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32화
32화. 진짜다
밤이 깊어가며 유릭은 방으로 돌아왔다.
무도회는 아직도 계속되어 새벽까지 이어질 분위기였지만 거기에 어울릴 생각은 없었다.
어둑한 방에서 유릭이 생각에 잠겼다.
‘언질은 해뒀으니 괜찮겠지.’
그가 떠올리고 있는 이는 클레어 아칸.
단, 무도회에서의 클레어가 아니라, 낮의 뒷골목에서의 클레어였다.
무도회의 사건 따위보다 그쪽이 그에겐 훨씬 더 중요했으니까.
‘아칸의 후계자가 열셋이나 됐었던가.’
당대의 아칸은 로스카와 다르게 자식이 아주 많다.
늙은 가주가 몇이나 되는 부인을 맞이한 바람에 13명이나 되는 자식을 본 것이다.
어찌나 막장스러운 집안인지 장남보다도 나이가 어린 부인이 있을 정도였다.
‘그들한테도 볼모 얘기는 갑작스러웠을 테지.’
어느 날 느닷없이 결정된 아칸과 로스카의 화친.
그 대가로 치르기로 한 볼모의 교환.
뜬금없이 가주의 직인이 찍힌 조약이 공개되어 후계자들은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그리고 싸웠겠지.
서로가, 볼모 따윈 되고 싶지 않다고 소리치며.
‘가뜩이나 아칸은 형제들끼리 사이가 나쁘다고 하니까.’
유릭과 데릭, 그리고 엘린이 비교적 친하게 지내는 것과 달리, 아칸 쪽은 정말 험악하다고 한다.
아칸의 형제들은 가주의 자리를 두고 온갖 암계를 꾸미며 서로를 밀어내느라 열심이다.
볼모 건 역시 마찬가지.
스스로가 가기는 죽어도 싫지만, 동시에 경쟁자를 밀어낼 수 있는 찬스라 생각하며 서로에게 미루고 미룬다.
‘그 자리에서 스스로 박차고 일어난 게 클레어 아칸이고.’
그게 회귀 전에 있었던 미래의 일이다.
그 희생적인 태도는 분명 고귀하고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유릭에게는 한숨이 푹푹 나오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마디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볼모 교환이 적힌 조약 따위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조약이란 건 둘이서 하는 거니까.’
한쪽에서만 열을 올린다고 바꾸기는 쉽지 않다.
유릭이 노력해도 클레어 쪽에서 서슴없이 받아들인다면 바꿀 수 없다.
‘본인은 아직 어리둥절하겠지만.’
상관없다.
때가 왔을 때 그녀가, 오늘의 말을 떠올려 단 한 순간만 머뭇거린다면 그걸로 성공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칸 내에 있는 그녀의 지지자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
‘회귀 전에는 클레어의 의지가 강력해서 막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망설이게 된다면 얘기는 다르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미래에 폭풍을 일으킨다고 하지 않은가.
‘이미 나 자신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변했어. 알리샤도 처리했고 누나랑 13기사단은 큰형님의 심복을 수색하고 있고. 거기에 클레어에게 언질도 줬다.’
이것으로 자신은 몇 번이나 되는 날갯짓을 하였다.
남은 2년도 가만히 있진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날갯짓을 하겠지.
남은 것은, 그중 하나가 폭풍우를 일으키길 기도하는 것뿐.
과연 2년 후의 미래가 폭풍우 치는 거센 바다가 될지, 아니면 잠잠하기만 한 고요한 수면일지.
수많은 날갯짓에도 불구하고 고요한 수면일 뿐이라면 자신은 파멸이다.
그 모든 게, 자신의 손에 달린 일이었다.
* * *
달이 높게 떠오른 새벽.
모두가 잠든 그 시간에 글렌은 홀로 지붕에서 달빛을 쬐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유릭의 호위는 확실히 하고 있다.
그가 앉아 있는 지붕은 유릭의 방의 바로 위쪽에 있는 지붕이었으니까.
“후우.”
그가 피로한 듯 한숨을 쉬며 두텁게 말린 담배를 꺼내 물었다.
본래 담배는 잘 피우지 않는 그다. 냄새가 배기라도 하면 암살자로선 치명적이니까.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물지 않곤 참을 수 없었다.
“모두를 희생하지 말고, 나 자신도 희생하지 않는 길을 찾으라고?”
오늘 낮, 유릭이 클레어에게 했던 얘기.
당연히 근처에서 은신하고 있던 글렌의 귀에도 모두 들어왔다.
‘옛 제국의 핏줄을 끊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는 건 잘못됐다는 말이냐?’
그때 유릭이 한 말은 클레어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니 글렌과는 분명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이다.
하지만.
—테메레르 대왕이라면 그렇게 대답했을걸.
어째선지 글렌은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의 선조인 테메레르가 유릭의 입을 빌려 후손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본인의 핏줄이 끊길 것 같으니 안타깝다 이겁니까?”
내리쬐는 달빛을 보며 글렌이 홀로 킬킬거렸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그럴 거면 애초에 제국이 망하게 하질 말던가!
테메레르의 핏줄이 끊기려 하는 것도 제국이 망하고 분노한 민중의 황족 사냥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닌가?
“하아.”
달밤의 미친놈처럼 키득거리던 글렌의 웃음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나도 참 병신같은 상상이나 하고 있군.’
그가 지붕에 다 피운 담배를 비벼 껐다.
이젠 냉정해졌다.
기록에 드러난 테메레르 대왕은 무척 정의로운 성격이라 하였다.
실제 행보만 봐도 그렇다. 동료를 모아 마신에게 맞섰다는 것부터 이미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은 보일 수 없는 행보다.
그러니 테메레르 대왕이 지금의 자신을 말린다고 한다면, 그건 핏줄이 끊길까 걱정하는 그런 게 아니겠지.
순수하게 후손이 스스로의 인생을 내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알 게 뭐야.’
하지만 알게 뭔가.
기록이란 본디 후일 얼마든지 다시 쓰일 수 있는 것.
글렌은 자신의 핏줄을 싫어했다. 자연스럽게 선조인 테메레르 대왕 역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록 따윈 믿지 않는다.
마신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라면, 온 대륙의 기록을 갈아치우는 것 따위 손쉬운 일일 테니까.
그러니 테메레르 대왕이 슬퍼하든 말든 스스로의 뜻을 굽힐 생각은 전혀 없었다.
“…….”
하지만 왜일까.
선조 따윈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였지만.
‘유릭, 로스카.’
그 꼬맹이의 말만큼은 가시처럼 박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 * *
클레어와 아칸의 사절단은 이틀을 더 머물다 떠났다.
핑곗거리로 가져온 레노스 금광의 건이 마무리되자 도망치듯 떠나간 것이다.
그 이틀 동안 유릭은 클레어를 만나지 못했다.
할 말은 다 했으니 굳이 만나려 하지 않은 것도 있고, 클레어 측에서 유릭을 피한 것도 있었다.
그 후에도 거리의 축제는 며칠 더 이어졌다.
모처럼 성대하게 열린 축제다. 2~3일만으로 끝내기는 아쉽지 않은가.
이윽고 그 축제마저 모두 끝이 나고.
유릭에겐 임무 하나가 내려왔다.
“임무 말입니까?”
“그래. 성인이 되었으니 한 사람 몫을 해야지.”
싱글벙글 웃으며 찾아온 것은 외숙인 발터였다.
“첫 임무라…….”
돌돌 말려 촛농으로 봉인되어 있는 임무장을 유릭이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사람마다 첫 임무를 대하는 감정은 모두 다르다.
기대를 주체하지 못하는 이도 있고 긴장감에 배가 아파오는 이도 있다.
유릭은 둘 다 아니었다.
“혹시 성 아랫마을의 고블린을 퇴치하는 건은 아니죠?”
“응? 아니야, 아니야. 그것도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네게는 더 중요한 일이 내려왔단다. 자세한 건 보면 알 거야.”
유릭이 느낀 것은 안도감이었다.
미래가 무사히 바뀌었다는.
‘지긋지긋한 고블린 놈들을 안 봐도 돼서 속이 다 시원하군.’
회귀 전 유릭에게 내려오는 임무는 고블린 퇴치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정도 임무 말고는 유릭이 감당해낼 수 있는 임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미래가 바뀌었다는 것은, 유릭에 대한 가문의 평가가 180도 변했단 뜻이다.
툭.
유릭이 봉인을 떼고 종이를 펼쳤다.
“혹시 골든하트의 건에 대해 들어봤니?”
보면서 들으라는 듯 발터가 얘기했다.
“골든하트의 건이라 하시면…… 보물 지도 말입니까?”
“그래 그거. 네게는 그 지도의 진위를 확인해 주었으면 한단다.”
유릭이 빠르게 임무장을 훑었다.
가주의 직인이 찍혀 있는 명령서. 내용은 골든하트가 공개한 보물 지도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
“이런 걸 용케도 공개했군요.”
“당연히 가짜라고 생각했겠지. 원래 보물 지도란 것들이 100의 99는 가짜잖니. 그래도 백의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해 모여드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 모여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나 하겠다……. 확실히 골든하트가 결정할 법한 일이긴 합니다.”
황금가 골든하트라고 하면 손해를 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극성맞은 상인의 가문.
그 황금의 가문은 있을지 없을지 모를 보물보단, 사람을 모아 도시를 활성화시키고 장사를 하는 쪽을 택한 모양이었다.
“우리도 높은 확률로 가짜라고는 생각해. 하지만 확인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저군요. 진짜일 가능성이 높다면 저 같은 초짜를 보내진 않을 테니.”
“그럴 땐 첫 임무인 신참 하나 달랑 보내는 게 아니라 9번대 기사단이 통째로 달려갔겠지.”
로스카에 존재하는 열두, 아니 열세 기사단.
그 기사단은 각 번호별로 성격과 특색이 모두 달랐다.
1번대 기사단은 가주를 호위하는 근위대.
눈앞의 발터 로스카가 단장으로 있는 곳으로 가주의 명령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듣지 않는 직속 친위대였다.
2번대 기사단은 가문과 영지를 지키는 수호대.
가주 대행인 엘린이 단장직을 역임하고 있으며 그 성격상 기사단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인원이 많은 곳이었다.
영지 내의 병사들을 움직일 권한도 가지고 있는, 경찰과 군대를 적절히 섞어놓은 조직이라 보면 된다.
이렇듯 로스카의 기사단은 각 기사단별로 전문과 성향이 조금씩 달랐다.
그리고 9번대 기사단은, 주로 외부의 탐사를 전문으로 하는 부대.
이런 보물 지도 같은 건수나 미확인 유적 따위가 등장하면 바로 파견을 나가는 곳이 그곳이었다.
“요는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 오란 얘기야. 가문 내에서 모든 방면으로 검토를 해봤는데 보물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0이거든. 골든하트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쿨하게 지도를 공개했겠지?”
“그렇겠죠.”
황금가에 속해 있는 스카디 왕국 소속의 상업도시, 그웬델.
골든하트가 공개한 보물 지도 탓에 온 대륙의 트레져 헌터들이 모이고 있는 도시.
“글렌이랑 아니스도 데려가도 되나요?”
“글렌이야 네 섀도우니 상관없는데 아니스는 왜? 이 정도 임무에 너랑 글렌이랑 아니스까지 들어가면 조금 과한데.”
“첫 임무라 그런지 불안해서 그래요. 아니스가 같이 가면 든든할 것 같아서요.”
“요 녀석, 이거, 이거.”
발터가 눈을 가늘게 뜨며 씨익 웃었다.
또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듯했지만 유릭은 굳이 반론하지 않았다.
착각이든 뭐든 간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아니스를 붙여주느냐 아니냐.
“알았다. 네 할아버지한테 얘기해서 잠시 파견 보내는 걸로 할게.”
“고마워요, 외숙.”
“귀여운 조카의 연애사업을 방해할 순 없지. 흐흐.”
유릭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창가로 가 바깥을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는 고즈넉한 겨울의 땅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마음 편히 갔다 오면 돼. 말했듯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첫 임무인 만큼 견학이나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다녀와.”
“……그럴게요.”
황금가 골든하트의 땅, 스카디 왕국의 상업도시인 그웬델.
골든하트가 공개한 보물 지도에 따르면 그곳에 있다고 한다.
<수정드래곤의 버려진 레어>가.
‘내가 그웬델에 갔던 게 23살 때였나.’
한창 로스카와 아칸의 전쟁이 터지고, 아칸의 추적자를 피해 다니며 떠돌이 용병으로 살았던 시절.
유릭은 그웬델을 밟은 적이 있었다. 왜? 몇 년 전 발견되었다는 드래곤 레어가 그곳에 있다고 해서.
그러니까 말하자면…….
“길게 끌 것도 없으니 내일 바로 출발할게요.”
그 보물 지도는, 진짜다.
“그래, 다녀와. 몸조심하고.”
다음 날, 겨울성 바깥으로 한 대의 마차가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