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26화
26화. 누나
처음엔 불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망망대해와도 같은 그곳에서, 유릭은 이리저리 휩쓸리기만 할 뿐이었다.
휘둘리는 것이 당연했다.
아칸의 가주가 직접 담았다고 하는 불꽃엔, 지금의 유릭으로선 까마득한 저력이 숨어 있었으니.
이 세상 그 어떤 화염술사라도 그 불꽃을 온전히 받아내진 못하리라.
하지만.
‘큭!’
유릭은 ‘이 세상’의 화염술사가 아니다.
다른 세상의 무공인 염화신무(炎華神武)는 아칸의 불꽃과는 궤를 달리했다.
누가 우월하고 누가 열등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동등한 불꽃.
그리고 동등한 불꽃이라면, 주인이 저 멀리 남단에 떨어져 있는 아칸 가주에 비해 유릭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끄아아아아!”
물론 그 과정이 수월했다는 것은 아니다.
거대한 불의 도장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쾅쾅 찍어대는 것 같은 기분.
하지만 기어코 염화신무는, 아칸 가주의 불꽃을 빨아들였다.
한 올의 불꽃도 남김없이 모조리.
‘5성…….’
다시 한번 껍질이 깨졌다.
단 하루 만에 3성에서 5성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걸 확인한 것을 마지막으로 유릭의 의식이 급속도로 침전했다.
급속도로 2단계나 뛰어오른 성장의 여파가 그의 정신을 지진처럼 뒤흔들어 놓았다.
‘큭!’
천근같이 무거운 눈꺼풀을 필사적으로 들어 올렸다.
적이 눈앞에 있는데 쓰러지다니 말이 되는가?
그럼에도 잠은 쏟아져 내렸다.
연약한 인간의 의지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단숨에.
그때.
‘……!’
무언가 거대한 기운이 느껴진다.
점점 다가오는 그것.
그것의 정체를 깨닫자 탁, 하고 긴장이 풀렸다.
더 이상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릴 필요가 없어졌다.
털썩!
유릭이 쓰러졌다.
그를 위협하듯, 혹은 지키듯 주변을 돌고 있던 불의 소용돌이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쓰러진 유릭과 파르르 떨고 있는 레오르뿐.
레오르가 바짝 마르는 목구멍을 느끼며 유릭을 보았다.
‘내가 대체 뭘……?’
지금 자신이 무엇을 본 거지?
다시 떠올려도 믿기지 않을 만큼 충격적인 광경.
로스카의 삼남인 유릭 로스카가 불의 마나를 익혔다는 건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처음 그걸 들었을 땐 코웃음 쳤다.
하찮은 얼음의 핏줄이 감히 위대한 불의 마나를 익혀보겠다고?
머지않아 한계를 느끼고 좌절할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고.
그랬는데 그 하찮은 꼬맹이가 가주의 불꽃 앞에서 행한 건.
가주를 제외한, 아칸의 그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할 위업이었다.
‘지금……! 지금 죽여야 돼!’
불현듯 미친 듯한 압박감이 그의 전신을 감싸 올랐다.
지금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일 녀석이 얼마나 거대한 적이 되어 나타날지 알 수 없다.
물론 가주님이 저런 어린놈에게 당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 세대는 어떨까?
다음 대 아칸의 후계자들 중에 방금 본 유릭과 비견될 만한 이가 있었던가?
그들 중에 폭주하는 가주의 불꽃을 온전히 받아낼 이가 있었던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렇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만큼 유릭이 보여준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기회다. 지금이 기회야. 지금 아니면 없어!’
그리 생각하면 이건 천재일우의 기회다.
비록 임무는 실패, 부하는 모두 죽었고, 자신 역시 도망치지 못하고 잡힐 테지만.
그 모든 걸 감안하더라도 이건 다신 없을 기회다.
고작 다섯 명의 목숨으로 로스카의 심부에 웅크리고 있는 이 미친 재능의 꼬마를 죽일 기회!
꿀꺽.
그가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도끼를 주워 들었다.
아이를 죽인다는 죄책감에 떨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 자신이 행하는 일이, 후일 아칸과 로스카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을 알기에 떠는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집행한다.
그가 도끼를 들어 올렸다.
노리는 것은 머리.
단 일격에 절명시킬 수 있는 치명적인 급소.
“으아아아아아아—!”
말라비틀어진 목구멍에서 애써 함성을 내뱉으며, 그가 도끼를 내리찍었다.
파삭!
언제 들어도 섬뜩한 소리와 함께 피보라가 튀어 오른다.
레오르의 입가에 희열이 맴돌았다.
성공했다고 생각했기에.
그런데.
“……어?”
허공에 튄 피보라가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붉은 수정처럼 단단히 굳어선 중력을 거스르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단.
레오르의, 잘려 나간 두 팔에서 자라나기라도 한 듯, 피의 수정이 붙어 있었다.
“끄아아아아아악!”
뒤늦게 상황이 파악되며 고통이 찾아왔다.
두 팔이 팔꿈치 부근에서 숭덩 잘려나갔다.
거기서 튄 피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허공에서 얼어붙어 피의 수정처럼 보인 것이다.
도끼를 단단히 쥐고 있던 그의 두 손은 몸에서 벗어나 저 멀리 떨어진 채였다.
“내 동생한테 무슨 짓이지?”
레오르가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이 장소의 뜨거운 열기를 단숨에 날려버린, 얼어붙을 듯한 차가운 분노를 내비치는 여성이 있었다.
“엘린, 로스카!”
엘린이 레오르를 보았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놈은 레오르 아칸이로군. 아칸의 방계 중 하나인.”
레오르가 엘린을 아는 것처럼 엘린 역시 레오르를 알고 있었다.
주요 가문의 인적 사항 정도는 모두 꿰고 있는 그녀다.
거기에서 협상의 여지라도 느꼈는지, 레오르가 무언가 얘기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여지 따윈 없다.
엘린은 그와 대화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후-”
엘린이 짧게 숨을 토해냈다.
그 숨은 반짝이는 입자가 되어 레오르를 뒤덮었다.
다이아몬드 더스트.
너무나 아름다운 그 빛의 입자를 보며, 레오르는 미칠 듯한 공포로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저 반짝이는 입자에 대한 것은 잘 알고 있다.
25살의 어린 나이에 8성의 벽을 뚫고 완성한 엘린의 비기.
8성의 경지, 마스터라 불리는 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파훼 불능의 고유 마법.
“잠……!”
레오르가 잠깐 멈추라고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파사사삭!
반짝이는 얼음의 입자들이 안쪽에서, 그리고 바깥에서 레오르란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피의 회오리가 펼쳐진 후.
그곳에는 살 조각 한 점 남지 않았다.
사람 하나 분량의 피 웅덩이가 차갑게 얼어붙은 채 고여 있을 뿐.
그러고 나서야 엘린은 간신히 화를 가라앉혔다.
감히 이 혹한의 땅에서 로스카의 아이를, 자신의 동생을 해하려 하다니.
냉정하게 생각하면 사로잡는 것이 가장 베스트인 선택이다.
하지만 엘린은 놈을 죽인 것을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만약 다시 나타난다 해도 다시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가씨. 도련님은 무사합니다.”
“정말?”
아니스가 눈치 빠르게도 유릭의 상세를 살피자, 엘린이 반짝이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귀신처럼 분노하던 모습은 어딜 가고, 남아 있는 것은 동생을 걱정하는 한 명의 누이뿐이었다.
“눈에 띄는 외상은 없습니다. 마나의 흐름도 안정되어 있구요. 그냥 기절했을 뿐입니다.”
“하아…….”
레오르에게 뭔가를 당해서 쓰러졌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아니었던 모양이다.
“혹시 모르니까 의원에게 가자.”
“예.”
아니스가 쓰러진 유릭을 들어 들쳐 메려 하였다.
그때 그녀가 자신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엘린을 보았다.
“아가씨?”
이게 무슨 뜻인지?
영문을 몰라 갸웃거리는 아니스를 향해 엘린은 계속 팔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 * *
몸이 흔들린다.
서서히 부상하는 의식 속에서도 몸의 흔들림은 느껴졌다.
그리고 신체의 피로나 공복의 상태 등으로 알 수 있었다.
기절한 이후로 그리 많은 시간은 지나지 않았다.
“으음…….”
유릭이 눈을 떴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누군가에게 업혀 있는 자기 자신.
그 사람이 걸을 때마다 몸이 흔들린다.
그것은 무척이나 그리운, 옛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감각이었다.
“아, 깨어났니?”
“……누나.”
누이인 엘린이 그곳에 있었다.
역시 그 기운은 누나였구나.
“너랑 싸우던 놈은 내가 죽였다. 지금 산을 내려가는 중이야. 곧바로 의원에게 가자.”
“아, 응.”
“어디 아픈 곳은?”
“없어. 괜찮아.”
엘린이 유릭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건네 왔다.
그중에는 레오르가 왜 여기 있는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 것은 나중에 물으면 된다.
지금 그녀가 묻는 것은 유릭의 안위를 살피기 위한 질문밖에 없었다.
유릭이 아직은 조금 흐릿한 눈의 초점을 맞추려 애쓰며 대화를 나눴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가 떠오르네.”
“어렸을 때?”
“옛날에도 이렇게 업어줬잖아.”
유릭이 지금 느끼는 그리운 감각은, 어린 시절 엘린이 그를 업어줬던 기억에서 온 것이었다.
정우였던 그는 고아였기에 부모의 어부바 같은 것은 받아본 적이 없었고, 발렌티나 또한 그를 그렇게 대한 적이 없었다.
그에게 가족에게 업힌 기억이라곤 엘린의 기억이 전부였다.
“그렇게 어릴 때 일을 기억해? 네가 3살도 되기 이전의 일인데.”
“그때 누나가 나랑 데릭한테 인형 옷을 입혔던 것도 기억나. 시녀들이랑 꺅꺅거리고 있었잖아. 설마 지금도 우리한테 그런 걸 입히고 싶어 하는 건 아니지?”
“아, 아니야! 그건 너희가 아기일 때나 잠깐 그랬던 거고……!”
별것 아닌 대화였다. 정말로 사소한 대화.
하지만 가족 간의 정이 모자란 유릭에게 있어선 무엇보다 귀중한 한 때였다.
그렇게 그가 아주 잠시 따스한 대화를 즐기고 있을 때.
—반짝!
앞쪽에서,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녹색의 빛.
그것은 익숙한, 숲의 정령이 발하는 빛이었다.
그 순간 흐릿했던 눈동자가 또렷해지며, 유릭의 정신은 차가운 현실을 떠올렸다.
“대령!”
유릭이 당장에 업혀 있던 엘린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유릭?”
“누나. 그곳에 다친 호랑이는 없었어?”
“호랑이? 있었는데 피 흘리면서 숲속으로 들어가던데?”
“어디로?”
“글쎄? 잘 모르겠는데.”
엘린과 아니스는 기절한 유릭을 살피느라 대령에게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애초에 그녀들에게 대령은 산 중 어디에나 있는 흔한 짐승에 불과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살아 있었구나. 하지만 괜찮은 건가? 당장 치료가 필요한 게 아닌가?’
유릭이 당장 뒤로 돌았다.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갈 생각이었다.
“어디 가려고?”
“도련님!”
엘린과 아니스의 다급한 목소리를 뒤로한 채, 유릭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아우!”
그의 앞에, 아우거리는 정령 하나가 나타나 유릭의 옷을 힘껏 당겼다.
유릭이 눈을 크게 떴다.
자아도 실체도 없는 최하급의 정령은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실체가 있는 정령은 처음이었다.
15㎝나 되나 싶은 신장.
녹색의 머리는 싱그러운 풀잎을 연상케 했고, 그 품에는 나뭇가지 하나를 꼭 껴안고 있었다.
일전에 보았던 새하얀 나뭇가지.
숲의 근원이었다.
“정령?”
“세상에…….”
어느새 뒤쫓아 온 엘린과 아니스가 유릭과 함께 있는 정령을 보곤 무척이나 놀랐다.
그러나 유릭은 놀랄 틈도 없었다.
정령이 나타난 이유가 짐작이 갔기에.
“대령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구나.”
“아우아우!”
정령이 입을 뻥긋거리며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릭의 옷을 놓고 하늘로 날아오른 정령을 따라, 유릭이 지체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