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37화
37화. 메르베키아
그 용은 300년간 지하 수원에 있었다.
기나긴 용생(龍生)에서 300년이란 시간은 별것 아니지만, 아직 1,000살 남짓한 그에게 있어선 결코 적지 않은 시간.
그 시간 동안, 낫지 않는 상처를 참아가며 웅크리고 있었다.
소란이 들려온 것은 조금 전의 일이었다.
‘인간들?’
수원의 위쪽, 호수가 있는 부근에서 불규칙한 진동이 전해진다.
인간이 침입했다는 것은 곧바로 알았다.
‘가만히 있자……. 없는 척하고 있으면 지나가겠지.’
그래도 내버려 두었다.
말 못 하는 짐승조차 영역을 침범당하면 분노하게 마련이지만 이 용에게 그런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빨리 볼일을 마치고 나가주지 않으려나 기도나 할 뿐.
‘인간 세상에 용이 등장하면 귀찮아지니까, 귀찮은 건 싫어서 그래.’
누구에게 하는 건지 알 수도 없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용이 더욱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다시 눈을 감았을 때, 문득 몸을 담근 수원이 따스하게 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인간들이 위쪽 입구의 마법진을 발동하고 들어왔다는 얘기.
그런데 그 데운 물이, 그의 상처를 감싸 안았다.
감겼던 용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뭐야, 이거?’
300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의 상처가 차도를 보이는 것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용이 찾아온 인간들을 살폈다.
그중에서도 특히 불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인간을.
‘!’
놀라운 광경이었다.
용이란 종족에게 이 세계는 고작해야 첫 번째 하늘에 지나지 않는다.
이 하늘을 넘어 두 번째, 세 번째…… 나아가 아홉 번째 하늘, 구천(九天)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모든 용이 꿈꾸는 일.
그는 과거 팔천에 오른 동포를 본 적이 있었다.
용의 수명이라고 하는 1만 살을 훨씬 넘도록 살아온, 그야말로 구천의 신들에 필적할 경지에 이른 어르신이었다.
그런데 이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때의 어르신 이상으로 깊고 심후했다.
고작해야 일천의 경지를 간신히 넘은 자신으로선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헉, 설마…….’
이해했다.
300년간 그 어떤 방법으로도 치유할 수 없던 상처가 어째서 나았는지.
—어, 어르신은 누구세요?
그걸 깨달았을 때 용은 이미 그 인간을, 아니, 어르신을 부르고 있었다.
* * *
폐가 쪼그라들기라도 한 듯 숨이 막히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드래곤.
말로만 들었던, 혹은 이야기책 속 글로만 보았던 그 존재가 뚜렷한 형상으로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앗, 제 소개도 없이 죄송해요. 은룡 케레스티스의 자식인 자색룡 메르베키아예요. 고행 중이신 것 같은데 불러 세워서 죄송해요…….
“…….”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유릭의 머리에 울려 퍼졌다.
인간의 목소리였다면 겁을 먹었거나 혹은 잔뜩 긴장했다고 생각했을 목소리였다.
그러나 유릭은 그런 생각을 털어버렸다.
상대는 그 드래곤이다.
자신을 상대로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어, 어르신? 많이 화나셨나요……?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복잡하다.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뭔 소릴 하는 거냐고 따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놈의 세로로 찢어진 동공 앞에선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하지만.
-고행 중인 동포에게 아는 체를 하는 게 금기인 건 잘 알고 있어요. 근데 보시다시피 제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라…….
녀석이 몸을 꿈틀거리며 얘기했다.
그러자 녀석의 상처가 더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끔찍할 정도로 크고 깊은, 그리고 거무죽죽한 기운이 타르처럼 얽혀 있는 상처였다.
‘설마.’
하나는 알겠다.
녀석은 지금 무언가를 크게 착각하고 있다.
‘나를 같은 드래곤…… 그것도 자기보다 위인 드래곤이라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 저 상처를 어떻게 해달라고 부른 것이다.
넘어져 무릎이 까진 아이가 울면서 엄마를 찾듯이 말이다.
‘왜?’
지금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원인 탐색이 아니다.
이걸 어떻게 이용해 이 자리를 벗어나느냐.
—어, 어르신…….
그걸 깨닫자 유릭의 입이 열렸다. 그건 정말로,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임기응변이었다.
“동족의 불문율을 어기고 내게 말을 걸다니, 정신이 있는 것이냐, 메르베키아?”
스스로 외치고도 두근거린다.
심장이 미치도록 뛰는 것이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용이 대답하기까지의 짧은, 그러나 영원과도 같던 시간이 지나고.
—미, 미안해요.
‘하아아…….’
먹혀들었다.
유릭은 속으로, 남몰래 크게 한숨을 토해내었다.
* * *
용은 승천하기 위한 존재다.
그들은 이 땅의 구속에서 벗어나 하늘로 오르길 바란다.
물리적인 의미가 아닌 정신적인 의미.
99.99%의 순수한 마력체인 드래곤은 남은 0.01%의 물질적인 구속마저 탈피하여, 진정한 의미로 더욱 높은 하늘에 도달하는 것을 기나긴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고 한다.
‘고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방법 중 하나.
세상에 존재하는 3천 종류의 생물로 변신하여 그들의 삶을 살아보는 것.
그리하면 깨달음을 얻어 저 위의 아홉 하늘에 달할 수 있나니.
그중에는 당연히 인간으로 변해 행하는 고행 역시 포함되었다.
‘그게 나라고?’
메르베키아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이 부분이었다.
유릭을 인간으로 변하여 인간의 삶을 살고 있는 고룡이라고 생각한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냐고 이유를 캐물으니 두 가지를 답했다.
첫째는 그 정신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높은 존재의 격(格).
‘노익장 또 당신이야?’
유릭은 환호하지도 혀를 차지도 못한 채 애매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외우주>의 노인이 자신의 영혼에 새겨준 각인.
그 각인에 담긴 격(格)을 유릭 자신의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덕분에 용을 마주하고도 살았으니 기뻐할 일이지만, 반대로 그게 없었다면 이렇게 용과 마주할 일 자체가 없었겠지.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염화신무 때문에.’
염화신무의 불꽃 때문이라고 하였다.
-지열로 달군 약탕에 300년을 담그고 있었는데 상처가 악화되는 걸 막는 게 고작이었어요. 그런데 어르신의 불꽃엔 차도가 보여요. 역시 하늘의 불꽃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메르베키아가 순진하게 웃는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눈이 호를 그리고 입가는 둥실둥실한.
유릭은 드래곤의 웃는 낯이라는 걸 정말이지 살면서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웃으니 조금은 분위기가 풀려온다.
“막 성룡이 되었다고 했던가? 정확히 몇 살이더냐?”
—1천 하고도 102년을 살았어요, 어르신.
그 장엄한 스케일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은 올해 겨우 18살로 성인이 됐는데 1102살이라니.
그런 녀석에게 노인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게 웃기기만 할 뿐이었다.
‘어쨌든 대략적인 상황은 알겠어.’
녀석이 연기를 하며 자신을 골려 먹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딱히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기사회생이 될 수도 있다.
“무례인 줄 알면서 날 부른 이유는 그 상처 때문이렷다?”
—맞아요. 부디 어르신의 불꽃으로 저를 치료해 주세요. 사례는 충분히 할게요.
사례.
아주 좋은 단어다.
유릭이 씨익 웃으며 불꽃을 피워 올렸다.
당장 낼 수 있는 최고의 화력으로 끌어올린 후 메르베키아가 담그고 있는 수원의 물을 데웠다.
메르베키아의 상처 부위에서 부글부글 하얀 거품이 끓어올랐다.
-고마워요! 상처가 다 나으면 반드시 사례할게요!
메르베키아가 감격스럽게 얘기했다.
유릭이 후우 호흡을 조절하며 얘기했다.
“그래. 잊지 말거라, 그 말.”
전력으로 기운을 끌어올리고 있는 탓에 숨이 차오른다.
억지로 그것을 숨기며 유릭이 천천히 물었다.
“그래서 어떠냐. 얼마나 지나야 나을 수 있지?”
그 말에 메르베키아가, 너무나도 가볍게 대답했다.
-으응…… 한 30년?
“……뭐?”
-이 추세면 30년 정도면 완치되겠어요! 이만한 상처를 이렇게 금세 치료하시다니 역시 대단해요!
“…….”
동경의 빛까지 띄우며 반짝거리는 메르베키아의 눈을 앞에 두고 유릭은 말문이 멎었다.
30년을 이러고 있으라고?
‘절대 안 돼!’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무언가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한다.
* * *
“도련님! 도련님!”
유릭이 사라진 레어. 아니스가 미친 듯이 유릭을 부르며 찾아다녔다.
분명히 같이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진 유릭.
아무리 봐도 무슨 함정에 빠진 것이 분명했다.
“도련님!”
항상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가 흐트러지고 있지만 아니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초조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그녀가 레어 이곳저곳을 칼로 베고 다녔다.
유릭이 빠진 함정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유릭 공자! 어디 있습니까!”
“도련님!”
파비스와 왕자, 그리고 글렌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니스만큼 걱정하고 있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유릭이 잘못되길 바라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때.
—아니스.
호수의 수면이 흔들리더니 유릭의 형상이 비치기 시작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아니스가 한달음에 달려가 호수에 머리라도 박을 듯이 들여다보았다.
—아니스, 난 괜찮으니까 먼저 가 있어.
“어찌 그런…… 그보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당장 구하러 가겠습니다!”
—아니, 올 필요 없어. 위험한 상황 아니니까 안심해.
“그, 렇습니까?”
확실히 수면에 나타난 유릭의 형상은 무척 평온해 보였다.
—자세한 건 돌아가서 얘기할 테니까 먼저 가. 명령이야.
“아, 알겠습니다.”
아니스가 크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 눈앞에 없는 이상 완전히 안심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본인이 위험하지 않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
“도련님은 어떠신가요?”
글렌이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시다고 한다. 우리보고 먼저 도시로 가 있으라는군.”
아니스가 일행을 보며 대답했다.
글렌이 끄덕였고, 파비스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릭이 없다고 해도 아니스가 곁에 있으니 왕자의 몸은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리헨델 왕자만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그러면 돌아가죠.”
“예.”
유릭이 없는 지금 일행의 임시 리더는 아니스였다.
그녀의 말에 따라 일행이 바깥을 향해 통로를 걸었다.
그러던 중.
—이쪽이다! 이쪽에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다!
통로의 저 너머에서, 군홧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뿐만이라면 일행이 발을 멈추는 일은 없었을 거다.
—이 안쪽에 있다면 대답해라! 너희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다! 엘가이아 경의 검이 이미 이 산을 겨누고 있다!
엘가이아 로젠베르그.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스카디 왕국에 단둘 있는 마스터 중 하나.
8성의 경지에 오른 소드 마스터.
그리고.
“크라우 공작이 기어이!”
왕제(王弟) 크라우 공작의 오른팔인 기사.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왕자를 죽이겠다는 공작의 의지가 분명했다.
부서져라 이를 가는 파비스의 옆에서 왕자가 불안한 듯 아니스를 쳐다봤다.
“…….”
하지만 마스터를 상대로 아니스 역시 답이 있을 리 없었으니.
그녀 역시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 * *
“아직 멀었어?”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아요.
바깥의 상황을 모르는 유릭은 느긋하게 불을 피우고 있었다.
메르베키아를 치료하는 데엔 무려 30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당연히 유릭은 그만한 시간을 이런 동굴에서 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제안했다.
우리 집으로 오라고.
‘집에서 꾸준히 치료해 주면 되니까.’
거의 주택 대출을 갚는 수준의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죽기 전엔 치료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러려면 조건이 있었다.
지금 같은 드래곤의 몸으론 안 된다.
후일 마스터쯤 됐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의 유릭은 공개적으로 드래곤을 데리고 다니기엔 힘도 영향력도 부족했다.
—아, 이 정도면 됐어요. 그럼 뭐로 폴리모프 할까요?
폴리모프는 드래곤이 사용하는 변신 마법이라 한다.
단순히 겉모양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생물의 종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나랑 같은 인간은 어때?”
—으음……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저는 인간의 고행은 이미 마쳤는데요. 기왕이면 다른 생물로 해주세요.
까다롭기는.
“그럼 호랑이로 해. 다쳤으니 들고 다니게 새끼로.”
—호랑이는 아직이네요. 그걸로 가죠.
빛이 나타나 메르베키아의 몸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것은 동그랗게 압축되더니 작은 알과 같은 형태로 변하였다.
그 알이 깨지며, 안에서 새끼 호랑이가 기어 나왔다.
털의 끝부분이 은은하게 자색을 띤 하얀 호랑이.
“오, 대령이랑 같이 있으면 제법 어울리겠어.”
—대령이 누구예요?
“있어. 가보면 알아.”
새끼 호랑이로 변한 메르베키아의 등에는 여전히 큼지막한 상처가 나 있었다.
폴리모프는 겉모습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존재를 다른 생물로 바꾸는 것.
상처를 숨기거나 외형을 마음대로 바꾸거나 할 수는 없었다.
유릭이 천을 꺼내 메르베키아의 등허리를 칭칭 동여매 주었다.
“이걸로 됐다.”
—고행을 떠나는 건 300년 만이에요.
“300년 동안 여기서 치료를 하고 있었다고 했던가?”
—네. 그래서 바깥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기대돼요.
소풍 전날의 아이 같은 눈빛으로 메르베키아가 유릭에게 매달렸다.
과거 읽었던 드래곤의 생태를 조사한 서적에 따르면 드래곤의 성년은 1천 살이라 하였다.
1~100살까지는 해츨링이라 불리는 유년기, 100~1,000살까지는 성장기, 그리고 1,000살부터 성년이라고.
추측건대 메르베키아는 -나이는 성룡일지 몰라도- 아직 성장기나 다름없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야 300년이나 이 동굴 속에서 홀로 쭈그리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어른의 보호를 갈구하는 걸지도.’
생물로서 당연한 무의식의 발현.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처음으로 친…… 아는 드래곤이 생겼어요!
……그게 아니라 그냥 친구가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드래곤 사회의 아싸인 건가, 이 녀석.’
차마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유릭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얘기했다.
“가자.”
—넹, 어르신.
붕대를 감은 새끼 호랑이를 품에 안고 유릭이 위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