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44화
44화. 그게 뭔데?
다음 날.
일어나 보니 무언가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누가 배를 꾸욱 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
“메르…… 너 거기서 뭐 해.”
위화감의 정체는 유릭의 위에서 자고 있는 작은 새끼 호랑이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제는 어디 갔었어?”
—방에서 얌전히 있었는데요?
유릭이 의아한 얼굴로 갸웃거렸다.
어제 방에서 한참 동안 발렌티나와 얘기를 나눌 땐 메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그때는 잠깐 도망가 있었어요. 무서운 인간이 오길래…….
무서우니까 도망갔다니…….
드래곤 주제에 짠내나는 말에서 오는 안쓰러움은 둘째 치고, 무섭다는 말 자체는 놀라웠다.
“어머니가?”
메르가 꾸벅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이 왜 이 가문에서 고행을 하는지 알겠더라구요.
놀랐다.
발렌티나의 경지가 인류의 역사에 남을 정도임 알았지만, 설마 드래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정도라니.
‘그러고 보니 드래곤은 경지를 표현하는 말이 조금 달랐지.’
불현듯 찾아온 궁금증에 유릭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인간이 말하는 9성의 경지를 일천(一天)이라고 불렀던가?”
—대충은요. 제가 딱 일천을 넘은 수준이에요.
즉 메르는 갓 9성을 초월했다는 뜻.
인간의 경지 체계에 따르면 10성을 목전에 둔 수준이라고 보면 되려나?
‘10성 이상은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있지 않은데.’
인간의 역사는 그 이상의 경지를 따로 분류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10성에 도달하는 인간 자체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반면 타고나길 초월의 종족인 드래곤은 그 이후의 경지도 나름 분류를 해놓은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네가 보기에 어때? 어느 정도 경지지?”
—최소한 삼천의 세계에 발을 들인 정도는 되죠.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만 제 눈엔 거기까진 잘…….
그 말은 메르보다도 최소 2단계는 위라는 소리다.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대단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들으니 더더욱.
‘일각에선 이미 반신(半神)의 영역에 들었다느니 뭐라느니 얘기하던데.’
그게 전혀 과장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런데도 그녀는 아직도 수련에 미쳐 있다는 것.
지금 이 순간에도 안주하지 않고 더욱 올라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향상심이야말로, 유릭이 가장 본받아야 할 부분이었다.
“나도 더 힘내야겠군.”
—역시 어르신! 진정한 현자는 3살배기 아기에게도 배울 점을 찾는다던데 그 말이 틀리질 않네요!
“…….”
메르는 자신의 경지가 어머니보다도 위라고 생각한다.
이쯤 되니 무서워질 정도였다.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된 메르가 엄청나게 분노하여 다 때려 부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지금 생각해도 의미 없는 일이다.
복잡해지려는 머리를 털어내곤, 유릭이 아침 수련을 떠났다.
* * *
오랜만에 백월봉의 수련장을 찾았다.
꽤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은 것 같은데도 와보니 내 집처럼 편안하고 안정감이 들었다.
평소처럼 수련장의 가운데에 앉아 염화신무의 운기를 시작했다.
머리에 앉아 있던 메르는 방해하지 않겠다며 내려와 쪼르르 어딘가로 달려간 후였다.
‘엘가이아 로젠베르그.’
운기 중에 떠올린 것은, 그웬델에서 겪었던 마스터의 검술.
특히 마지막 순간 직접 받아내었던 그 오러에 대한 것을 떠올렸다.
‘…….’
아직도 손이 떨리는 것만 같다.
그때의 자신은 정말 미쳤었나 보다. 대체 무슨 깡으로 그걸 받아내려 생각했던 건지.
조금이라도 기운을 쏟아붓는 걸 주저했더라면, 조금이라도 집중이 끊어졌다면, 혹은 엘가이아의 검이 조금이라도 더 강했다면.
다치는 정도로 끝났을 리 없다.
그대로 두 동강 난 시체가 되었을 테지.
‘그래도 덕분에 깨달은 것도 있어.’
허공을 격해서 오러를 날리는 것 정도는 간단한 기술이다.
하지만 그 오러가 벽을 통과하여 그 뒤를 타격하게 하는 것.
그건 결코 쉽지 않다고 한다.
염화신무의 비급에 간단히 언급되어 있고, 유화에게도 들었던 적이 있다.
무림에선 격산타우의 수법이라 부른다고.
‘그랬지, 유화야?’
혹시 몰라 유화를 불러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이 기회에 격산타우의 묘리에 대해 자세히 물어볼 생각도 있었다.
[“아…… 아저씨…….”]
그런데 무언가 상태가 이상했다.
‘왜 그래?’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지금 좀 바빠서…….”]
포목점 일이 바쁘다는 소릴까?
그럴 리가 없다.
유화는, 많이 낫긴 했지만 아직 환자다.
딸을 아끼는 그녀의 어머니가 억지로 일을 시킬 리가 없었다.
애초에 딸까지 대동할 정도로 영세한 가게도 아니라고 했었고.
‘무슨 일인데? 말 좀 해봐.’
[“별일 아니……진 않은 거 같긴 한데. 괜찮아요, 위험하진 않으니까. 조금 침착해지면 연락드릴게요.”]
‘잠—’
뚝.
연결이 강제로 끊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지?
5년 동안 없었던 일이라 괜스레 불안감이 올라왔다.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가볍게 운기 중이던 내기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후우…….”
일단 시작한 운기는 제대로 끝마치자.
유릭이 차분하게 정신을 다잡고는 염화신무의 운기를 마무리 지었다.
불안했던 마음과는 반대로 오늘의 운기는 다른 날보다 더욱 수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운기를 마치고 일어난 유릭이 팔짱을 끼곤 이리저리 왔다 갔다 움직였다.
두어 번 더 연락을 해보려 했지만 받지 않는다.
무슨 일인지 추측이라도 해보려 해도, 저쪽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그것도 불가능했다.
유릭이 그녀에 대해 아는 거라곤 무림이라는 세상에 산다는 것, 그리고 집이 커다란 포목점을 한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둘이서 산다는 것.
‘……혹시 아버지와 관련된 일인가?’
아버지가 없다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별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헤어진 것인지는 모른다.
그 아버지와 연관된 일이라면, 유화의 저런 목소리도 납득이 갔다.
‘어찌 됐든 다시 연락이 오기 전엔 방법이 없으니.’
유화와의 연락은 양쪽 모두의 의지가 없다면 연결되지 않는다.
지금 상태론 유릭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어 잡념을 털어내곤, 유릭이 녹시아를 뽑았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수련에 매진하는 일뿐이다.
혼자서라도 격산타우를 습득하기 위해 그가 검을 들었다.
‘엘가이아의 오러가 이런 느낌이었던가?’
최대한 그때를 떠올리며 유릭이 검에 내기를 피워 올렸다.
염화신무의 불의 기운이 녹시아의 표면에서 유형화되었다.
‘노리는 것은 나무 뒤쪽의 낙엽 더미.’
그가 한쪽의 나무를 노려보았다.
지금부터 저 나무에 불의 기운으로 만든 검기를 날릴 생각이다.
나무가 불타면 실패. 나무는 멀쩡하고 그 뒤의 낙엽 더미가 불타면 성공.
‘사물에 부딪혔을 때 뚫고 가는 건 쉬워. 단순히 힘으로 관통하는 거니까.’
하지만 엘가이아의 검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부딪혔을 때 그 에너지를 고스란히 사물의 뒤쪽으로 전달해 다시 그대로 유형화시키는 것.’
어떻게 전달하는지는 대충 감이 온다.
대기 중에 자연스레 퍼져 있는 자연의 마나.
그 자연의 마나를 매질로 하여 스스로의 오러를 벽 뒤편으로 전달한다.
소리가 공기를 매질로 하여 전달되는 것처럼, 오러의 파동을 대기 중의 마나를 매질로 하여 전달하는 것이 핵심이다.
……아마도.
‘일단 해보자.’
적의 검을 분석하여 스스로 낸 결론이다. 때문에 확실하진 않았다.
하지만 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흡!”
유릭이 호흡을 멈추곤 온 정신을 쏟아, 나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화르르륵!
* * *
나무가 불타오른다.
더 타오르기 전에 유릭이 손을 뻗어 불꽃을 회수했다.
불이 붙은 부분에 약간의 그을음만을 남긴 채 불길은 모두 진화되었다.
“씁.”
유릭이 입맛을 다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수련장 인근의 모든 나무에 그렇게 작은 그을음이 생겨 있었다.
역시 간단히 다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약간 통과한 게 없진 않은데.’
한쪽에 있는 낙엽 더미가 살짝 타올라 있다.
수많은 시도 끝에 그나마 성공 사례라 볼 수 있는 사례였다.
그나마도 온전히 통과한 것이 아니라 쏟아부은 기운의 10%도 채 못 통과했지만.
‘방법이 틀린 것 같진 않아.’
다만 자신이 제대로 요령을 습득하지 못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적의 검을 한번 받아봤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재현하려니 어려울 수밖에.
심지어 그 적이 마스터라면 더더욱.
‘역시 쉽진 않네.’
엘가이아가 들었다면 어처구니없어 펄쩍 뛸 말이었다.
조금이라곤 하지만 마스터의 검을 흉내 낸 것이다.
그것도 한 번 받아본 경험만으로.
과연 누가 5성밖에 안 되는 검사에게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유릭은 전혀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일단은 이 방향으로 수련하는 걸로 하고.’
정 안 된다 싶으면 그때 가서 다른 방도를 찾아보자.
어제 들었던 10기사단의 단장을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10기사단은 로스카의 기사단 중에서도 순수 검술에 치중된 곳이니까.
“대령?”
수련을 마치고 돌아오니 아깐 보이지 않았던 대령이 와 있었다.
등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힐라사가 붙어 있다.
그 대령은 메르의 뒷목을 입에 문 채로 숲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메르 너 뭐 해?”
—저 부하가 생겼어요!
대령의 입에 대롱대롱 매달려선 메르가 깔깔 웃음소리를 내었다.
부하라니, 대령이?
“크릉.”
“아우아우!”
대령과 힐라사가 유릭을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했다.
대령은 한번 목울대를 울리고 힐라사는 대령의 등에서 크게 손을 흔들었다.
—얘네들이 그때 말한 그 호랑이군요! 진짜 신기해요. 천 년 동안 살면서 정령이랑 계약한 동물은 처음 봤어요.
“그래?”
—이 산의 터줏대감인 모양인데 저한테 설설 기는 거 있죠? 그래서 제가 관대하게 부하로 삼아줬어요.
“뭐…… 다행이네.”
유릭이 떨떠름하게 얘기하며 그들을 보았다.
‘이거 부하라기보단.’
대령은 메르를 눕혀놓곤 털을 핥고 있었다. 아마 깔끔히 정리를 해주려는 모양이다.
그리고 힐라사는 어딘가에서 따온 이름 모를 나무 열매를 메르의 입에 넣어주고 있었다.
‘새끼라도 생겼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아하하! 이거 보세요. 저한테 꼼짝도 못 하죠?
그러나 메르는 그런 발상은 떠오르지도 않는 모양이다.
유릭은 그들 셋을 위해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서로 민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모르면 모르는 채로 어울리는 것도 괜찮겠지.
무뚝뚝한 퇴역 군인인 아빠와 언제나 웃는 얼굴로 먹을 걸 주는 엄마, 그리고 천방지축에 말괄량이인 자식.
이라고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장난치는 대령과 힐라사, 메르를 한쪽에 두곤 유릭은 수련에 전념했다.
그리고 다음 날.
유화에게 연락이 왔다.
[“실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찾아와서요.”]
역시 아버지에 대한 소식이었나 보다.
그보다 정말로 사별한 상태였던 건가.
지금의 유릭도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읜 몸이었기에 다소는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할아버지의 부하래요. 저도 어제 처음 들었는데 사실 아버지가 집이랑 연을 끊고 가출을 했었다고 하네요.”]
‘그, 그래?’
저쪽도 어지간히 사연이 많은 집인가 보다.
‘근데 왜 그렇게 시무룩해? 좋은 일 아냐?’
몰랐던 아버지의 소식을 알게 된 것치곤 유화의 어조는 굉장히 침울했다.
아니, 침울하다기보다 조심스럽다고 해야 하나?
[“그게…… 거의 반강제적으로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게 돼서요. 지금 말 타고 가는 중이에요.”]
과연.
지금까지 얼굴도 몰랐던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다는 건가.
확실히 어린 나이에 부담을 느낄 만도 하다.
‘마음 편히 갔다 와. 널 해코지하려는 것도 아닐 텐데.’
[“아니……겠죠?”]
‘부하라는 사람들이 무서운 사람들이야?’
[“친절하고 정중하긴 해요. 엄마랑도 옛날에 알던 사이 같고…… 근데 척 봐도 엄청 센 무림인이에요.”]
그렇다면 무서워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정 무서우면 내가 괜찮은 방어 마법 한번 알아봐 줄게. 지금 네가 익힌 것보다 훨씬 뛰어난 걸로.’
[“정말요?”]
‘어머니한테 물어보면 어떻게든 될 거야.’
비록 염화신무를 익히고 있긴 하지만 자신 역시 가문의 직계다.
최근 좋은 이미지도 쌓아놨으니 가문의 비전 하나나 두 개쯤은 거뜬히 내어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할아버지가 뭐 하는 사람인데?’
강한 무림인을 부하로 부린다고 한다면 그 할아버지 역시 유명한 무가의 인물일 수 있다.
자신은 그쪽의 지식이 거의 없기에 얘기해 줘도 모를 테지만.
[“저도 듣고 놀랐는데요 마교……가 아니라! 일월신교의 사람이라던데.”]
무슨 눈총이라도 받은 듯 유화가 급히 단어를 바꾸며 얘기했다.
물론 그렇게 말해도 유릭이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일월신교가 뭔데?
[“할아버지가 거기 교주인 천마래요.”]
유화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얘기하듯 속삭였다. 하지만 유릭은 갸웃거릴 뿐이었다.
천마는 또 뭐야? 이삿짐센터 이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