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46화
46화. 초대 로스카
빙하설월은 꽃의 이름이다.
본디 설월화라는 이름을 가진 희귀한 꽃이 있는데, 그 꽃은 극도로 기온이 낮은 혹한 지대에서만 피어난다 하였다.
그냥 기온이 낮아서는 안 되고 한 번도 인간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청정한 지역이며, 하늘과 땅의 정기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는 그런 천혜의 구역이 아니면 자라지 않는다.
푸른 하늘을 연상케 하는 하늘색의 꽃잎을 가진 설월화는 한곳에 수백, 수천 송이가 함께 피어오르는 군락의 습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빙하설월은, 그 군락에서 아주 가끔 탄생하는 돌연변이 꽃을 뜻했다.
다른 꽃들보다 한층 탐스러운 꽃잎을 가지고 있는 그 돌연변이의 가장 큰 특색은, 주변의 동포를 모두 말려 죽이는 것.
그 꽃은 동포의 기운을 모조리 빨아들인다.
때문에 빙하설월이 피어난 군락지는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모든 군락이 말라비틀어지고 오직 한 송이의 꽃만이 남는다고 한다.
수천의 동포의 기운을 빨아들여 스스로를 돋보이는.
그렇게 피어난 빙화설월의 꽃잎은 보통의 설월화 같은 하늘색이 아닌, 밤하늘에 떠오른 선명한 달빛을 띠고 있다고 하였다.
‘나한텐 효율이 많이 떨어지긴 하지만…….’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극한의 서리 마나를 내포한 얼음 속성의 영약이다.
그렇기에 유릭에겐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빙하설월이 내포한 서리 마나를 염화신무의 기운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상당한 손실이 일어날 테지.
하지만 그래도 영약은 영약이다.
손실이 있다 하더라도 복용하면 단숨에, 방대한 양의 기운을 보충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아마 못해도 30년은 쌓아야 할 기운을 한 번에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노리고 있었는데!’
기회가 되면 곧바로 찾아가 따려고 벼르고 있었다.
황색 지대로 들어갈 수 있는 최소한의 경지를 달성하고, 첫 임무를 마쳐 마침 시간이 비는 시기.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빙하설월이 4기사단의 탐사대에 발견되지만 않았다면.
“공자님도 들으셨나 보군요. 저희 애들이 이번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하하하.”
4번대 기사단의 단장 게오르그가 크게 웃었다.
그가 흐뭇하게 바라보는 곳에는 4번대 기사들이 조사와 발굴을 위한 장비를 바쁘게 챙기고 있었다.
“이번에 돌아온 기사들은 쉬게 하고, 쉬고 있던 이들로 조사단을 꾸려 출발할 겁니다. 저도 직접 가기로 했습니다. 여하튼 그 빙하설월 아닙니까. 그 정도로 희귀한 꽃을 가져오려면 책임 있는 이가 나서야죠.”
영약이 있다곤 하지만 일단은 새로운 유적이 발견된 일이다.
거기다 발견자 역시 4기사단의 탐색대.
게오르그와 4기사단이 나서는 건 자연스러운 순리였다.
단지…….
“4번대에는 다른 일이 있지 않았어?”
그가 알기로 이 시기 4기사단은 다른 일로 바빴다.
청색 지대에서 발견된 유적을 발굴하느라 바빠 황색 지대까지 탐사를 보내고 그런 일은 없었는데.
“일이요? 글쎄요. 최근에는 한가했는데……. 아, 청색 지대에서 폐허 하나가 발견되었던가?”
“그래, 그거!”
“하하, 그거라면 금방 끝났습니다. 뭐 찾을 것도 없고 해서요.”
그랬나?
자신이 알기론 년 단위로 일이 질질 끌렸던 것 같은-
‘아.’
생각하던 중에 깨달았다.
올해 청색 지대에서 발견되는 유적.
‘풍령 주웠던 거기잖아?’
과거 유릭이 풍왕과 싸워 풍령을 획득했던 바로 그 유적이다.
유릭이 가져온 풍령 외에는 별반 볼 것도 없는 곳.
심지어 나오면서 흔적을 지운다고 유릭이 반쯤 태워 버리기까지 했던 곳.
‘나 때문이야?’
결국 이 변화는 자신 때문이란 말인가?
유릭이 손바닥으로 두 눈을 덮었다.
왜 갑자기 미래가 변한 거냐며 불만을 토로할 셈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전부 자신 때문이라는데 누굴 탓한단 말인가.
“공자님도 황색 지대에 가보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괜찮으시면 저희와 함께 가시렵니까?”
게오르그가 유릭의 속도 모르고 활짝 웃으며 제안했다.
유릭이 눈을 덮었던 손을 내렸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아, 응, 그래. 단장만 괜찮다면 따라가고 싶은데.”
게오르그의 눈이 반짝였다.
흡사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보는 어부 같은 눈빛이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발굴의 즐거움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히 알려 드리죠. 흐흐흐.”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벼르고 있었다는 듯 손바닥을 비비며 좋아하고 있는데 찬물을 끼얹는 것도 불쌍하고.
‘일단 가보고 생각하자.’
영약을 캐는 자리에 참관하는 것만으로도 귀중한 경험이다.
그다음 일은 그때 생각하는 걸로 하자.
그렇게 일단락을 짓곤, 유릭이 짐가방을 챙겼다.
* * *
유릭도 황색 지대에 가기 위한 장비로 몸을 둘둘 둘렀다.
특히 다른 기사들보다 경지가 낮은 유릭에겐 한층 좋은 장비가 지급되었다.
속에 입은 셔츠도, 흉부에 받쳐입은 가죽 갑옷도, 아이젠이 박힌 갈색의 부츠도, 그리고 몸 전신을 덮은 하얀 망토도.
그 모두가 냉기 저항의 술식을 빼곡히 박아넣은 아티팩트들이었다.
거기에 가져온 짐가방을 매는 것으로 유릭의 준비는 끝이었다.
“보통 이런 강력한 영약이 발견되면 가문에 보관하거든. 이런 식으로 보관 중인 영약이 꽤 될걸.”
-아하.
“빙하설월도 똑같이 가문의 비고에 들어가겠지. 따라가 봤자 뭐 그림의 떡이네.”
-그림의 떡이 뭐예요?
“아무리 눈앞에 떡이 보여도 그게 그림이면 먹을 수 없잖아.”
-아하하, 어르신은 재밌는 말을 많이 알고 있네요.
머리 위의 메르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유릭도 같이 웃어주었겠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텐션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하아.”
-그림의 떡이라도 가시는 거네요.
지금 막 게오르그와 4기사단의 발굴단이 마경의 입구를 통과했다.
유릭은 가장 뒤에 붙어서 따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딱히 미련은 없어. 그래도 황색 지대에 들어가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니까. 뭐 딱히 미련은 없고…….”
-미련이 철철 넘치는데요?
발굴단이 모두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유릭도 마경의 입구를 밟았다.
그 한 걸음을 기점으로 세상이 확 변하였다.
얼어붙은 대지. 하늘에 떠 있는 보랏빛의 커튼.
칠색의 마경의 자색 지대.
“시간이 없으니 황색 지대까지 단숨에 주파한다. 낙오 없이 전원 따라오도록!”
“예!”
“예!”
선두에서 지휘를 하는 게오르그가 슬쩍 유릭을 보았다.
유릭이 괜찮다는 듯 끄덕였다.
게오르그도 같이 끄덕이고는 기사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뛰어!”
철컥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우르르 달리기 시작했다.
유릭도 땅을 박차며 그 뒤에 바짝 붙었다.
‘그래도 가는 길은 편하겠어.’
마물이 나타나도 게오르그와 기사들이 모두 정리해 줄 테니.
그거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 * *
보랏빛 지대를 지나고 남색 지대를 지나고, 발굴단은 청색 지대를 주파하는 중이었다.
후미에서 달리던 기사가 숨을 고르며 슬쩍 옆을 보았다.
“후우.”
그곳엔 올해 갓 성인이 된 어린 공자님이 있었다.
청색 지대까지 단숨에 달린 탓에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다. 입에선 단내가 나는 숨이 흘러나온다.
그럼에도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 잘 따라오고 있었다.
‘대단…… 후우, 대단하군.’
생각보다 훨씬 잘 따라오는 유릭을 보곤 기사가 감탄했다.
그냥 평범한 땅이면 몰라도, 이곳은 마경이다.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폐가 얼어붙고 마력이 깎여 나가는 칠색의 마경.
그곳에서, 무려 세 개의 구역을 쉬지 않고 달렸는데도 유릭은 뒤처지지 않았다.
6성인 기사들조차 힘들어 숨을 내뱉고 있는데.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기사 중 한 명이 유릭에게 물었다.
유릭이 힐긋 그쪽을 보곤 대답했다.
“응, 괜찮아.”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이 추운 구역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는 게 절대 정상일 리 없지 않은가?
그래도 유릭은 일절 약한 소리를 내뱉지 않았다.
다른 기사가 와서 물었다.
평소 살짝 경박한 어조 탓에 단장에게 꾸지람을 듣곤 하는 기사였다.
“공자님, 진짜 괜찮아요?”
“응. 괜찮은데.”
“정말요?”
“아, 괜찮다니까!”
자꾸 물어오는 것이 짜증 났는지 유릭이 그리 대답했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유릭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왜 이렇게 끈질긴데? 그렇게 날 안 괜찮게 만들고 싶어?”
“그야 공자님이 힘들다 그러시면 단장도 못 이긴 채 쉬자고 할 거 아닙니까. 저희도 쉬고 싶다구요.”
유릭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까부터 힐끔힐끔 시선이 느껴지더만 그것 때문이로군.
유릭이 크게 단장을 불렀다.
“단장!”
“예!”
기사들의 눈에 반짝이는 희망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유릭은 이미 청개구리 심보가 올라온 후였다.
“이러다가 해 지기 전에 도착할 수나 있겠어? 서둘러야지!”
“아, 역시 그런가요? 안 그래도 생각보다 거리가 멀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게오르그가 활짝 웃었다. 반대로 기사들의 얼굴은 핼쑥해졌다.
“좋아! 좀 더 속도를 올린다! 뛰어라, 이것들아!”
“예, 예!”
“헥헥! 예, 예!”
안 그래도 다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 상태인데 더 속도가 올라 버렸다.
기사들이 게오르그 몰래 비명을 질렀다.
“무슨 짓입니까, 공자님! 안 그래도 다음 녹색 지대는 훨씬 긴 구역이란 말입니다!”
“몰라. 같이 죽어보자.”
“으악!”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고요한 마경을 시끄러운 기사단이 주파해갔다.
녹색 지대에 진입한 후로는 정말로 체력에 한계가 왔는지, 서로 장난치는 말조차 없어졌다.
유릭도 숨을 푹푹 내쉬며 필사적으로 다리를 놀릴 뿐이었다.
‘다행…… 다행히 마물은 안 만나는군. 후우…….’
마물과 조우하진 않았다.
정확히는 근처에 오는 마물들이 게오르그의 기색을 느끼고 자리를 피한 덕택이다.
간혹 겁 없이 이쪽을 노리는 마물이 있어도 게오르그가 째릿 쳐다보기만 하면 모두 꽁지를 말고 도망가기 바빴다.
마스터의 기파를 뚫고 습격을 행할 간 큰 마물은 녹색 지대엔 없었다.
그렇게 기나긴 혹한기 구보가 끝나고.
그들에게 황금빛 세상이 펼쳐졌다.
황금의 땅. 황색 지대.
문제의 유적 앞까지 도착한 그들이 베이스캠프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아…….”
몇 개 피워 올린 모닥불 중 하나에 유릭이 대충 앉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러자 기사 하나가 다가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컵을 건넸다.
쓰러지다시피 한 다른 기사들과 달리 나름 멀쩡해 보이는 기사였다.
‘부단장이었나?’
4기사단의 부단장은 아니스와 같은 7성의 경지라 하였다.
다른 6성의 기사들과는 확실히 기초 체력부터 달랐다.
“너희도.”
유릭이 컵을 받아 한 모금 홀짝였다.
따스한 열기가 몸속에 퍼져 나가며 활력을 돌게 했다.
“후우……. 확실히 녹색 지대가 길긴 기네. 말로만 들었는데 이렇게 길 줄은.”
그러자 한쪽에 쓰러져서 헥헥거리는 기사가 대답했다. 아까 깐족대던 그 기사였다.
“헤엑, 헤엑…… 그러게, 후우…… 왜 단장을 도발하고 그러십니까.”
“쉬고 싶으면 직접 얘기하지 왜 날 가지고 꼼수를 부려?”
“직접 얘기해서 됐으면 공자님한테 부탁 안 했죠! 저희 단장은 그런 거 안 들어준단 말입니다.”
“왜. 게오르그 보니까 대화 잘 통하는 사람이던데.”
“어휴, 공자님이 훈련할 때의 단장을 봐야 그런 소릴 못 하죠.”
얘기를 듣던 다른 기사들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퍼지며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고된 훈련을 끝내고 겨우 휴식을 취할 때와 비슷한, 그런 공기가 흘렀다.
‘온건한 성향의 파벌이라 그런지 확실히 딱딱한 분위기는 없군.’
유릭은 차를 마시며 그런 기사들을 보고 있었다.
기사라곤 해도 유적 탐사나 발굴이 주 업무인 만큼, 강직한 기사들과 같은 분위기는 없었다.
‘만약 게오르그가 아이작 형님의 수하라면…….’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다소 친분을 나눈 만큼 그러지 않기를 바라고 있긴 하지만, 유릭은 한 줄기 의심의 씨앗을 버리지 않았다.
‘일단 당장은 빙하설월에 집중하자.’
뭐가 됐든 지금은 빙하설월이 먼저다.
서로 낄낄대며 쉬고 있는 기사들에게서 눈을 돌려, 유릭이 유적을 바라보았다.
빙하설월이 봉인되어 있는 유적.
설월화의 특성을 생각하면 빙하설월이 피어난 이후에 따로 지어진 유적일 테지.
숨길 생각도 없는 건지 유적에선 강렬한 서리 마나가 풀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의아했다. 빙하설월을 발견했는데도 캐가지 않고 오히려 봉인을 해놓다니.
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어르신.
‘왜.’
그때 메르가 유릭을 불렀다.
-어르신의 불꽃이랑 비슷한 기운이 느껴져요.
메르의 말에 유릭의 눈에 번뜩이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진짜?’
그 말로 적어도 유적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염화신무의 기운이 느껴진다면 범인은 한 명뿐이다.
초대 로스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