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30화
30화. 가명을 쓸 거면
소란은 한 템포 늦게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난입자. 몸에 화살을 맞으면서도, 목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로스카에게 타격을 주겠다는 일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단칼에 정리해버린 유릭 로스카.
“미, 민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금방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와 남자의 시체를 치웠다.
그중 몇몇은 피해를 당할 뻔한 유릭에게 다가와 위로와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걸 대충 흘려들으며 유릭이 시종이 가져다준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유릭.”
데릭이 찾아왔다.
“너 혹시…….”
어딘가 심각한 분위기로 말을 흐린다. 유릭이 찻잔을 든 채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큰일이었군.”
“큰일은 무슨.”
—별일은 아니고…… 뭐 그냥.
순간, 연설 대본을 뺏어갈 때의 유릭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데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유릭이 범상치 않은 놈이라지만 미래라도 보지 않는 이상 습격이 있을 걸 어떻게 알겠는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대표 연설을 자처했다는 건 너무 지나친 생각이다.
“무도회장에서 파티가 열린다고 하더군. 갈 건가?”
“거긴 나중에. 거리 쪽의 축제를 좀 더 보고 싶어서.”
“그래.”
짧은 대답을 남기고 데릭이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행사가 끝났으니 고위층이나 지체 높은 이들을 대상으로 한 파티가 그곳에서 열린다.
그와 별개로 거리에선 축제가 한 바탕 열리는데, 유릭은 그쪽에 더 흥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공자님. 오늘은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어, 그래.”
사건이 터진 걸 보고 왔는지 어느새 아니스가 곁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사건이 있었으니 호위가 붙지 않을 리 없었다.
순간 그림자가 일렁이며.
“얌전히 방으로 돌아가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글렌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유릭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가자.”
“예.”
아니스를 대동하곤 그가 거리로 나왔다.
축제가 열리고 있는 거리의 분위기는 무도회장이나 방금의 행사 때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오? 저기 봐봐, 거리 공연 같은 것도 있나 봐.”
제대로 둘러보기도 전부터 다양한 볼거리들이 보였다.
비파 같은 악기를 들고 노래를 하는 음유시인이 보였고, 간단히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도 있었다.
심지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인형극을 하고 있는 인형사도 보였다.
“저건 건국제와 마신의 인형극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후훗, 꼭 무슨 그림책의 용사같이 생긴 인형이군요.”
평소엔 무뚝뚝한 표정인 아니스도 축제의 분위기에 감화됐는지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 보였다.
“나만 해도 건국제가 주인공인 그림책을 엄청나게 봤었으니까. 아니스가 어렸을 땐 더 많았지?”
“바리에이션도 다양했었죠. 사랑하는 공주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스토리도 있었고, 가족의 복수를 위해 일어서는 스토리도 있었고.”
천 년 전의 영웅인 건국제를 주인공으로 한 창작 동화는 요즘에도 만들어지고 있을 정도다.
이 세계 어린이들의 작은 바이블이라도 해도 되겠지.
아니나 다를까 인형극 앞에도 부모를 졸라 보러온 아이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건국제, 테메레르 대왕을 외치며 응원하는 모습이 TV의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며 몰두하는 아이들 같아 피식 미소가 나왔다.
—포기하지 말고 맞서 싸워요! 테메레르 대왕!
“응?”
그때 문득, 아이가 아니면서도 신나 죽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
얼굴엔 인형사가 따로 팔고 있는 용사 가면을 쓰고선 혼자 방방 뛰고 있다.
아이와 부모들밖에 없는 장소에서 무척이나 눈에 띄는 광경이었다.
‘뭐 건국제는 따로 팬클럽 비슷한 것까지 있을 정도니까.’
무슨무슨 회(會)라든지 무슨무슨 살롱 같은 느낌으로, 건국제에 대해 탐구하는 모임은 발에 챌 정도로 많았다.
저 여자도 그런 식으로 건국제를 흠모하는 사람 중 하나인 거겠지.
“글렌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겠군요.”
건국제의 인기를 보며 아니스가 얘기했다.
“그럴지도. 걔는 황실의 핏줄을 자기 대에서 끊겠다고 하고 있으니까.”
유릭이 슬쩍 그림자를 곁눈질했다.
건국제의 인기는 아직도 하늘을 뚫지만, 황실의 핏줄 자체는 지금에 와선 분란의 씨앗밖에 되지 않는다.
그걸 아는 글렌은 자기 대에서 그 피를 끊겠다고 하고 있었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겠다는 말이다.
‘역사상 마지막 건국제의 핏줄로 기록되려나.’
그걸 기뻐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슬퍼하는 사람도 있겠지.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본인이 택한 삶이다. 거기에 간섭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요?”
“큰길은 대충 봤으니 좀 구석진 데도 봐볼까.”
커다란 대로변만이 축제의 전부는 아니다.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해 변두리로 쫓겨난 장사치들이 자리를 펴고 있거나, 아니면 북적이는 곳에서 잠시 빠져나와 쉬고 있는 가족, 연인들이나.
그런 이들을 보는 것 역시 축제의 일부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한적한 골목길을 전전하고 있자니.
—아아아악!
불온한 소리가 들려왔다.
중년으로 보이는 여인의 비명 소리.
거리가 먼 것도 아니다. 바로 모퉁이를 돌아 나가니 비명의 진원지가 있었다.
“그러니까 얌전히 주면 좀 좋아?”
“아, 안 돼요! 그건 우리 애 젖먹이 값이란 말이에요!”
“떨어져, 이년아! 칼침 한 번 더 맞고 싶어?”
잠든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칼을 든 험상궂은 사내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얼굴에 스치듯 상처가 있는 것이, 이미 한 번은 휘두른 모양이었다.
“……비열한 사내로군요.”
아무리 이곳이 본가가 있는 대도시라고 해도 햇빛이 비치지 않는 곳은 있게 마련.
대낮에도 어둑한 이런 뒷골목에선 늘상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흔한 일이라 할지라도 눈에 들어온 이상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유릭이 끄덕이자 아니스가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곤 당장에라도 출수할 것처럼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그런데 그때.
“그만-!”
반대편에서 어떤 여자가 달려오더니, 그대로 칼을 든 남자를 발로 차버리는 것이 아닌가?
“켁!”
남자는 무슨 차에 부딪힌 것처럼 날아가 유릭과 아니스 앞에 철푸덕 떨어졌다.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문 것이 한 방에 기절한 것이 분명했다.
아니스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검에서 손을 뗐고.
유릭이 여자를 보곤 눈을 깜빡였다.
‘아까 그 건국제 덕후 놈이잖아?’
본 적이 있는 여자였다.
아까 본 건국제의 인형극 앞에서 방방 뛰던 가면녀.
“네놈들도 한패냐?”
가면을 쓴 여자가 주먹을 팡팡 치며 유릭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그 손에서 불꽃이 피어오른다.
유릭은, 여자의 정체는 몰랐지만 그 불꽃만큼은 알고 있었다.
‘……아칸.’
그건 3년 전 집어삼켰던 아칸의 가주의 불꽃과 쏙 빼닮은 불꽃이었다.
“나약한 이를 착취하는 비열한 짓거리는 이 클레…… 아, 아니, 이 클레리스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유릭이 고개를 저었다.
어설프게 가명을 대는 모습은 오히려 녀석의 정체를 확신하게 해주었다.
“가명을 쓸 거면 좀 자연스럽게 쓰는 게 좋을 텐데, 클레어 아칸.”
클레어 아칸.
과거 로스카와 아칸의 볼모 교환이 결정되었을 때, 다른 형제들을 대신해 스스로 볼모가 되겠다 나섰던 아칸의 7번째 공녀.
즉 유릭과 함께 교환되었던 아칸 측의 볼모였다.
* * *
슬슬 날이 어두워졌다.
해가 져오니 무도회도 좀 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낮에는 삼삼오오 모여 다과나 차 정도만 즐기던 것이, 요리와 술을 내오기 시작하고 춤과 음악이 곁들여지고.
시작을 알리는 첫 곡으로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기 시작한다.
그랬던 분위기가 꺼진 것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허, 허흐흠! 저, 적마도가의 사절단 대표이신 클레어 아칸 공녀님과 사절단분들의 방문이십니다!”
그 말이 퍼진 순간 분위기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로스카와 결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의 관계인 적마도가 아칸.
그곳의 일곱 번째 공녀, 클레어 아칸.
화려한 금발의 머리는 샹들리에의 불빛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었고, 그것은 몸을 감싼 붉은 드레스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적지 한복판에서도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5명의 수행원과 함께 무도회장을 가로질렀다.
-아칸의…….
-여기는 왜…….
웅성거림이 퍼져갔다. 의문과 혐오가 반씩 섞인 시선 속에서 클레어가 드레스 자락을 끌며 걸었다.
그 끝에는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신분인 엘린이 있었다.
“아칸의 공녀께서 웬일이지? 그쪽도 성인이 되었다고 축하라도 받으러 왔나?”
클레어 아칸도 올해로 18살. 그 사실을 아는 엘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비꼬는 말을 던졌다.
“놀러 온 것은 아니에요. 대화를 하러 왔답니다.”
“대화?”
“레노스 영지의 금광의 건을 마무리 지으려구요.”
로스카와 아칸의 분쟁은 곳곳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전면 전쟁까진 아니지만, 이권 싸움이 더없이 격렬하여 일촉즉발의 순간이 따로 없었다.
레노스 금광은 그런 지엽적인 분쟁 중 하나로, 그래도 그나마 얼추 마무리가 되어가는 곳이긴 했다.
커다란 방향성은 정해졌고 세부적인 사안만 결정하면 되는 상황.
“고작 그걸로 이 북쪽 땅까지? 아칸의 자식들은 참으로 한가한가 보군.”
“뭐 열셋이나 있으니까요. 저 하나 정도는 한가할 만하지 않나요?”
둘 사이의 공기가 응축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엘린은 상대가 10살이나 어린 여자애라고 해서 일절 봐주지 않았고, 클레어 역시 8성의 마도사를 앞에 두고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로스카의 기사들과 아칸의 사절들이 도끼눈을 뜨며 서로를 째려보았다.
당장에라도 칼부림이 날 것 같은 공기에 주변 사람들만 숨이 턱턱 막혀올 때쯤.
“정식 사절로 왔다면 환영해야지. 오늘은 축복의 날이니 잘 즐기다 가거라.”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로스카 가주 대행.”
한껏 조여들던 공기가 탁, 하고 풀려왔다.
기사들과 사절들은 여전히 노려보고 있었으나 엘린과 클레어만큼은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속내는 어떻든 당장 이 자리에서는 미소를 보일 수 있는 그녀들이었다.
“금광 얘기는 내일 하도록 하지. 괜찮겠지?”
“물론이에요. 저희도 막 도착한 지라 피로한 참이니.”
간단한 대화가 오간 후 둘의 대화는 종료되었다.
클레어와 아칸의 사절단은 무도회장 한쪽에 무리 짓고는 자기들끼리 담론을 나누기 시작했다.
몇몇 이들이 로스카의 눈초리에도 아랑곳 않고 당당히 인사를 가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그들은 고립되어 있었다.
그런 아칸의 일행을 대놓고 째려보는 이가 있는 반면, 호기심 반으로 힐끔거리는 이도 있었다.
필립 로스카는 후자의 인물이었다.
꿀꺽.
클레어를 보곤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회장으로 들어오는 그녀를 처음 봤을 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붉게 빛나는 화사한 금발에 어깨를 드러낸 붉은 드레스. 그 드레스는 그녀의 선홍빛 눈동자에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처음 봤을 때는 물론이고 다시 봐도 숨이 멎을 것만 같다.
그녀에게선 로스카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뜨거운 생명력이 느껴졌다.
“필립, 뭐 해.”
“아, 클레어 아칸 보고 있구나. 뭐야, 반했냐?”
“다, 닥쳐!”
필립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그는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할 수 없었다.
단순히 부끄러움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결코 넘봐선 안 될 적대 가문의 사람이었으니까.
“그래, 잘 생각했다, 인마. 내통 혐의라도 씌워지기 전에 잘 처신해.”
“킥킥, 오늘 막 성인이 된 참인데 벌써부터 인생 망칠 생각 마라. 뭐 그래도 이해는 간다. 진짜 미인이긴 하네.”
“이것들이 진짜!”
키득거리는 친구들에 둘러싸여 필립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하지만 그들의 말이 모두 옳다.
필립은 스스로의 마음을 통제할 순 없었지만, 다행히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할 이성은 있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힐끔힐끔 눈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크흠!
그때 입구 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입장할 때의 소리였다.
“위대한 빙하백가 로스카의 삼남, 유릭 로스카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뭐야, 유릭 녀석인가.
필립은 입구 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무의식중에 유릭을 피하고 있는 그였다.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향할 때 그의 시선은 클레어를 향했고.
그래서 볼 수 있었다.
“…….”
그 클레어가, 눈빛만으로 무도회장의 문을 파내버리겠다는 듯이 뚫어져라 입구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고귀한 자태에 어울리지 않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