 않았다.
할아버지도 마찬가지고.
‘어머니랑 할아버지라.’
아이작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 차이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죄를 지어 의절당한 가문의 장남.
유릭이 20살이 된 해 아이작이 돌아왔을 때, 그는 얘기했다.
마왕의 유산을 재차 봉인하기 위해 떠났던 것이고, 실제로 그것에 성공했다고.
많은 이들이 거짓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아이작에게 마왕의 힘의 흔적은 없었다.
오랜 조사 끝에 결국 그의 말은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발렌티나는 아이작을 다시금 가문에 들이게 되었다.
마왕의 힘이 문제 되어 쫓아냈던 것이니 그게 해결된 지금 쫓아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레오폴딘은 달랐다.
그는 결코 아이작의 말을 믿지 않았다.
후일 아이작이 적마도가와의 평화 협정을 이끌어냈을 때에도 레오폴딘만은 계속 그를 눈엣가시 취급했다.
발렌티나보다는 레오폴딘이 훨씬 감정적이란 뜻이다.
‘나한텐 그쪽이 더 좋지.’
유릭에겐 그렇게 감정적인 쪽이 좋다.
적의 적은 아군인 법.
아이작을 눈엣가시 취급하는 할아버지의 존재는 그에겐 든든하기만 한 존재였다.
그런 의미론 레오폴딘의 관심을 받는 지금 상황도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또 시험이니 뭐니 귀찮게 구는 건 사양이지만.
“그럼 괜히 발품 팔지 말고 기사단 내의 정보를 빼내오는 데 주력해 봐. 그쪽이 훨씬 빠르겠군.”
“그렇게 하는 중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단서가 들어오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글렌에게 다시금 임무를 재확인시켰다.
이걸로 아이작의 수하를 색출하는 일은 당분간 괜찮겠지.
자신이 직접 찾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가능성 있는 방법이다.
‘그럼 난.’
그럼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뻔했다.
‘수련이나 해야지.’
해야 할 일이라곤 오직 하나. 수련뿐이다.
3년 후에 있을 18살 성인식의 준비도 해야 하니까.
* * *
언제나와 같은 백월봉의 수련장.
유릭은 토벌 대회의 부상으로 받은 단약을 꿀떡 삼켰다.
5알 중에 마지막 남은 단약이었다.
‘후우.’
단약을 삼킨 후 염화신무의 운기를 시작한다.
그것으로 약 기운을 더욱 활성화시켜 몸 곳곳에 녹아들게 한다.
염화신무의 기운에는 단순히 파괴적인 불꽃뿐만 아니라 음식의 양분을 더욱 빠르게 흡수하는 성질도 있었다.
그건 회귀 직후에 알게 된 것이다.
‘그때의 난 폐인 생활을 하느라 깡마르고 입도 짧았었는데.’
본래의 유릭은 그랬다.
13살 때뿐만 아니라 20살이 넘을 때까지도 어두운 방에서 눈이 상할 정도로 책만 읽어대는 그런 남자였다.
그러나 13살로 회귀한 직후, 염화신무를 익히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달라졌다.
염화신무의 불꽃이 몸의 잡스러운 노폐물을 모두 태워 버린다.
그러자 빈자리를 채우겠다는 듯 무척이나 식욕이 왕성해지고, 소화 역시 이전보다 훨씬 깔끔해졌다.
그 결과 또한 눈에 보일 정도였다.
영양 넘치는 요리를 폭식하듯 퍼먹으며 운동까지 병행하자,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붙고 몸의 성장 역시 그만큼 빨랐던 것이다.
2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선 그때만큼의 극적인 효과는 없어졌다.
하지만 지금도 남들보다 신진대사가 더욱 왕성하다는 느낌은 있었다.
‘나중에 영약 같은 거라도 찾아봐야겠어.’
아마 영약 역시 비슷한 효과를 보지 않을까 싶다.
보통 영약을 먹는다고 하면 담긴 기운의 5할만 흡수해도 잘 흡수했다고 한다.
나머지 5할의 기운은 날아가는 셈이다.
이 날아가는 기운을 얼마나 잘 붙잡느냐가, 영약을 얼마나 잘 소화했느냐를 나타내는 지표다.
과연 염화신무는 영약의 기운까지 뛰어난 흡수율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지…….
‘오늘은 유달리 집중이 잘되는데.’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몇 시간 동안 소주천을 몇 바퀴나 돌렸다.
단전의 기운은 이미 옛적부터 가득 들어차 있다.
3성 크기의 단전에 내기가 지나치게 쑤셔 넣어져 있어, 마치 터지기 직전의 풍선과 같았다.
‘아직 4성은 안 되나.’
그럼에도 4성에 오를 수 없다.
그 자그마한 벽을 돌파하기 위한 깨달음을, 유릭은 아직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오늘의 운기가 잘 되더라도 결국 경지가 오르지 못하면 소용없다.
그 사실에 약간의 조급함을 느끼며 유릭이 눈을 떴다.
“응?”
그 순간, 그는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너무 조용하다.
그리고 적막하다.
평소에는 운기가 시작되면 크고 작은 동물들이 모여들곤 했다.
최하급의 숲의 정령도 모여들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대령도 어디선가 어슬렁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도 없다.
‘뭐지?’
이상하다.
분명 아무도 없이 혼자 있는 수련장은 평화로웠으나, 위화감이 느껴진다.
아니, 이건 평화 따위가 아니다.
매일같이 보던 풍경이 그 자리에 없다는 것만으로, 일상의 공기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무슨 일이 생겼다.’
생기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쪽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잠시 고민한 유릭이 휴게실 삼아 만들어놓은 천막에 들어갔다.
그리고 메모를 남겼다.
-아니스. 잠깐 숲을 수색하러 갈 건데, 이걸 보면 바로 따라와 줘. 표식 남길게.
이 백월봉에 올라올 때는 글렌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의지할 수 있는 건 1시간 후에 대련 약속을 잡은 아니스뿐.
이곳에 도착해 자신이 없는 모습을 본 아니스는 천막에 들어와 메모를 발견하겠지.
그러면 곧바로 표식을 찾아 자신을 따라와 줄 것이다.
이 백월봉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몰라도, 7성 기사를 데리고 해결하지 못할 일이 생겼을 리 없었다.
‘난 먼저 정찰해 보자.’
메모를 둔 후에 유릭이 천막을 나와 숲으로 들어갔다.
출발의 표식으로 눈에 띄는 나뭇가지를 꺾으며.
* * *
친절한 등산로 따위는 없는 산이기에, 유릭은 상당히 험한 길로 나아가야 했다.
가는 도중 그는 전신을 긴장시키며 내기를 돌렸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지더라도 곧바로 반응할 수 있도록.
‘평소에는 운기가 아니라 이 정도만 해도 숲의 정령들이 달라붙곤 했는데.’
숲의 정령은 동물들보다 더욱 민감한지, 운기가 아니라 내기를 끌어올리는 것만으로 쪼르르 날아오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군.’
그것이 지금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눈에 비치는 숲도 청량감을 잃은 듯이 보였다.
싱그러운 숲이 아니라, 마치 사막에서 말라가는 숲과 같은 느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그저 느낌이기에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유릭은 그 느낌을 결코 경시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 주위를 순찰하던 중.
“!”
유릭이 몇몇 동물들의 사체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한두 마리로 시작한 그것은, 발을 옮길 때마다 조금씩 많아졌다.
유릭의 얼굴이 굳어졌다.
‘…….’
육식동물이 배를 채우기 위해 사냥한 거라면 이해가 된다.
그건 자연의 섭리니까.
하지만 이 일대에 늘어서 있는 사체들은 그런 게 아니었다.
대자연의 법칙에 속한 죽음이 아닌, 명백히 인위적인 죽음.
이 숲에 누군가 있다.
그건 이미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크릉-”
그때, 익숙한 소리가 들려 유릭이 그곳을 바라보았다.
“대령! 뭐야, 그 상처!”
그곳에 있는 건 새빨간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하얀 호랑이였다.
전신에 자상이 가득하고 눈가엔 커다란 상처가 있어 한쪽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른쪽 앞다리가 부러졌는지 절뚝거리고 있다.
다친 눈으로 유릭을 보고, 부러진 다리로 힘겹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
그렇게 물어보지만 호랑이가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대령은 영리한 호랑이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명백한 의사를 표현했다.
유릭의 옷자락을 물고 당긴 것이다.
무척이나 급하다는 듯이.
“따라오란 말이구나.”
“크릉.”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유릭이 달리는 대령의 뒤를 따랐다.
대령은 분명 부러진 발이 아플 텐데도 그걸 참으며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유릭은 눈을 의심했다.
그의 눈앞에, 마치 사막에 피어오르는 것과 같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빙하백가와는 일절 연이 없는 후덥지근한 열기.
그리고 그곳에서 느껴지는.
‘……불의 기운.’
유릭의 눈이 가라앉았다.
곧바로 판단했다.
지원을 불러오자.
‘적마도가…… 아칸 놈들이 몰래 침입했다.’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는 상황.
적이 몇인지도 얼마나 강한지도 모른다.
지원을 부르자는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컹!”
그런데, 대령이 다시금 유릭의 옷자락을 물었다.
“대령?”
하얀 호랑이가 유릭을 바라본다.
아까와 같이 무척 다급하단 눈빛으로.
유릭이 잠시 갈등했다.
분명 여기는 지원을 불러 함께 들어가는 쪽이 맞다.
하지만 대령은 영리한 녀석이다.
영물이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똑똑했다.
그리고 자신과는, 나름 연을 쌓은 녀석.
적이 압도적으로 강하고 그 숫자 또한 많다면, 여기서 자신을 만류할 리가 없었다.
자신을 사지로 끌고 들어갈 녀석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이 모든 것은 대령을 믿었을 때의 판단.’
여기서 홀로 열기 속으로 들어간다면 누구나 다 비웃을 것이다.
말 못 하는 짐승을 어찌 믿고 그릇된 판단을 내리냐며.
대령이 유릭의 옷자락을 당겼다.
그 모습은 정말로 한시가 급해 보였다.
당장에라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듯이.
그걸 본 유릭은.
“가자.”
모두가 비웃을 쪽의 선택을 내렸다.
믿는다.
그가 대령을 따라 열기 속으로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