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28화
28화. 신검이나 마검
한창 병사들의 수색이 계속되고 있었다.
엘린이 지휘하는 병사들은 아칸의 흔적을 찾으며, 그 과정에서 유릭이 생포한 워렌과 전리품인 아티팩트 역시 가져갔다.
다만 아티팩트는 위험이 있는지 없는지만 확인하고 다시 돌려준다고.
엘린이 스스로 책임지겠다 했으니 떼먹거나 그런 일은 없겠지.
그렇게 그녀가 사건의 처리로 바삐 돌아다니고 있을 때.
유릭은 방에서 녹시아를 살피고 있었다.
‘너덜너덜하군.’
단단함이 장기이던 녹시아는 지금 걸레짝처럼 변해 있었다.
이가 빠지고 금이 가고, 난리도 아니다.
간신히 검의 형태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
‘부담이 너무 컸나.’
본래 3중첩의 화룡검화만 하더라도 녹시아가 버틸 수 있는 한계치에 가까웠다.
그런데 거기에다 파이어 볼트의 술식을 가미하는 것으로 더욱 화력을 높여 버렸다.
단순히 파이어 볼트만큼의 위력이 더해진 정도가 아니다.
파이어 볼트의 ‘폭발’이라는 속성이 화룡검화의 불꽃에 가미되며, 위력이 몇 배로 증폭되었다.
아무리 녹시아라도 그 폭발의 여파를 견디진 못한 모양.
“쩝.”
이렇게 버리기엔 많이 아쉬웠다.
화룡검화를 쓰는 데 이만큼 적합한 검이 없었는데.
“글렌.”
“예.”
글렌을 부르자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녀석이 갑자기 솟아 나왔다.
충성심 높은 섀도우처럼 부복하는 글렌.
물론 유릭은 알고 있었다.
겉보기만 이럴 뿐이지 녀석에게 충성심은 ‘충’자도 없다는 것을.
“대장장이를 한 명 찾아줘.”
글렌이 녹시아를 힐긋거렸다.
“그 걸레짝 같은 검을 수리할 생각이라면 차라리 새 검을 구하는 게 빠르리라 생각합니다만.”
이것 봐라.
주인의 애검을 걸레짝이라고 부르는 섀도우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건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니까 찾기나 해. 녹시아를 다뤄본 경험이 있으면 더 좋고.”
“예. 적합한 이를 수배해 보겠습니다.”
글렌이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졌다.
혼자 남은 유릭이 완전 박살 나기 직전의 녹시아를 쓸어보았다.
그때 문득, 유릭은 자신을 잡아당기는 것 같은 인력(引力)을 느꼈다.
아니, 자신을 당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기운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혹시?’
녹시아의 특성은 ‘원형으로 돌아가려는 성질’.
그것을 마나로 구현해 놓은 것이 바로 이 검의 근원이다.
그렇다면 혹시 기운을 보충해주는 것으로 자동으로 수리가 되는 것일까?
‘한 입만 줘볼까?’
유릭이 반신반의하며 녹시아의 검신에 내기를 불어넣었다.
그런데.
쑤욱!
내기가 순식간에 뭉텅이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유릭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야야, 한 입만이라고!”
그러나 유릭의 말은 아랑곳 않고, 녹시아는 유릭의 내기를 하마처럼 퍼먹고 있을 뿐이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백월봉에서의 사건은 이미 영지 내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산에서 갑자기 불기둥이 올라왔었다매?”
“약초꾼 제이크가 똑똑히 봤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떨어졌나 싶다더이.”
백월봉에서 커다란 불길이 피어올랐던 사건.
그것을 목격한 이는 꽤 많았고, 그 목격담이 살을 부풀리며 여러 갈래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엘린의 발표가 모든 소문을 불식시켰다.
—유릭이 적의 첩자를 잡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다. 피해는 없으니 걱정 말도록.
유릭 공자가 적의 첩자를 색출해 체포했다는 소문.
“진짜로 동굴 속에 꽁꽁 묶인 놈들이 있더라고.”
“듣기론 적마도가 놈들이라고 하던데?”
엘린의 명으로 산을 수색하던 병사들이 그 발표를 뒷받침해 주었다.
일각에선 첩자가 들어왔단 사실 자체에 불안의 목소리도 있었으나, 이 시대에 적지에 첩자를 심고 그것을 색출해 내고 하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었다.
유일무이한 통치자인 제국이 있던 시대에 비하면 현재는 10개나 되는 대가문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시대니까.
때문에 소문의 중심은, 첩자의 존재가 아니라 그걸 찾아내 붙잡은 유릭에게 향했다.
“엘린 공녀의 자작극 아닙니까?”
한편으론 의심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있었다.
“자작극이요?”
“가문 내에서 유릭 공자의 평판이 좋지 못하니까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벌인 일이 아니냔 말입니다.”
“확실히 그럴듯하군요. 안 그래도 요즘 불의 마나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늘어나는 느낌인데……. 태상 가주조차 유릭 공자의 불의 마나에 아무런 얘기를 안 하지 않습니까?”
“혹시 물밑에서 적마도가와 화친이라도 하려고 협상 중인 것은 아니겠지요?”
그들의 정체는 적마도가와의 분쟁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강경파였다.
사적인 원한으로, 혹은 개인의 이익으로 분쟁을 유지하려는 이들.
그런 강경파 내에선 이번 사건 자체를 유릭의 입지를 늘리기 위한 자작극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한 번 의혹이 피어나니 아무리 반박 근거가 나와도 가라앉지 않았다.
본디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생물.
유릭 자체를 믿고 싶어 하지 않는 그들에게 유릭의 활약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 무리였다.
그런 흐름을 끊어준 것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엘린 공녀는 유릭 공자의 공적이라고 이미 발표했다. 경거망동은 삼가도록.”
베르겐 장로.
강경파의 필두나 다름없는 그가 그런 얘기를 꺼낸 것이다.
“장로님?”
“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희는 어디까지나 가문을 위해서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 보자는 취지로…….”
같은 강경파의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베르겐의 말은 중립을 지키자는 것이었지만, 그들 입장에서 중립을 운운하는 것은 유릭을 두둔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애초에 유릭 공자와 가장 분란이 많았던 것이 장로님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섣부른 추측은 삼가라는 말일 뿐이다.”
베르겐 장로는 그렇게까지만 얘기하곤 입을 꾹 다물었다.
팔짱을 끼고 눈까지 감은 모습에서 더 이상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뜻이 느껴졌다.
“장로님께서 그러시다면야…….”
“……잘 알겠습니다.”
파벌에서도 나름 영향력이 높은 베르겐이 저리 얘기하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강경파 내부에서 돌던 자작극설(說)은 종식되었다.
이렇듯 이번 사건으로 다양한 사람이 움직이고, 또 다양한 생각들이 충돌했다.
가문이 뒤집힐 정도로 큰일까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첩자 몇 명 처리하고 끝’ 같은 단순한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일들이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을 때.
유릭은 며칠째 녹시아와 끙끙 씨름을 하는 중이었다.
‘이게 진짜!’
기껏 운기한 내력이 다시 바닥을 보인다.
녹시아는 유릭의 기운을 사양하지도 않고 꿀떡꿀떡 삼키기만 했다.
단전이 바닥을 보이자 유릭이 녹시아를 놓고 운기를 시작한다.
그렇게 한참 동안 기운을 쌓아 다시 녹시아를 쥐면.
쑤욱—
그걸 다시 녹시아가 모조리 집어 먹는다.
이런 일이 벌써 며칠이나 반복되었다.
유릭은 밀려오는 자괴감에 이마를 짚었다.
무슨 어미 새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녹시아는 먹이를 달라고 입을 벌리고 있는 새끼 새인가?
‘수리되는 게 보이지만 않았어도 그냥 확.’
이런데도 이 행위를 멈추지 않은 것은 녹시아가 수리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운을 먹일 때마다 금이 간 곳이 고쳐지고 점점 깨끗해진다.
이미 며칠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겉모양만은 완전히 말끔해진 채였다.
다만 한 군데만이 달라졌다.
얼핏 보기엔 부서지기 전과 완전히 같은 철검의 모습이었으나.
찌잉-
햇빛에 검신을 비춰보면 은은하게 빛나는 붉은 유려한 곡선들이 보였다.
자세히 보면 보이지 않을 만큼 은은했지만, 한 번 존재를 알고 나니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렇게 오늘도 그가 녹시아에게 기운을 먹이는 데 한창일 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이 시간에 누구지? 라고 생각할 때, 시녀가 얘기해 주었다.
“로헨 공방의 장인이라고 합니다.”
“아.”
기억이 났다.
며칠 전 글렌에게 녹시아를 수리할 장인을 알아봐 달라고 얘기했었지.
스스로 수리를 시작했기에 잊고 있었는데, 그 장인이 이제야 찾아온 모양이었다.
“응접실로 안내해.”
그렇게 말하고 유릭이 간단히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거울을 보며 정리하고 있으려니, 언제 왔는지 거울 너머로 글렌이 부복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적당한 장인을 찾아왔습니다.”
“누군데?”
“마크 로헨. 로헨 공방의 필두로 로헨 공방은 녹시아를 제작한 곳이기도 합니다.”
“진짜? 제작자 본인을 데려온 거야?”
“그럴 리가요.”
말은 정중하다.
하지만 눈빛에는 ‘그럴 리가 없잖아, 멍청아’라든지 ‘바보냐?’라든지, 그런 생각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그냥 기분 탓인가…….
“녹시아가 제작된 지 100년도 넘게 지났습니다. 죄송하지만 마크 로헨은 평범한 인간으로 수명이 100살이나 되진 못합니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니다. 저 말본새 좀 보란 말이다.
“하아…… 그래서 뭔데?”
유릭이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녹시아를 제조한 건 마크 로헨의 증조할아버지입니다.”
“후손이란 얘기군.”
“예.”
그래, 뭐. 눈빛이 어떻건 간에 명령은 제대로 수행했다.
예의 바르지만 무능한 놈보단 불손해도 유능한 놈이 낫지.
게임에서도 말은 곱지만 5데스씩 하는 팀원보다는 욕지거리를 해도 5킬씩 해주는 팀원이 나은 법이다.
“마크 로헨이라…….”
녹시아를 단련한 장인의 후손. 과연 그에게 어떤 얘기를 들을 수 있을지.
약간의 기대와 함께 유릭은 응접실로 향했다.
* * *
응접실에 도착하니 유릭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덩치가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수염은 덥수룩하고 다리는 쩍 벌리고.
유릭이 왔는데도 일어나지조차 않는 태도에 시종이 한마디 하려 했지만, 그전에 유릭이 맞은편에 적당히 앉았다.
“마크 로헨인가?”
“맞소이다. 댁이 날 부른 도련님인가?”
보통 아니스나 시종들이 유릭을 도련님이라 부르는 것은, 일종의 친근감의 표현이다.
친분이 없는 이들은 공자라고 보통 부르곤 했다.
하지만 마크가 얘기한 도련님에는 친근감보단 애송이라는 뜻이 강하게 느껴졌다.
“바쁘니 용건만 간단히 얘기하쇼. 지금도 주문이 몇 건이나 밀려 있단 말입니다.”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유릭은 개의치 않았다.
글렌의 비꼬는 말투를 한참 듣다 보면 이런 퉁명스러움은 오히려 솔직해서 호감이다.
“이걸 봐줬으면 좋겠는데.”
그가 녹시아를 꺼내 마크에게 보였다.
그것이 녹시아란 것은 마크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가 툴툴거리며 검을 들었다.
“쳇. 잘 써달라고 할아버님께서 진상한 검이 꼬맹이 장난감으로 쓰이고 있다니.”
작게 투덜거리고 있지만 훤하게 들려왔다.
아마 들으라고 하는 소리겠지.
그러나 검을 살피던 중, 마크의 표정이 변하였다.
불만이 가득하다 대놓고 알려주던 찡그린 표정이, 지금은 이보다 진중할 수 없었다.
장인의 표정이 된 것이다.
“……이 검, 어떻게 된 거요?”
마크가 물었고, 유릭이 설명했다.
모종의 이유로 검이 반쯤 박살 났고, 그걸 며칠 동안 계속 마나를 주입해 살려놨다고.
“며칠 동안? 계속했단 말이오?”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면 계속.”
“미친!”
마크가 대뜸 탄성을 내질렀다.
그건 검의 상태 때문이 아니라,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내기를 넣었단 유릭의 말 때문이었다.
부서진 녹시아의 수리에 마나를 주입하는 것은 적절한 판단이다.
하지만 녹시아는 지극히 탐욕스럽다.
보통 한 번 물게 되면 탈진할 때까지 주인의 마나를 놓지 않는다.
그런데 그걸 내내 계속했다고?
“검에는 이상 없소.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강해졌지.”
“강해져?”
“정확히 말하면 검 자체가 강해진 것은 아니고, 도련님과의 연결이 강해졌다고 보면 되오. 그야 그렇게 마나를 퍼부었으니 당연한 일이다만.”
연결이 강해졌다.
그것은 즉, 유릭이 쥘 때의 한해서는 기존보다 강한 성능을 낸단 말이었다.
유릭과의 상성이 좋아졌다 해야 하나.
“하지만 이건…….”
다만,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왜?”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별일 아니라 생각한 마크가 손을 저었다.
하지만 유릭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 오래도록 쓸 애검이다. 미심쩍은 부분이 단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되었다.
“말해. ‘하지만’, 뭐지?”
“……햇빛에 비췄을 때 기묘한 무늬가 보이오. 아마 도련님의 마나의 영향인 듯한데.”
“그건 알아.”
“이런 현상이 녹시아에 나타난 적은 없소.”
“응?”
유릭은 그것이 그냥 일반적인 현상이라 생각했다.
예를 들자면 녹시아의 주인으로서 서명을 하는 그런 느낌이라고.
다음 대 주인이 새로 검을 잡게 되면 새로 서명을 하고, 뭐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처음이라니.
“솔직히 잘 모르겠군. 다만 검의 상태만큼은 완벽하오. 당장 휘둘러도 문제없을 정도로.”
마크가 녹시아를 돌려주었다.
그의 표정은 처음에 비해 많이 풀린 채였다.
유릭이 녹시아를 단순히 장난감처럼 다루고 있는 게 아니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고맙군.”
유릭이 녹시아를 한번 쓸어보곤 검집에 넣었다.
장인의 인증을 받았으니 앞으로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으리라.
“한 가지만 더.”
마크가 마지막으로 유릭을 불렀다.
“뭐지?”
“비록 도련님이 쥘 때 한정이라곤 하나 검의 완성도가 더욱 높아졌소. 지금의 녹시아는 보검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지. 세월이 흐르면 신검이나 마검이 될 그런 씨앗이 되었다고 봐도 될 것이오.”
무척 흥미로운 말이었다.
신검이나 마검이라는 것들은 과거 보검이었던 검이 세월과 위업을 쌓아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보검이 그런 신검, 마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뛰어난.
보다 선택받은.
그런 검만이 될 수 있었다.
“신검이나 마검이라……. 그래서 녹시아는 둘 중 어느 쪽이 되는 건데?”
유릭의 질문에 마크가 녹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결코 가볍지 않은 어조로 대답했다.
“그건 도련님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걷느냐에 따라 다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