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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36화 (36/166)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36화

36화. 목욕탕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소?”

조금 자리가 진정된 후 노기사 파비스가 그렇게 물었다.

그에 대답한 건 아니스였다.

“퀘른 왕국 델라임 자작가의 유릭 도련님이십니다. 저와 이 남자는 도련님을 모시는 기사구요.”

퀘른 왕국은 대륙의 구석에 박혀 있는 무척이나 작은 왕국이다.

로스카의 영향력이 짙게 묻어 있는 왕국으로, 덕분에 유릭의 가짜 신분을 만드는 것에 도움을 주었다.

“퀘른 왕국이라……. 멀리서 오신 귀인이로군.”

“설명이 필요한데. 왜 이런 곳에 왕자님이 있는 거지?”

유릭의 질문에 파비스가 왕자의 눈치를 보았다.

왕자가 잠시 우물우물하는가 싶더니 스스로 대답했다.

“드, 드래곤의 보물을 찾으면 어마마마께 힘이 되어 드리지 않을까 해서 왔어요.”

리헨델 왕자는 9살이다.

왕자가 태어나고 요절한 선대왕을 대신해 왕비가 섭정을 맡은 지 9년째란 뜻이었다.

‘섭정이란 게 쉬운 일이 아니니.’

국정을 운영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왕과 달리 왕비는 어릴 때부터 제왕학을 배운 것도 아닌 데다, 심지어 왕제(王弟)인 크라우 공작이라는 욕심 가득한 여우가 옆에 있으니 더더욱 그랬다.

매일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어린 아들이 걱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저하의 청을 들어 기사들과 함께 이곳 그웬델까지 찾아왔습니다. 충분히 믿을 만한 기사들만 뽑아왔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것이…….”

파비스가 말끝을 흐렸다.

고르고 골라 뽑아 왔다 생각했는데, 설마 자신 외의 모든 기사가 공작의 사주를 받은 이들이었다니.

새삼 생각해 보니 이렇게 섬뜩할 수가 없었다.

놈들이 남의 눈을 의식해 동굴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면, 그냥 대놓고 이동 중에 마수를 뻗쳐왔다면, 지금쯤 자신과 왕자는 저세상에 있었을 것이 아닌가?

“유릭 공자, 부탁드리오. 바깥에도 공작의 기사들이 포진해 있을 거요. 그러니 도시까지만이라도 호위를 부탁해도 되겠소?”

“도시에 가면 뾰족한 수라도 있나?”

“영주성으로 가면 통신구를 빌려 왕궁에 연락할 수 있소. 그렇게 되면 공작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거요. 거기에 그웬델의 영주는 왕비 전하께 충성을 맹세한 자니까.”

이곳 수정동굴에서 영주성까지.

그렇게 먼 여정은 아니다.

중간에 공작의 기사들과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만.

“미안하지만 우리도 일정이 있어서.”

“일정이라면 역시…….”

“우리도 드래곤의 레어를 찾고 있거든.”

파비스의 눈이 어두워졌다.

자신들은 최대한 빨리 영주성으로, 그리고 왕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공작의 마수가 어디까지 뻗친 지 알 수 없는 이상, 한가하게 보물찾기를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때.

“저,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왕자가 유릭의 옷자락을 잡으며 얘기했다. 그 두 손가락이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저하께서요?”

유릭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했지만 왕자의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왕자의 망막엔 유릭이 콧수염 기사의 목을 찌르던 순간이 아직도 맺혀 있었다.

“저도 가고 싶어요!”

하지만 떨림을 참고 얘기했다.

왕자는 어마마마를 위해 드래곤의 보물을 찾아내겠단 꿈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파비스가 긴장에 숨을 삼켰고, 아니스가 유릭의 눈치를 보았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자리의 결정권이 유릭에게 있다는 사실을.

짧은 침묵이 지나가고 유릭이 피식 웃었다.

“이곳은 스카디 왕국이고, 곧 저하의 땅입니다. 자신의 땅에서 저하께서 어딜 가시든 아무도 말릴 수 없겠지요.”

그가 웃으며 왕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숨 막히던 긴장이 탁 풀려온다.

어찌나 안도했는지 왕자의 눈가엔 그렁그렁 눈물까지 맺혔다.

순간 파비스는 왕자의 머리에 손을 얹는 무례를 지적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늙은 덕에 실력은 과거보다 줄었어도 눈치만은 훨씬 오른 그였다.

“후의에 감사드리오, 유릭 공자.”

“보물 욕심에 뒤통수나 치지 마.”

“그, 그럴 리가 있겠소?”

유릭의 농담에 파비스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두 눈으로 유릭 일행의 무위를 목격한 그다. 목숨이 아깝지 않고서야 배신할 리가 있나.

유릭이 피식 웃더니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출발하지.”

* * *

유릭은 일행을 데리고 깊이, 더 깊이 들어갔다.

도중에 몇 번이나 수정개미의 습격을 받았지만, 글렌의 셰이드 소드에 갈려 나갈 뿐이었다.

그렇게 들어가길 한참.

기약 없는 탐사에 왕자와 노기사가 지쳐가고, 아니스와 글렌마저 정말 레어가 있는지 미심쩍어하기 시작할 때.

그것이 발견되었다.

“유릭 공자, 그게 뭐예요?”

유릭이 허리를 굽혀 주워 든 물건에 왕자가 물어보았다.

유릭은 그것을 왕자의 손바닥에 떨궈주었다.

“용의 비늘입니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한 장의 비늘.

왕자의 눈이 점점 휘둥그레지더니 소리를 질렀다.

“용의 비늘!”

“저, 저하! 정말입니까?”

“진짜 용의 비늘입니까!?”

파비스와 아니스가 한달음에 왕자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심지어 은신해 있던 글렌조차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헙!”

“진짜다!”

그리고 모두가 그것이 진짜임을 확신했다.

생김새는 둘째 치고, 풍겨오는 마나가 심상치 않다.

양은 얼마 되지 않을지언정, 생전 처음 느껴볼 정도로 정순하고 격이 높은 마나.

한낱 비늘에서 이런 마나가 풍겨오다니, 드래곤의 비늘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레어가 정말 있었다니…….”

“도련님의 정보가 정말이었어!”

유릭의 정보가 진짜였다는 것에 복잡한 표정의 글렌과 순수하게 기뻐하는 아니스.

왕자와 파비스 역시 진짜 레어가 있었단 사실에 처지도 잊고 뛸 듯이 기뻐했다.

가지각색의 반응을 보이는 일행을 두고 유릭이 불꽃을 피워 올렸다.

화륵!

그러곤 횃불이 닿지 않는 저 높이 쏘아 보냈다.

횃불과 수정들의 미약한 빛에만 의지해야 하던, 한 치 앞밖에 보이지 않던 동굴.

유릭이 올려보낸 불꽃이 더 멀리, 그리고 더욱 높이까지 비추었다.

그곳에 보이는 거대하고 육중한 문.

거인들의 집이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문에 두 개의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다.”

드디어 도착했다.

수정드래곤의 레어에.

꿀꺽.

방금까지 기쁨의 함성으로 시끌시끌하던 일행들이 조용해졌다.

거대한 문과 그곳에 새겨진 두 개의 마법진.

드래곤의 레어.

그것이 진짜로 눈앞에 있다는 것에 그들은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스.”

“예.”

유릭이 아니스를 불러 문 앞으로 데려갔다.

거대한 드래곤의 문 앞에서 그들 두 사람은 너무나도 작고 미약해 보였다.

“그쪽에 서리 마나를 불어넣어. 난 이쪽에 화염 마나를 넣을 테니까.”

“네?”

“그게 이 문을 여는 방법이야.”

아니스가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시키는 대로 하였다.

어째서 도련님이 문을 여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인지 신경이 쓰였지만, 따져보면 애초에 레어의 위치를 아는 것부터 기묘한 일이었으니.

쩌정!

화르륵!

양쪽으로 열리는 여닫이문. 그 한쪽 한쪽에 새겨진 각각의 마법진.

아니스가 손을 댄 왼쪽의 마법진이 푸르게 물들었고, 반대로 유릭의 오른쪽 마법진은 붉게 채색되어 갔다.

덜커덩! 드르르르르르!

잠시 후,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진동에 동굴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어왔다.

워낙 문이 거대했기에 아주 약간만 열려도 사람이 들어가는 데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열린 곳으로 유릭과 일행이 들어갔다.

가장 먼저 그들을 맞이한 것은, 바다로 착각할 정도의 거대한 호수였다.

그것도 문과 같이 두 개가 있었다.

한쪽에는 김이 올라오며 펄펄 끓고 있는 호수.

다른 한쪽에는 표면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호수.

“이건 대체…….”

일행들이 상상하던 레어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흔히 드래곤의 레어라고 하면 산더미처럼 쌓인 보물이나, 하나하나가 국보급인 무구들, 궤짝 가득 담겨 있는 금은보화들을 상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있는 것이라곤 눈앞을 메우는 호수뿐이었다.

“이건 뭘까요?”

호수를 살피며 아니스가 유릭에게 물었다.

유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글쎄.”

말과는 달리 유릭의 뇌리에는 하나의 단어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회귀 전에 왔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정우로서 살았던 현대의 기억을 가지고 생각해 보니, 웬 단어 하나가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설마…….’

스스로 생각해도 미심쩍은 발상이다.

하지만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방금 들어온 문과 호수를 번갈아 보았다.

‘불과 얼음의 마나로 작동하는 장치. 뜨거운 호수와 차가운 호수…….’

물론 생김새 자체야 크게 차이가 났지만 전체적으로 뭔가…….

‘이거 목욕탕 아냐?’

두 개의 호수는 열탕과 냉탕. 그리고 문에 그려진 마법진은 사실 온수 장치.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고 있었다.

* * *

이 세계는 목욕이 일반적인 세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유릭만 해도 종종 별궁에 마련된 목욕탕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드래곤이 여유로운 삶을 위해 목욕탕을 마련해 놨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단지 쉽게 믿기지 않을 뿐…….

“아쉽게도 보물 같은 건 없군요. 은화 쪼가리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흩어져 레어 내를 탐색하던 아니스가 최종 보고를 해왔다.

그걸 들으니 목욕탕 설이 한층 더 신빙성을 갖게 되었다.

아무리 드래곤이 금은보화를 좋아한다고 해도 목욕탕에까지 가지고 들어가진 않을 것 아닌가?

“하지만 과거에 드래곤이 살았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비늘만은 많이 떨어져 있었어요.”

반대로 드래곤의 비늘만은 산더미처럼 발견되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아니스는 물론이고 리헨델 왕자와 파비스 역시 모두 줍고 다녔다.

다 모아서 쌓아보니 짐수레 한 대에 실을 정도의 양이 되었다.

‘각질 제거?’

불현듯 그런 생각을 떠올린 유릭이 이내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생각 하고 싶지 않은데, 한 번 목욕탕 설을 떠올리니 뭘 보더라도 그쪽으로밖에 연결시키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젠장.

“비, 비늘이 이 정도나 있으면 충분히 값어치는 있겠네.”

“예. 기대보단 못하지만 보물지도라 불릴 수준은 되는 것 같습니다.”

드래곤은 존재 자체가 순수한 마력의 결정체라고 여겨진다.

그 비늘 역시 순도 99.99%에 이르는 마력 덩어리.

물론 얇디얇은 비늘 한 장에 담긴 마력의 양은 많지 않지만, 그 정순함은 자연적으로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덕분에 극히 희귀한 마법적 시약의 재료로 가치가 상당했다.

“이거 말곤 더 없어?”

“예. 샅샅이 뒤져봤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좀만 더 찾아보지.”

당연한 제안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유릭 일행이 레어 안을 더 꼼꼼히 뒤졌다.

‘좀만 더’라는 말과는 달리 그들의 탐색은 반나절이 넘도록 이어졌다.

단순히 눈으로 보는 정도가 아니라 마나를 사용하면서까지 상세히 살핀다.

하지만 더 발견되는 건 없었다.

바위 사이 깊숙이 박혀 있던 비늘 두어 장을 추가로 찾았을 뿐.

“진짜 이게 다인가 보네.”

쩝.

유릭이 아쉽다는 듯이 일어났다.

드래곤의 비늘도 무척 귀한 보물이긴 했지만, 역시 레어를 발견한 것치고는 조금 아쉽긴 했다.

“돌아가자.”

그래도 별수 있나.

없는 보물을 만들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유릭의 말에 일행들이 돌아갈 채비를 차렸다.

비늘은 아니스가 커다란 천에 싸서 보따리처럼 등에 메었다.

아직 열려있는 거대한 문으로 일행들이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을 먼저 내보내고 마지막으로 유릭이 밖의 땅을 밟았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일족의 규칙을 어기고 아는 체해서 죄송해요. 제가 너무 아픈데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서…….

그때, 기이한 목소리가 맴돌았다.

유릭의 발걸음이 멎었고,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몸이 부유하는 감각.

동시에 한순간에 시야가 돌변했다.

“!”

유릭은 ‘그것’을 보고는 심장이 정지할 것만 같았다.

호수의 밑바닥보다도 더욱더 깊은 곳.

이 별의 지열(地熱)을 받아 보글보글 끓고 있는 지하 수원 속.

그곳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등에 커다란 자상이 있는, 상처 입은 드래곤이.

-어, 어르신은 누구세요?

……드래곤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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