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47화
47화. 난 저런 거 못 써
유적이라곤 하나 실제론 작은 건물 하나뿐이었다.
빙하설월을 둘러싸고 있는 2층 정도 되는 탑 같은 건물.
휴식을 마친 발굴단은 모두 장비를 챙겨서 유적 안으로 들어왔다.
“저게…….”
“천고의 영약이라고 하더니…….”
유적의 중앙에 피어 있는 한 송이의 꽃.
그 자태를 기사들이 넋을 잃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 꽃에선, 봉인이 되어 있음에도 사람을 홀리는 마력이 물씬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짝짝.
게오르그가 손뼉을 쳤다.
평범한 박수 소리가 아닌, 마나를 품은 소리가 기사들을 일깨웠다.
“자자, 지금부터 채집 작업을 시작한다.”
“아, 예.”
기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시작했다.
그냥 꽃이라면 그냥 캐가면 된다. 영약이라 할지라도 조심스럽게 캐면 그만이다.
하지만 빙하설월은 봉인이 되어 있다.
꽃이 피어 있는 주위의 땅은 물론이고 유적의 벽 빼곡히 고대의 주문 술식이 적혀 있었다.
그 주문은 빙하설월을 지키고 있었다.
—벽을 술식 채로 강제로 부수는 건…….
—바보 같은…… 잘못하면…….
—역시 제대로 해제해야…….
기사단이라곤 하나 검을 쓰는 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빙하백가 자체가 서리 마나만 쓴다면 검이든 마법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4기사단은 유적 발굴이 주요 업무인 만큼 마법적 지식을 갖춘 자들이 많았다.
유릭은 그들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같이 안 있어도 괜찮아요?
‘마법의 ‘마’자도 모르는 내가 끼어서 뭘 하겠어.’
그가 마법을 쓰긴 하지만 그건 깊은 마법적 원리를 모두 알고 쓰는 게 아니다.
단순히 술식을 이용해 사용하는 법을 익혀 사용하는 것일 뿐.
말하자면 원리를 모르는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는 수준이다.
빙하설월을 봉인하고 있는 마법진의 해제 방법 따위 고안할 수 있을 리 없다.
‘거기다 따로 할 일도 있고.’
무엇보다도 유릭에겐 할 일이 있었다.
메르가 느꼈다는 염화신무와 닮은 기운.
그 기운의 근원지를 찾는 일.
—확실하진 않은데 아마 땅속인 거 같아요.
‘땅속?’
지하란 얘긴가?
“그나저나…… 상당히 고위의…….”
“왜 이 정도 수준의 마법을…….”
빙하설월을 둘러싼 봉인 마법으로 얘기를 꽃피우고 있는 기사들을 한번 쳐다보았다.
모두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 이쪽을 신경 쓰는 기색은 없었다.
그사이 유릭이 유적의 바깥으로 나와 한 바퀴 쭉 돌기 시작했다.
‘왜 초대는 빙하설월을 가져가지 않았을까.’
설월화는 사람의 발길이 닿은 곳엔 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유적 자체가 빙하설월을 발견하고 지은 것이란 얘기다.
그리고 그 기행의 장본인은 아마도 초대 가주.
대체 어째서…….
‘응?’
상념에 빠져 주변을 살펴보던 그때, 발에 닿는 감촉이 조금 이상해졌다.
방금까지 밟던 눈 덮인 흙바닥이 아닌 딱딱한 대리석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유릭이 한쪽 무릎을 꿇고 손바닥으로 쌓인 눈을 스윽 치워보았다.
‘뭐가 있는데?’
—문인 듯요.
발견된 것은 유적을 둘러보다 보니 지하로 통하는 문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밀어도 보고 당겨도 보고 내리쳐도 보았으나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혹시.’
유릭이 설마 하는 생각에 문에 손바닥을 대었다.
그리고 염화신무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화륵.
그러자 작은 불꽃이 맺히며, 문에 그려진 문양을 따라 불꽃이 달리기 시작했다.
쌓여 있던 눈이 모두 녹아 흐른다.
스윽.
이내 문이 열리고, 기이한 공기가 훅 올라왔다.
‘…….’
소리 없이 유령처럼 열리는 그 문은, 마치 괴수의 아가리가 열린 것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그저 지하로 향하는 통로에 불과했음에도, 유릭은 침을 꼴깍 삼켰다.
—가실 거예요?
머리 위에 있는 메르가 변함없이 태평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어느 때라도 변하지 않는 메르의 태도를 보니 조금은 침착해져 왔다.
‘가야지.’
가서 확인해야지.
초대가 남긴 것이 무엇인지.
그가 계단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어르신은 그 불꽃을 수련하기 위해 이 가문에 계셨던 거네요.
“그래. 초대 로스카가 피어 올렸던 불꽃이야.”
—그렇다면 여기는 그 초대 인간이 세운?
“그렇겠지. 아마.”
메르에게는 대충 이런 식으로 얘기해두었다.
세상을 거닐던 도중 처음 보는 신비한 불꽃을 발견했고, 그 불꽃을 찾아 수련하기 위해 로스카의 인간이 되어 고행을 하고 있다고.
뭔가 점점 거짓말이 늘어나고 있는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자신이 사실 드래곤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면 아무리 메르베키아라도 격노할 테니까.
—그 불꽃이 제 상처에 효과가 있다니, 과연 인간은 대단하네요. 잠시 안 본 사이에 이런 굉장한 기운을 만들어내다니.
“어떤 삶에서도 배울 점이 있더군.”
적당히 대꾸해 가며 유릭이 계단을 내려갔다.
의지할 빛이라곤 유릭 본인이 피워 올린 작디작은 불꽃뿐.
하지만 그 작은 불꽃은 폭발적인 빛을 흩뿌리며 통로 내부를 환하게 밝혔다.
“그나저나 그 상처는 누구에게 입은 거야?”
—으음, 저도 불시에 습격을 받았던 터라 자세히는 기억 안 나요.
“습격을 받아?”
—약간 사고 같은 느낌이랄까. 오랜만에 본신의 몸으로 하늘을 고속으로 비행하고 있었는데…….
메르가 300년 전의 썰을 풀기 시작했다.
한창 한 차례의 고행을 마치고 본신으로 돌아온 메르베키아는, 해방된 기분으로 밤 비행을 즐기고 있었다.
마침 쟁반과 같이 커다란 보름달이 뜬 날이라 무척이나 운치가 있었다고 한다.
‘운치라니…….’
은근히 할 건 다 하는 녀석이다.
-그때였어요.
고속으로 비행을 하던 중에 앞쪽에서 무언가 번쩍거리는 것을 발견한 메르.
혹시 새라도 부딪히면 불쌍하다 생각해서 급히 속도를 줄였는데.
“그걸 노렸다는 듯이 무언가가 베고 지나갔다고?”
—네. 너무 순식간이라 누군지 보지도 못했어요.
지금처럼 다른 생물로 폴리모프하여 신체 능력을 제한할 때가 아니라, 드래곤 본신의 몸으로 있었는데도 보지 못할 정도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범상한 녀석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싸우려 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리더라구요. 마치 상처를 입힌 것으로 볼일은 끝났다는 듯이.
“왜지?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죽일 거면 더 확실하게 했을 텐데, 그것만 하고 사라져?”
—제 추측으론 아마 뭔가를 시험해 본 게 아닐까요.
“시험?”
—예를 들면 무슨 무기나 마법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드래곤의 외피를 뚫을 수 있는지 시험해 봤다던가?
상처를 입히는 게 목적이 아니라 무기의 시험이 목적이다?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메르 본인을 노리는 것이었다면 상처만 입히고 도망갈 이유가 없다.
“범인은 아직도 짐작도 안가고?”
—네. 하지만 만나면 알아요.
“어떻게?”
—녀석의 기운은 300년이나 저를 괴롭히고 있었으니까요. 제 몸과 머리에 훤하게 각인되었으니 만나면 곧바로 알 수 있어요. 만나면 아주 그냥 귓방맹이를…….
메르가 화가 나는 듯 씨익씨익 거리며 얘기했다.
그것만으로 주변의 공기가 요동쳐왔다.
아니, 정확히는 공기 중의 마나가 극도로 떨리며 진동해 온다.
용의 분노에 겁먹었다는 듯.
‘……절대로 정체가 들키면 안 되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둘은 두런두런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를 향해 끝없이 뻗어 있는 나선의 계단.
이미 한참 내려온 것 같은데도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멀었어?”
—기운은 계속 가까워져 오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유릭도 느끼고 있었다.
바깥에 있을 땐 메르가 먼저 눈치를 챘지만, 지하로 들어온 이후부턴 유릭도 염화신무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아래에서 거대한, 무척이나 거대한 기운이 느껴진다.
—한 번 불꽃을 떨어뜨려 보죠. 어르신의 불꽃이라면 뭔가 반응이 있지 않겠어요?
“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위험하잖아.”
예를 들면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안쪽의 기운이 폭발하기라도 하면 어쩌란 말인가?
—아하하, 끽 해봐야 전신이 좀 구워지고 말 텐데 뭐 어때요.
메르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얘기하지만 유릭은 전혀 웃을 수 없었다.
“그냥 얌전히 걸어가자.”
—넹. 굳이 급하게 할 필요도 없긴 하니까.
다행히 시간 개념이 느슨한 드래곤이기에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유릭이 속으로 안도를 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저건…….”
도착했다.
초대가 만든 불의 성소(聖所)에.
* * *
열기가 휘몰아친다.
계단을 내려간 지하에 있던 것은 불의 바다였다.
들끓는 불길이 호수처럼 고여 있었고, 그 위를 다리라도 되는 것처럼 기다란 일자 모양의 땅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저기 뭐가 있다.”
-목함 같은데요?
그 땅의 끝에 자그마한 상자가 있었다.
낡고 허름한 목함.
유릭이 눈을 빛냈다.
초대가 남긴 물건이 분명했다.
‘염화신무에 반응하게 만들어놨으니 함정일 리는 없겠지.’
유릭이 기대감을 품으며 일자로 된 땅 위로 발을 올렸다.
그때.
-화르륵!
양옆에서 불길이 솟아오른다.
그중 하나가 유릭을 덮쳤다.
“!”
유릭이 몸을 뺐지만 솟아오른 불길은 사냥감을 덮치는 뱀처럼 쫓아왔다.
그리고 대번에 유릭을 삼켰으나.
“……괜찮은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뜨겁지도 화상을 입지도 않았다.
-해가 되는 마법은 아니네요. 탐색 마법의 일종인가?
‘탐색?’
뭘 탐색한단 말인가?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유릭의 몸을 휩쓴 불꽃이 저 앞쪽에 떨어져 내리더니, 인영(人影)을 만들었다.
불꽃으로 된 사람의 모습.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키도 체형도, 자신을 쏙 닮은 모습이었다.
-오…… 어르신의 신체 정보를 복사해서 똑같이 재현했나 본데요?
유릭이 눈을 찌푸렸다.
그런 게 가능해?
-제법 공을 들인 마법이네요. 어렵다기보다는 굉장히 손이 많이 가는 술식인 것 같은데.
유릭의 앞을 가로막고 등장한 유릭을 닮은 불꽃 인간.
녀석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 검 역시 불로 이루어진 검이었다.
‘과연.’
초대의 뜻을 알 것 같다.
‘나 자신과 싸워 이기란 건가?’
그런 컨셉의 시련인가 보다.
아무래도 쉽게 기연을 퍼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해보지.”
유릭도 녹시아를 뽑아 겨눴다.
자기 자신과 동일한 능력을 지닌 상대라니, 절로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투지라고 불러도 좋을 감정.
-…….
불꽃 인간이 유릭을 응시했다.
응시했다고 해봤자 이목구비는 없었기에 눈이 보이거나 한 건 아니지만.
“…….”
잠시 탐색하듯, 혹은 타이밍을 재듯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
탓!
이윽고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땅을 박찼다.
그런데.
“어?”
유릭의 눈이 커졌다.
자신은 이제 막 몸이 앞으로 쏠린 참인데, 상대는 이미 자신에게 접근한 것이 아닌가?
흡사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아니…….’
그게 아니다.
상대가 빠른 게 아니라, 자신이 느려졌다.
“이게 무슨-!”
캉!
유릭이 급히 녹시아를 들어 놈의 검을 막았다.
묵직한 일격.
그 힘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고 유릭이 자연스럽게 뒤로 튕겨 나갔다.
탓!
낙법을 취하며 유릭이 고개를 들었다.
방금의 일격.
검술이나 팔의 힘은 확실히 자신과 비슷했다.
하지만.
‘뭐지?’
녀석이 한 걸음을 걸은 순간 몸이 극도로 무거워져 왔다.
전신을 내리누르는 압력에 버벅이고 말았고, 그 틈에 녀석이 접근한 것이다.
쿠웅!
유릭이 당혹스러워할 때 녀석이 다시금 땅을 밟았다.
“큭!”
다시금 몸이 무거워지며, 놈이 순식간에 접근한다.
압력이 걸린 건 1초도 되지 않은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지만, 전투에선 그것만으로도 치명적이었다.
다급히 검을 들며 유릭의 눈이 파르르 떨려왔다.
‘뭐야, 나 자신이랑 싸우라는 거 아니었어?’
근데 저 걸음은 뭐란 말인가?
난 저런 거 못 쓰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