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29화
29화. 벌써 3년
하루하루가 흘러 어느덧 3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18살이 된 유릭은 이젠 훌쩍 커 있었다.
단골초로 빚은 단약을 먹은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키도 쭉쭉 자랐고 뼈마디도 보통보다 훨씬 단단했다.
회귀 전의 몸보다도, 정우였을 때의 몸보다도 훨씬 마음에 드는 몸뚱어리였다.
‘대령은 오늘도 다른 산에 가 있나?’
백월봉의 수련장.
대령은 그날 이후로 두어 달 정도 모습을 감추었었다.
그러곤 어느 날 완치된 몸으로 나타나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릭의 곁에서 볕 쬐는 고양이처럼 골골대었다.
다만, 최근은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힐라사랑 같이 다른 봉우리까지 어슬렁어슬렁 산책을 하는 것이 취미가 된 모양.
‘벌써 3년인가.’
3년이란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많은 것이 변한 것 같으면서도, 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만 같은 시간.
세계수의 정령인 힐라사는 스스로 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대령의 등에 타고 있다.
대령의 하얀 털을 꼭 부여잡고선, 이곳이 내 자리라고 주장하듯이 결코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엘린과 아니스는 28살이 되어 더욱 성숙미가 돋보이게 되었고, 반면 23살이 된 글렌은 한층 더 뻔뻔해졌다.
여전히 공손한 태도로 툭툭 가시 돋친 말을 내뱉으며 유릭을 보필하고 있다.
유릭과 똑같이 18살이 된 데릭은 이전과는 살짝 달라졌다.
조금은 어른이 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곁에 있는 유릭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이전보다는 조금 유해졌다.
물론 근본적으로 매사에 진지하고 딱딱한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그냥 아주 약간, 예전보단 여유가 생겼다고 보면 되겠지.
그리고 이제 15살이 된 유화는…….
[“으응…… 아저씨, 정말로 안 보이는 거 맞죠? 그쵸?”]
‘그렇다니까. 넌 내 모습이 보여?’
[“아뇨, 안 보여요.”]
‘나도 똑같아. 근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하지만 뭔가 좀 부끄럽고…….”]
어쩐지 사춘기가 온 듯한 느낌이었다.
정기적으로 지식을 교환하는 연락 외에는 사적인 연락도 줄어들었고, 시시때때로 뭐가 보이냐, 땀 냄새가 나진 않냐, 뭐 이런 질문을 하고 있다.
‘뭘 그렇게 신경 써. 너랑 내 나이 차가 몇인지 알기나 해?’
[“3살밖에 안 나잖아요! 헉, 혹시 아저씨라 부르라고 했던 건 혹시?”]
‘혹시 뭐.’
[“나이 차를 많아 보이게 해서 제 방심을 유도하려고…….”]
유릭이 무심코 헛웃음을 뱉었다.
‘내가? 너를?’
[“남자는 항상 여자들을 방심시키려 한다고 곽 씨 할망이 그랬단 말이에요!”]
곽 씨 할망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성에 대한 교육 하나는 철저히 받고 있는 모양이다.
‘방심시켜서 뭐 하는데.’
[“그건…… 저, 저도 몰라요!”]
뚝, 하고 연결이 끊어졌다.
타고나길 착해 빠진 성격이라 그런지 반항기 같은 느낌은 없었지만, 조금 귀찮아진 느낌은 없지 않아 있었다.
‘뭐, 나도 15살 때는 질풍노도였으니.’
유릭은 어른의 마음으로 다 이해했다.
오히려 흐뭇할 정도다.
감정이 풍부한 유화의 목소리는 그것만으로 그녀의 성장을 실감 나게 해주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릭 본인의 근황은.
‘그나저나 이젠 5성도 완전히 안정됐어.’
여전히 수련에 매진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3년 전 3성에서 단숨에 벽을 뚫고 5성의 경지에 오른 유릭.
그 때문인지 당시 그의 단전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흠집이 날 것 같은, 갓 태어난 아기 새 같은 여리여리한 상태.
그걸 안정시키고 단단한 반석에 올려놓는 것에 3년을 들였다.
‘그냥 무시하고 6성을 노려보는 것도 방법 중 하나긴 했겠지만.’
그건 너무 도박이었다.
그렇게 해서 잘 풀리면 상관없지만, 잘못되었을 경우 기혈이 완전히 뒤틀릴 가능성조차 있었다.
단단한 기반을 다진 요 3년은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이 정도면 나름 어딘가의 조장급이나 베테랑 조원쯤은 되겠어.’
보통 1~2성의 경지를 이제 막 발을 들인 견습, 신참으로 본다.
3성이 되면 비로소 한 사람 몫으로 취급받고, 5성에 오르면 작은 조의 조장이나 숙련된 조원쯤은 되었다 여긴다.
현대의 회사로 치면 뭐 대리나 과장급이라 보면 되려나. 정확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7성부턴 어딜 가도 대접받는 본격적인 고수고, 8성 이상은 마스터라 불리고. 그리고 9성은…….’
<완벽>을 뜻하는 9의 숫자.
손에 꼽히는 절대자들이다. 10가문의 가주들이나 전대의 절대 고수쯤은 되는 경지.
심지어 그 10가문 중에서도 세가 약한 곳은 가주가 아직 8성에 머물러 있을 정도니, 9성이 얼마나 뛰어난 경지인지 알 것이다.
하지만, 유릭의 목표는 그 너머에 있었다.
‘어머니와 같은 10성의 경지.’
회귀 직후에는 이런 생각까진 하지 못했다.
당장 하루하루가 급급했고, 20살에 있을 볼모 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온 정신이 쏠려 있었다.
하지만 회귀 후 5년이나 지난 지금.
염화신무를 5년이나 수련한 지금.
그 짧지 않은 세월은 유릭을 더욱 높고, 멀리까지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물론 볼모를 피한다는 목표를 소홀히 하겠다는 건 아니다.
‘형님이 오기까지 2년.’
그때까지 고작 2년밖에 남지 않았다.
로스카와 아칸의 관계에,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그 시기.
유릭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련장의 한쪽을 향했다.
예의 파이어 볼트를 수련하던 바위가 있는 장소다.
그 바위도 이제는 반 이상 패여 너덜너덜했다.
다만 흔적의 모양이 이전과 전혀 달랐다.
이전에는 마치 드릴처럼 패인 구멍이 수두룩하게 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흔적은 거친 폭발이 사선으로 그어져 있는 흔적이었다.
마치 거대한 발톱으로 드르륵드르륵 그은 것처럼.
‘얼마 안 있으면 다 부서지겠네.’
슬슬 새 바위를 찾아야 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유릭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녹시아의 검날이 햇빛을 비추며 붉은 기운을 흩날리고 있었다.
‘파이어 볼트.’
1중첩의 화룡검화. 검화의 불꽃이 녹시아의 검면에 룬어를 적어 넣는다.
파이어 볼트의 술식을 가미한 폭발의 검.
룬검 녹시아.
피—잉.
그 검이 사선으로 바위를 그었다.
—콰과과과과과광!
* * *
이 세계에서 미성년자와 성인을 가르는 기준은 18살이다.
즉 18살이 되는 해는 성인식을 맞이하는 해.
유릭에게도 그날은 찾아왔다.
“어머 도련님, 이러고 계시면 어떡해요! 빨리 준비하셔야죠!”
“옷만 대체 몇십 벌을 갈아입는 거야? 그냥 맨 처음 옷으로 해.”
“말도 안 돼욧! 성인식이 얼마나 중요한 행사인데요! 도련님한테 딱 맞는 훤칠하고 멋진 옷을 찾아봐야죠!”
꼭두새벽부터 시녀들의 극성에 시달리며 고생하길 수 시간.
간신히 유릭은 그녀들에게서 해방되어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성인식을 맞은 겨울성은 평소와 많이 달랐다.
마치 큰 축제라도 치르듯이 사람들이 북적이며 거리에는 활력이 넘친다.
곳곳에 얼음으로 된 드래곤이나 봉황 등의 조각상이 보이며, 먹거리를 파는 상인들이 평소의 몇 배는 되어 고래고래 호객을 하고 있다.
‘거의 축제지 뭐.’
로스카에서 성인식은 보는 그대로 축제나 다름없는 행사였다.
매년 성인식을 맞으면 본가에선 여러 대의 마차가 출발한다.
그 마차가 엘드가르드 곳곳에 퍼진 영지를 돌아다니며 성인이 된 아이들을 초빙해 오는 것이다.
아이들이 모이고 그 부모들도 함께한다.
이 겨울성에서 다 함께 아이들의 미래와 동시에 빙하백가의 미래를 축복하는 행사.
그렇게 사람이 모이다 보니 장사꾼이 모이게 되었고 지금에 와선 매년 있는 축제와 같이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로스카를 정탐하기 위해 오는 놈들도 수두룩하고.’
이 북적임을 틈타 로스카를, 정확히는 미래에 로스카의 대들보가 될 성인식의 아이들을 정탐하러 오는 이들도 가득하다.
“저 배지는 황금가의 배지군요. 그 옆에는 헤스티아 왕국의 궁정마법사입니다. 작은 왕국이지만 저치만큼은 8성에 이른 마도사로 유명하죠. 저쪽은…….”
글렌이 유릭의 옆에서 주요 인물들을 하나씩 알려주었다.
10가문 중 하나인 황금가 골든하트의 사절단.
속한 왕국보다도 본인의 이름이 더욱 유명한 대마도사.
최근 쿠데타에 성공하여 모 공국의 대공 자리를 꿰찼다는 8성의 소드 마스터.
그밖에도 ‘축하’라는 명목으로 공식 방문한 이들.
상인이거나 사업가라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커다란 재산이라 생각할 유명 인사들이 고작 아이들을 염탐하기 위한 목적으로 와 있었다.
“할 일도 없나 봐, 다들.”
“……올해는 특별한 해이니 더 쟁쟁한 면면들만 모인 듯합니다.”
“나랑 데릭 말이지?”
확실히 올해의 성인식은 특별하다. 뭐라 해도 로스카의 직계가 성인식에 참석하는 해니까.
“곧 있으면 시작할 시간입니다.”
“알았다, 알았어.”
유릭이 축복의 의식을 위해 마련된 단상으로 향했다.
그 뒤에서 글렌이 꾸벅 고개를 숙이곤 그림자 속에 숨었다.
몇몇 기감이 좋은 이들이 글렌이 은신하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것이 유릭의 뒤를 따르는 것을 보곤 신경을 껐다.
“유릭, 어딜 싸돌아다니다 온 거냐.”
“잠깐 구경 좀.”
단상의 뒤쪽에서 데릭이 싸늘한 눈초리로 유릭을 쏘아 보았다.
그러곤 이내 한숨을 쉬더니 손에 든 종이를 진지한 표정으로 읽기 시작했다.
“대표 연설 대본이야?”
“그래. 어차피 네 녀석은 또 나한테 미룰 거 아니냐.”
데릭이 한숨을 쉬듯이 얘기했다.
지난 5년간 유릭은 대부분의 공식적인 행사에 불참했다.
반드시 나와 달라는 행사도 ‘쌍둥이니까 한 명만 가면 되지’라고 말하며 데릭에게 미뤄온 것이다.
데릭 역시 이런 걸 귀찮아하는 성격이라 질색하였지만, 알리샤 때의 빚이 있어서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줘봐.”
“뭐?”
유릭이 탁, 하고 대본을 뺏었다.
데릭이 그런 유릭을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았다.
“오늘은 내가 할 테니까 너는 쉬고 있어.”
“갑자기 웬 변덕이지?”
“별일은 아니고…… 뭐 그냥.”
갑작스러운 일에 의아해하면서도 데릭은 어깨를 으쓱이며 물러났다.
대표 연설을 한다고 뭐가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대신해 주겠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잠시 후.
—축복의 의식을 치르기 전에 대표 연설이 있겠습니다.
음성 증폭기로 사회자의 말이 퍼져 나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대번에 단상으로 쏠렸다.
그 속을 유릭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가 툭툭 미리 마련된 음성 증폭기를 건드려 보았다.
제대로 작동한다.
“오랜 맹약의 땅, 엘드가르드의 위대한 지배자, 빙하백가 로스카의 삼남 유릭 로스카입니다.”
몇몇 이들이 데릭이 아닌 것에 놀랐지만 소요는 없었다.
어차피 데릭이 하나 유릭이 하나 아무런 차이도 없다.
“오늘과 같은 날을 무사히 맞이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유릭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졌다.
얼핏 귀찮아하는 듯한 말투이면서도 성실한 발성.
귀족의 마음가짐 중 하나로 때려 박힌 교양 수업의 결과였다.
모든 이의 시선이 유릭에게 박혀 들었다.
품평하는 듯한 시선. 가늠하는 듯한 시선.
혹은 매료되는 듯한 시선.
어떤 의미로든 사람을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 카리스마라고 한다면, 지금의 유릭에게 그것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의외로 그걸 알아챈 사람은 많지 않았다.
유릭의 손이 부드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움직여 허리춤으로 향했다.
“우아아아아아아!”
갑작스레 단상에 사람이 난입했다. 그 즉시 사방에서 화살들이 날아와 남자를 저격했다.
하지만 사내는 고슴도치처럼 빼곡히 화살이 박히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고통을 차단하는 마법이라도 미리 걸어놓은 것일까?
“뒈져라, 로스카아아아아아!”
당장 그림자에서 뻗어 나온 글렌의 검이 남자의 목을 갈랐다. 하지만 그걸로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사내의 배에 이미 완성된 마법진이 빛을 발하고 있다.
사내를 죽여도 마법은 발동한다.
그걸 알기에 글렌의 검에 목이 잘리면서도 사내는 웃은 것이다.
그러나.
—서걱.
일검(一劍)에, 마법진이 잘려 나갔다.
처음부터 모든 수법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배의 마법진을, 그것도 술식의 핵이 되는 부분을 정확히 노린 일격.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부풀어 올랐던 마나가 허무하게 허공에 흩어졌다.
‘……!’
눈을 크게 뜨며 떨어지는 사내의 목.
그것에 별반 시선도 주지 않으며, 유릭이 연설을 마저 이었다.
“우리 로스카의 아이들은 이 땅과 우리 이웃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정적 속에서 그가 인사를 마치곤 단상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