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52화
52화. 내가 찜했어
세상이 넓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한층 예민해진 피부는 살랑이는 바람 한 줄기도 놓치지 않았고, 흩날리는 불티 하나하나가 눈과 귀가 되어 주변의 모든 정보를 빨아들여 유릭에게 전달했다.
앞을 보고 있음에도 등 뒤의 사물이 눈에 보일 듯이 감지된다.
그건 정말로 그가 느끼는 세상이 달라졌음을 의미했다.
‘…….’
유릭이 눈을 들었다.
자신의 머리를 쪼개기 위해 떨어지는 마검 엑셀레아가 보였다.
아까와 같은 압도적인 바람은 없다. 검집에서 갓 뽑은 것이 아니기에.
그러나 엑셀레아가 뿌리는 예기는 그것만으로 충분히 위협적이었고, 하물며 검을 들고 있는 이는 마스터를 목전에 둔 7성의 기사다.
브랜든이 펼치는 서리 마나가 촘촘히 짜여 엑셀레아의 검신을 두르는 검기가 되어 있었다.
닿는 것만으로 전신이 난자당할 예기를 흩뿌리는 검.
하지만 그건 결국, 닿았을 때의 얘기다.
콰과과과과광!
“큭!”
브랜든이 혀를 찼다.
손에 감기는 손맛이 좋지 않다.
엑셀레아가 베어낸 건 아지랑이뿐. 애꿎은 땅만 패여 나가 흙먼지를 일으켰다.
“또 무슨 수작이야!”
브랜든이 확 짜증을 내며 검을 그었다.
그의 검기가 흙먼지를 잘라내며 이윽고 퍼뜨려버렸다.
유릭이 서 있는 곳은 그가 노린 곳에서 한 걸음 뒤쪽.
고작 한 걸음으로 자신의 일격을 피했다는 놀람과 동시에, 유릭의 모습을 보곤 브랜든이 경악했다.
“너…… 누구야?”
유릭의 모습은 방금과는 전혀 달랐다.
전신을 감싸고 있는 두꺼운 불의 기운은 둘째 치고, 피부가 붉고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비늘을 문 입에선 숨을 내쉴 때마다 작은 불꽃이 일렁였다.
“이런 괴물 자식…….”
“…….”
사람을 보고 괴물이라니.
그리 얘기하고 싶었지만 입엔 드래곤의 비늘이 재갈처럼 물려 있다.
그러나 브랜든의 얘기를 들으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생긴 건 악귀나찰과 같아서 머리엔 뿔이 달렸고 입에선 불을 뿜는데…….
이전에 유화에게 들었던 천마란 자에 대한 소문.
물론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애초에 자신의 피부가 이렇게 붉어진 건 딱히 무공의 효능 탓이 아니다.
그저 한계를 넘은 내기의 운용 탓에 몸에 과부하가 잔뜩 걸려 있는 것일 뿐.
단순히 자신의 경지가 더 높았다면 있을 리 없는 현상이란 얘기다.
‘아직은 미흡해.’
그는 자신의 미흡함을 인정했다.
그 탓에 몸이 화르륵 불타오르고 있다는 사실도.
이 상태를 결코 오래 유지할 순 없었다.
하지만.
탁!
아지랑이를 남기며 사라진 그가 브랜든의 측면에서 나타났다.
‘지금은 이거면 충분해.’
그의 검이 브랜든의 어깻죽지를 찔러 들어갔다.
“캇!”
브랜든이 고성을 지르며 몸을 회전했다.
오른손에 들린 엑셀레아가 유릭의 검을 강하게 쳐냈다.
검이 바깥으로 튕겨 나고, 순간 유릭의 품이 훤하게 열렸다.
그 품을 향해 브랜든의 왼손에 들린 얼음의 검이 쏘아졌다.
“…….”
그러나 기운으로 검을 만들고 있는 건 유릭도 마찬가지다.
튕긴 검은 바로 불꽃으로 만들어 흡수한 후, 유릭이 가슴께에 새로운 검을 만들었다.
쿠웅!
기운과 기운이 부딪치며 충격파가 넓게 퍼져 나간다.
급히 만든 검이었으나 당장의 일격을 막는 데는 충분했다.
얼굴을 씰룩인 브랜든이 다시 양손의 검으로 검기를 뿌려댔다.
7성 기사의 막대한 오러가 폭포수처럼 유릭에게 쏟아졌다.
콰과과과광!
그러나 그 무엇도 유릭의 몸을 감싼 불꽃을 뚫지 못했다.
정통으로 가격한다면 충분히 뚫을 만한 위력이었으나, 흐르는 불꽃이 모든 검기를 비껴내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유릭의 신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칫…….”
아까와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브랜든 본인이 가장 빠르게 알아챘다.
‘오러의 질이 달라졌군.’
아까까지만 해도 오러는 자신이 훨씬 위였다.
당연했다. 그는 7성에 달한 기사고 유릭은 고작 5성에 불과했으니.
그래서 아까까지는 검기를 날리는 것만으로 유릭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수 있었지만, 이젠 달라졌다.
오러의 질에 있어서 둘 사이의 간극이 사라진 것이다.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아마 입에 물고 있는 저것이 무슨 마술이라도 부린 것이겠지.
그렇게 납득하며 브랜든이 전략을 바꿨다.
둘 사이에 오러의 차이가 없다면 취할 전략은 뻔했다.
‘검술로 승부를 본다!’
브랜든의 눈이 번뜩였다.
바라던 바다.
본래 오러로 압살해 죽이려고 했던 것은 그게 편해서 그런 것이지, 딱히 자신이 검술에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애초에 7성의 기사가 5성한테 검술로 밀린다는 건 있을 수 없으니까.
“그만 귀찮게 굴고 죽어!”
그의 검이 한층 더 복잡한 경로를 그리며 유릭을 옥죄기 시작했다.
본디 두 자루의 검을 쓰는 그는 현란한 검술이 특기였다.
무식하게 검기를 날리기보단 이쪽이 오히려 진가를 발휘하는 부분.
아니나 다를까 유릭이 눈알을 굴리며 어렵사리 검을 쳐내는 것이 보였다.
브랜든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미소 위로 땀 한 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으나, 지금의 그는 그런 것은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콰쾅!
사방에서 충격파가 시끄러운 벌떼처럼 터져 나갔다.
브랜든의 검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독을 품고 유릭을 쏘기 위해 덮쳐 들어갔다.
유릭은 그 검들을 받아내느라 급급해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보며 짙은 미소를 짓던 브랜든은.
‘……어?’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작은 물방울이 호수에 커다란 파문을 만들 듯, 그 작은 위화감은 브랜든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움직이지 않아?’
위화감의 정체는 유릭이 꼼짝도 않고 있다는 것.
분명 아까는 자신의 검을 쳐낸다고 뒷걸음질을 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설마…….
“그런-”
단단히 박힌 기둥과 같은 유릭의 발.
그걸 보는 브랜든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 직후.
쿠웅-
유릭의 발이 땅을 밟았다.
“헉!”
막 검을 뻗던 브랜든의 자세가 엉거주춤해졌다.
갑자기 폐가 쪼그라드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놈의 공격은 크게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고.
양옆으로 비틀 듯이 그은 브랜든의 두 검이 허공을 찢었다.
‘<태양천보(太陽天步)>.’
그때 불꽃 인간이 사용하던, 그리고 목함에서 얻은 페이지로 유릭이 습득한 보법.
실전에서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불꽃 인간에게 하도 시달려서 그런지, 생각보다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멈칫한 브랜든의 아래로 접근한 유릭이 놈의 턱밑에서 검을 찔러갔다.
“으아아아악!”
브랜든이 황급히 몸을 젖히며 뒤로 뛰었다.
그럼에도 모두 피할 수 없어, 턱 일부분이 크게 베여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어딜 가려고?”
물론 유릭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세를 잃고 급히 뒤로 뛰는 적이라니, 이보다 더 추격하기 좋은 상대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다음 태양천보를 밟은 유릭이 나타난 곳은 브랜든의 정면이었다.
크게 내려치는 불의 검이 브랜든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콰앙-!
“크윽……!”
몸을 굽힌 그대로 브랜든이 엑셀레아를 들어 유릭의 검을 막았다.
유릭이 팔에 힘을 주자 끼기긱, 하며 브랜든의 몸이 더욱 땅에 가까워갔다.
“아니스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네.”
마치 어제 읽은 책의 감상을 말하는 것 같은 말투.
브랜든이 으득 이를 갈았다.
아니스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담긴 뜻만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 자식……!”
“아까까진 오러의 차이가 커서 몰랐는데, 지금은 잘 알겠어.”
“뭐가, 뭐가 말이냐?”
끼기긱.
유릭이 한층 팔에 힘을 주며 브랜든을 밀었다.
이제 그는 거의 땅에 엎어질 정도로 몸이 굽어 있었다.
“너, 검술은 허접이구나?”
“이익!”
뚝,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브랜든의 이성을 유지하던 끈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유릭 로스카아아아!”
삐걱, 우드득.
캉!
브랜든이 무리해서 몸을 비틀며 유릭의 검을 비껴냈다.
그러고도 다 피하지 못해 유릭의 검은 브랜든의 옆구리를 길게 긋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로스카의 추격에서 도주하려면 상처 하나 없이 만전의 상태여야 한다는 그런 생각도 이젠 없어졌다.
지금 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건, 살을 주고서라도 뼈를 발라내 버리겠단 특단의 의지.
으드득.
옆구리의 욱신거림을 애써 무시하며 그가 검을 집어넣었다.
탁.
엑셀레아가 검집에 꽂혔다.
순간 유릭의 눈에 긴장이 흐른다. 그걸 보며 브랜든이 웃었다.
그래, 이 검은 절대 무시하지 못하지.
엑셀레아는 검집에 꽂혀 있을 때가 진짜 공격의 신호이니.
“죽어어어어!”
이 거리면 절대 빗나가지 않는다.
필살의 의지를 갖고 브랜든이 검을 뽑았다.
텁.
그러나 뽑히지 않았다.
“뭣!”
아까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엑셀레아의 검집과 검을, 어느새 자라난 나무뿌리가 휘감아 묶어버린 것이다.
브랜든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똑같은 수에 또……! 그 짐승도 아직 안 죽었단 말인가!
“이익!”
이번에도 그가 힘으로 찢고 검을 뽑으려 하였으나.
“늦어.”
아까완 달리, 지금의 유릭은 이 작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서걱!
“끄아아아아아!”
엑셀레아를 뽑으려던 브랜든의 팔이 그대로 날아갔다.
흩뿌려진 피가 눈 덮인 땅을 적셔왔다.
‘아, 아직!’
브랜든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왼손으로 엑셀레아를 잡고 엄지손가락을 튕겨 검을 뽑으려 하였다.
푸슉!
그 손목마저 유릭의 검에 절단 났으나, 아주 약간 검을 뽑는 것엔 성공했다.
‘됐다!’
그 작은 틈 사이로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크, 크하, 크하하하하!”
피를 흘려 미쳐버린 것일까?
아니, 지금 브랜든은 어느 때보다 냉정했다.
그 냉철한 머리로 상황을 판단했다.
이제 자신은 끝이라고.
‘데려가 주마!’
이 몸으로 로스카에게 도망치는 것은 무리다.
그렇다면 최소한, 눈앞의 꼬맹이라도 데려갈 수 있도록.
-콰과과과광!
그의 심장에 새겨진 코어가 격발하며 서리 마나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수십 년에 걸쳐 쌓아진 서리 마나가 주인의 의지에 따라 폭주했다.
엑셀레아가 일으킨 폭풍 속에서, 그의 서리 마나와 그리고 잘린 팔에서 흐르는 핏방울이 뒤섞이며 붉은 서리폭풍이 되어 쏟아졌다.
“뒈져라, 유릭 로스카아아아!”
그의 최후의 최후의 일격이 유릭에게 쇄도했다.
붉은 눈보라의 폭풍이 회전하며 모든 걸 쓸어버릴 기세로 유릭에게 쏘아졌다.
그러나.
“어디 보냐, 너?”
유릭은 이미 브랜든의 뒤로 돈 후였다.
붉은 눈보라가 쓸고 지나간 것은 유릭이 남긴 아지랑이뿐.
브랜든이 입을 벌렸다.
“네, 네놈-”
유릭이 한 손으로 브랜든의 뒷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불꽃의 검을 들어.
촤악!
거침없이 목을 그었다.
“꺼어-”
눈을 까뒤집으며 거품을 문 브랜든의 시체가 쓰러진다.
툭.
그 스스로가 일으킨 눈과 얼음의 폭풍우 속에 파묻히며, 붉은 눈이 그의 시체를 덮어갔다.
하얀 겨울의 산맥에서 유일하게 붉은 그 장소는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하아.”
끝났다.
유릭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 * *
5중첩의 검화는 이미 풀렸다.
입에 문 드래곤의 비늘은 이미 모든 마나를 빨아먹어 바스러진 후였다.
아까 전투 중에 말을 했던 것도 비늘이 사라져서 가능했던 것이다.
“컥, 커헉! 하아, 하아…….”
그가 숨을 몰아쉬며 몸 상태를 확인했다.
화룡검화는 이미 풀었지만 아직도 몸속에선 염화신무의 기운이 폭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면…… 괜찮을 거 같은데.’
다행히 사태가 심각하진 않았다.
한동안 또 요양을 해야겠지만 그래도 죽거나 기혈이 뒤틀리거나 그럴 우려는 없어 보였다.
두 단계나 강제로 기어를 올린 대가라고 하면 싼 것이다.
-괜찮으세요?
메르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다가왔다.
그러나 걱정이라 해봐야 감기에 걸린 지인을 걱정하는 정도의 느낌이지, 정말 죽을까 봐 하는 걱정은 절대 아니었다.
유릭이 아픔에 눈을 찡그리며 얘기했다.
“어, 괜찮긴 한데…… 한두 달은 또 요양해야 할 것 같아. 그리고 당장 졸려 미치겠어.”
한바탕 불평을 토로한 유릭이 힐긋 메르를 보았다.
눈꺼풀이 감기지 않도록 힘을 주며 메르를 똑바로 바라봤다.
“메르, 아까 얘기한 거 잊지 않았지?”
-네, 네에…….
“좀 있으면 누나든 다른 기사든 누구라도 올 거니까 잘 처리해.”
-진짜로 제가 해요?
메르가 싫은 일이라도 떠맡는 듯 울상을 지었지만 유릭의 엄한 표정을 보더니 움찔 몸을 떨었다.
“중요한 거니까 잘해.”
-아, 알았어요. 맡겨주세요.
확답을 듣고 나서야 유릭이 표정을 풀고 몸의 힘을 풀었다.
감겨오는 눈꺼풀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맡기며, 그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남겼다.
“그리고 저 검도…… 내가 찜했으니까 아무도 못 가져가게 해.”
-네, 알겠어요.
메르의 대답을 듣곤 유릭이 마음 놓고 의식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