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49화
49화. 당연한 의무
유릭의 얼굴이 당혹감에 일그러졌다.
안쪽에서 나는 소란은 전혀 예상외의 것이었다.
빙하설월을 둘러싼 마법진은 이미 해제가 되었는지 그 효능을 잃고 있다.
여기까지는 당연하였는데.
“이미 늦었어! 크하하하!”
봉인이 풀린 직후 부단장인 브랜든이 빙하설월을 채가더니, 단숨에 뒤를 돌아 뛰는 것이 아닌가?
쿠웅! 소리가 나며 그의 신형이 저 멀리 쏘아졌다.
“멈춰!”
게오르그가 단숨에 검을 뽑아 휘둘렀다.
번뜩이는 검신이 푸른 오러를 쏘아내었다.
로스카의 각 기사단의 단장들은 모두 마스터급이고, 그건 게오르그 역시 마찬가지다.
엘가이아의 참격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오러가 브랜든을 휩쓸었다.
그런데.
“흥!”
그걸 브랜든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히 막아버렸다.
7성 정도면 마스터와 합이 가능한 수준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이 안 됐다.
마스터의 오러를 무슨 벌레라도 쳐내듯 저렇게 간단히 쳐내다니?
‘저 검…….’
비밀은 아무래도 브랜든이 든 검에 있는 듯했다.
검에서 풍겨오는 범상치 않은 기운.
데릭이 들고 있는 마검 이솔렛에서 느껴지던 기운과 엇비슷한 기운이었다.
-저거 마검이잖아요?
‘진짜 마검이야?’
-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축적된 것 같진 않은데, 확실히 마검은 마검이에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검, 혹은 신검이라 불리는 것들은 하나하나가 국보급의 보물들이다.
그걸 부단장에 불과한 브랜든이 가지고 있다고?
탁!
브랜든이 뽑았던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어째서 굳이 수납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미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고 판단한 건가.
“큭!”
게오르그가 빠득 이를 갈며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놈은 내가 쫓겠다. 너희들은 위험할 수 있으니 절대 흩어지지 말고 뭉쳐 있도록! 그리고 공자님을 찾아 마경 밖으로 향해라!”
“예!”
기사들의 대답을 듣곤 게오르그도 땅을 박찼다.
그가 브랜든의 뒤를 쫓았다.
한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유릭도 바로 기사들에게 향했다.
“공자님, 오셨군요!”
“큰일 났습니다!”
“대충은 봤어.”
상황을 설명하려는 기사를 손을 들어 막고 유릭이 눈을 찌푸렸다.
“일단 단장의 지시에 따르자고. 지금 조사니 발굴이니 할 때가 아닌 것 같아.”
어차피 이곳에서 얻을 건 모두 얻었다.
“알겠습니다. 캠프는 어떻게 할까요?”
“두고 간다. 정리할 시간 없어.”
캠프 같은 거야 나중에 와서 정리하면 그만이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빨리 마경을 벗어나는 것이 급했다.
빙하설월을 채간 브랜든이 용케 게오르그를 따돌리곤 이쪽을 습격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흩어지지 말고 뭉쳐서. 혹시라도 인질로 잡히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시죠.”
유릭과 기사들이 빠르게 대화를 나눴고.
“인질!”
그 말을 듣던 기사 하나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이곳에 올 때 제일 촐싹댔었던 기사, 마르쿠트였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낯빛이 싹 사라진 모습이 여간 심상치가 않아 유릭이 물었다.
마르쿠트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오, 오늘 자색 지대에서 아이들의 훈련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유릭의 눈이 커졌다.
“아이들? 전투1반의?”
“예, 예! 제 동생이 그곳에 있어서 잘 압니다! 분명 오늘 자색 지대에서 적응 훈련이 있다고 그랬어요!”
최대한 또박또박 얘기하려던 마르쿠트였으나 끝에 가선 거의 울 것 같은 어조가 되었다.
최악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리라.
유릭이 입술을 씹었다.
‘게오르그가 잘 추격해서 잡아주면 문제없겠지만.’
하지만 예의 마검이 마음에 걸린다.
정체 모를 마검을 들고 있는 7성의 기사라면, 설령 마스터라 할지라도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어쩌다 브랜든을 놓치게 되어 그 브랜든이 1반의 아이들을 인질로 삼는다면?
아니, 오히려…….
‘애초에 브랜든이 전투1반의 일정을 알고 꽃의 강탈을 결심한 거라면?’
일이 심각해진다.
느긋하게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달려! 전속력으로!”
“예!”
“알겠습니다!”
유릭의 외침과 함께 기사들이 뛰기 시작했다.
* * *
유릭과 기사들이 자색 지대로 돌아왔다.
이 시점에서 이미 기사들은 반쯤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다소 체력 배분을 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도 상당한 강행군이었기 때문이다.
‘젠장, 때맞춰 도착했나?’
하지만 이조차도 늦었을까 초조한 유릭이었다.
자신들이 아무리 빨리 달려와 봐야 브랜든이나 게오르그보다 빠르진 않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빨리 길을 열어! 이 아이들이 어떻게 돼도 좋단 말이냐!
불길한 상상은 언제나 들어맞는 법.
언덕 저 너머에서 불온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릭과 기사들이 급히 언덕을 내려갔다.
그곳에선 역시나, 걱정하던 일이 일어나 있었다.
“검을 내려놔, 브랜든!”
“네 이노오오오옴! 이게 무슨 짓이냐!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게오르그와 전투1반의 교관인 베르겐 장로.
그리고 날카로운 표정으로 그들과 대치 중인 브랜든이 보였다.
1반의 아이들 13명을 모두 인질로 잡은 채.
“고, 공자님!”
마르쿠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유릭을 불렀다.
인질 중에 자신의 동생이 보인 탓이다.
진정하라고 얘기해 주고 싶지만 그럴 여유도 없을 만큼 상황은 긴박했다.
“브랜든! 멍청한 짓 말고 아이들을 풀어라! 그리고 꽃도 내놓도록! 지금이라면 팔 하나로 용서를 구할 수 있을 거다!”
“크흐흐, 단장. 그런 말에 내가 알겠수다, 하고 항복할 것 같습니까?”
“대체 뭐가 불만이냐! 로스카의 부기사단장이라고 하면 어딜 가도 알아주는 위치가 아니더냐!”
“그러면 뭐 합니까. 하루 웬종일 이 춥기만 한 땅에서 흙이나 파고 있는데! 난 따뜻하고 풍요로운 남쪽으로 갈 겁니다. 가서 남들처럼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 거란 말입니다.”
유릭이 차분히 브랜든의 말을 들었다.
얼핏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위화감은 금방 발견되었다.
‘그냥 은퇴하면 되는데 왜?’
브랜든이 말하는 삶은 순전히 은퇴만 한다면 이뤄질 수 있는 삶이다.
로스카에서 가는 사람을 붙잡아 족쇄를 채우는 것도 아니고, 정당하게 은퇴를 요청해서 자유의 몸이 된 후에 내려가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인질극을 벌이면서까지 일을 키우지?
‘목적은 다른 곳에 있다.’
그 말은 진짜 노림수는 다른 데 있다는 뜻.
그 노림수는 아마.
‘빙하설월과 관계되어 있어.’
놈이 훔쳐 간 빙하설월과 관련된 것이리라.
‘영약의 쓰임새는 두 가지.’
하나는 직접 복용하는 용도.
7성이나 되는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향상심이나 힘에 대한 탐욕이 대단하다는 뜻.
충분히 충동적으로 손을 댈 만한 동기가 될 터.
하지만 유릭은 브랜든이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대담해. 자신감에 넘쳐 있고.’
그 자신감의 원천 중 하나일 마검의 출처에 대해서도 의심이 간다.
대체 어디서 마검씩이나 되는 보물을 가져왔단 말인가?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물건일 수도 있지만, 24시간 부대껴 지내는 기사단 생활을 하며 마검을 꼭꼭 숨겨두고 있는 것도 평범한 일은 아니다.
‘영약의 둘째 쓰임새.’
그래서 유릭은 브랜든이 두 번째를 이유로 빙하설월을 훔친 게 아닌가 싶었다.
두 번째 용도.
누군가에게 바치기 위해.
“길을 여시죠, 단장. 장로도 비켜줘야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한 놈씩 죽어 나갈 겁니다?”
브랜든이 눈을 가늘게 뜨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돔 형태의 얼음 감옥에 갇혀 있는 아이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네놈이 감히! 아이들에게 손가락 하나 댄다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베르겐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 질렀다.
열을 올리는 그를 보며 브랜든이 피식 비웃음을 보냈다.
그러나, 사실 보는 것처럼 그에게 여유가 넘치진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한다…….’
게오르그나 베르겐에겐 보이지 않는 뒤쪽, 브랜든의 목덜미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본래 계획은 아이들을 인질로 삼아 마경 밖으로 나가는 것.
그리고 곧바로 엘드가르드 산맥에 숨어드는 것이다.
그 산은 도망자 하나 숨겨주기엔 충분히 넓고 광활했다.
아무리 로스카라 할지라도 작정하고 숨은 자신을 찾아내긴 쉽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놈들 다 데려가는 건 무리고.’
그러나 그 산속을 열댓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순 없다.
그렇다고 한두 명으로 추리자니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어진다.
한두 명 정도는 희생할 생각으로 로스카가 작정할지 모를 일이 아닌가?
‘그러면 일단은…….’
브랜든이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그 눈에는 짙은 살의가 깃들어 있었다.
‘몇 명 정도는 길을 뚫는 데 쓰고, 다음 일은 그때 생각하자.’
여기까지 결단을 내리는 데 찰나의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브랜든이 얼음감옥으로 손을 넣었다.
그 부분만 얼음의 창살이 열리는가 싶더니, 곧 아이 한 명을 거칠게 끌어내었다.
“브랜든!”
“흐흐흐.”
브랜든이 아이를 꽉 붙잡고는 그 목에 검을 겨눴다.
허리에 찬 마검이 아니라 서리 마나로 만들어낸 얼음의 칼이었다.
“길을 열어줘야겠습니다, 단장, 장로. 당장 열지 않는다면 하나씩 아이들의 목이 날아가게 될 겁니다.”
“이 자식이……!”
“이 천인공노할 놈이!”
게오르그와 베르겐이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분개했으나,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함부로 움직이기엔 인질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놓아줄 수도 없는 일.
게오르그는 차마 길을 터줄 수 없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내가 못 할 것 같아?”
브랜든의 눈 안쪽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더 이상 경어로 말하지도 않는다.
당장에라도 검을 내리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순간.
잡힌 아이만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눈물 콧물을 흘리며 엉엉 울고 있는 상황에서.
-카아아앙!
쏘아진 작은 불꽃이 브랜든의 검을 저 멀리 날려 버렸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
브랜든도 게오르그도, 베르겐조차 당황하며 굳어 있었다.
“고, 공자님, 흐엉엉!”
“알았으니까 이거 놔, 마르쿠트.”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마르쿠트를 발로 꾹꾹 밀어내며 유릭이 수풀 밖으로 나왔다.
“유릭 로스카!”
브랜든이 정신을 차리며 이를 갈았다.
녀석이 다시 얼음의 검을 만들어 아이의 목을 겨눴다.
“마르쉘!”
“오, 오빠!”
마르쿠트가 아이와 마주 보며 서로를 부른다.
남매라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척 봐도 꼭 닮은 얼굴이었다.
특히 눈물 콧물 다 짜내면서 우는 모습이 말이다.
“하아.”
유릭이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브랜든. 제안 하나 하지.”
“…….”
유릭의 등장에 브랜든이 한껏 경계했다.
황색 지대에서 여기까지 쫓아온 건가?
유릭 로스카의 범상치 않은 점에 대해선 가문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런 녀석이 무슨 말을 꺼낼지, 경계하지 말라는 게 무리였다.
그러나 유릭의 제안은 지극히 심플한 것이었으니.
-귀족의 의무를 알고 있나?
-배,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
문득 회귀 직후의 일이 떠올랐다. 그 말을 이런 식으로 지키게 될 줄이야.
사실 그때는 그냥 필립을 갈구고 싶어서 적당히 한 말이었는데.
‘하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참으며 유릭이 브랜든을 쏘아보고 말했다.
“내가 대신 인질이 될 테니 아이들은 다 풀어라.”
당연한 의무를 얘기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