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53화
53화. 1+1
탓!
문제의 현장에 엘린이 도착했다.
다른 기사들 역시 달려오고 있었으나 그녀가 가장 빨랐던 것이다.
도착한 직후 그녀가 느낀 것은, 대기 중에 떠도는 마나들이 미친 듯이 요동치는 감각이었다.
바로 이 장소에서 전투가 일어났다는 증거.
그러나 사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전투의 흔적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브랜든…….”
팔이 잘리고 손목이 잘리고, 그리고 반쯤 목이 잘려 죽어 나자빠진 브랜든의 시체가 있었으니까.
그것을 보고 그녀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예상하고 있던 것은 최상이어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
최악이라고 하여도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유릭이 이미 살해당했을 경우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놓여 있는 시체는 브랜든의 것이 아닌가?
‘유릭이 이겼다고?’
7성의, 그것도 정체 모를 마검을 들고 있는 기사를?
-제가 아니었어도 도련님이라면 괜찮았을 겁니다.
그웬델에서 갓 돌아왔을 때 아니스가 한 얘기가 떠올랐다.
마스터의 타깃이 되었음에도 홀로 무사히 생환을 완료했다는 유릭에 대해서.
그건 운이 따라준 거라 생각했다.
동생이 남들과 다른 비범한 아이임은 알았지만, 그래도 아직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하지만, 브랜든의 시체를 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아니다.
이미 유릭은 훌쩍 커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유릭! 어딨니!”
그런데 정작 그 유릭이 보이지 않았다.
엘린이 크게 동생을 부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뭔가를 끌고 간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녀가 지체 없이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수풀을 헤치고 얼마간 나아가자 발견한 것은.
“돔?”
나무뿌리로 지어진 돔과 같은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새하얀 호랑이.
“대령!”
호랑이를 알아보고 그녀가 단숨에 달려갔다.
온통 새하얀 갈기를 가진 호랑이는 그 밖에도 있지만, 일부분의 털끝이 연녹빛으로 물들어 있는 호랑이는 그녀가 아는 한 한 마리뿐이었다.
“크릉-”
갑자기 나타난 사람의 모습에 대령이 순간 으르렁거렸지만, 이내 누군지 깨닫고 목 울림을 멈췄다.
엘린은 유릭을 해할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대령이 돔을 열어 엘린을 들여보내 주었다.
“유릭!”
그곳에는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유릭이 누워 있었다.
온통 새빨개진 피부에, 뜨거운 열을 내뿜으며.
“유릭! 어떻게 된 거니? 괜찮아?”
그녀가 다급히 유릭을 안으며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유릭이 의식을 잃었음을 깨달은 그녀가 유릭의 이마를 짚어보고, 목과 손목의 맥도 짚었다.
다행히 맥은 뛰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열이…….”
열이 엄청났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도저히 살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엘린의 눈이 떨려왔다.
물론 유릭은 불의 마나를 익힌 만큼 열에 대한 내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안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무리 내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만한 고열에 오래 노출이 된다면, 뇌나 어딘가에 장애가 생길 우려가 크다.
사실, 유릭의 몸은 이미 회복기에 접어들어 그럴 우려는 없었지만, 그녀가 거기까지 알 수는 없었다.
‘어쩌지?’
급히 끌어 올린 서리 마나로 유릭의 몸을 식히며, 그녀의 동공이 떨려왔다.
물론 당장 의원에게 데려갈 생각이다.
하지만 제대로 나을 수 있을까?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증상이었기에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데려가야 한다.
그런 생각에 유릭을 둘러업으려던 그녀였으나.
-다급한 모양이구나.
머릿속을 강타하는 울림에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풍겨오는 위압적인 존재감.
목소리의 정체가 어디 있는지 보이진 않았지만,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그녀의 발을 멈추기엔 충분했다.
“누, 누구냐!”
적인가?
브랜든이 데려온 한패?
만약 그렇다면 큰일이다.
저 목소리의 주인은, 그저 말을 건 것뿐인데도 솜털이 쭈뼛쭈뼛 서오며 몸이 떨려온다.
엘린은 지금 인생에 다시없을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아픈 동생이 있는 앞에서!
-내 이름은 메르베키아. 아홉 하늘을 추구하는 존재이니.
다시 한번 목소리가 울린다.
메르베키아란 이름은 처음 듣지만, 아홉 하늘이란 표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드래곤!”
세상사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는 희귀한 생명체.
이 세상 모든 생물의 정점에 서 있다는 존재인 드래곤이 스스로를 지칭할 때 사용한다는 말.
‘어째서!’
드래곤이 이 장소에?
물론 엘드가르드 산맥은 무척이나 넓고 광활하다.
이 넓은 산 어딘가에 동면 중인 드래곤이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필 왜 이 장소에, 서둘러 동생을 데려가야 하는 이곳에 나타난단 말인가?
그녀가 유릭을 등 뒤로 숨기며 극도로 경계심을 올렸다.
새끼를 지키기 위해 가시를 바짝 세우는 고슴도치와 같이.
그러나 그녀의 경계심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목소리는 느긋하게 얘기해 왔다.
-뒤의 아이가 많이 아픈 모양이구나. 가족이더냐?
“그…… 그렇습니다.”
바짝 말라오는 침을 애써 삼키며 그녀가 대답했다.
-운이 좋았구나. 이렇게 가까이에 간단히 나을 방법이 있다니.
잔뜩 긴장한 그녀와 다르게 태연스레 말하는 목소리.
그러나 그 내용에 엘린은 태연할 수 없었다.
“나을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가까이 어디에?”
그녀의 다급한 외침에 메르베키아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모르겠느냐? 바로 근처에 희귀한 영꽃의 기운이 풀풀 풍기고 있지 않느냐?
그 말에 그녀는 깨달았다.
브랜든이 애초에 왜 유릭을 납치하고 도망치려 했던 것인지.
그 품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 것인지를.
“감사합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그 꽃의 희귀함을 생각하면 조금은 주저할 법한데도, 엘린은 망설임 없이 브랜든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직후, 수풀이 바스락거리며 새끼 호랑이가 나왔다.
-하아…… 겨우 끝났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이상한 연기를 하라니…….
모르는 이랑 대화를 하는 것조차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묘한 연기까지 하라니?
유릭의 부탁 -거의 강제- 이 아니었다면 절대 자발적으로 하진 않았으리라.
메르가 기절한 유릭을 원망스레 힐끔거리더니.
꾸욱 꾸욱.
앞발로 몇 번이고 얼굴을 눌렀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였다.
* * *
눈을 뜨니 보인 것은 낯익은 천장이었다.
별궁의 자신의 방의 천장.
“내 검!”
벌떡 일어난 유릭은 대뜸 검부터 찾았다.
그러곤 침대 옆에 곤히 세워져 있는 두 자루의 검을 발견했다.
인질이 되었을 때 놓고 올 수밖에 없었던 녹시아, 그리고.
‘마검이다!’
브랜든이 사용하던 풍마검 엑셀레아.
기연관에서 염화신무를 얻었던 이래로 최고의 소득이 아닐 수 없었다.
번쩍거리는 연녹색의 검집을 보며 유릭이 침을 삼켰다.
당장에 유릭이 검을 들어 스윽 뽑아 보았다.
약간의 마나가 빨려 들어가더니 실내에 스르르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마검이라는 이름에 맞지 않게 무척이나 순한 바람이었다.
물론 이 검의 위용을 몸소 느낀 유릭은 결코 순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음?’
희희낙락 검을 이리저리 살피다 보니 손잡이 끝에 뚫려 있는 고리가 보였다.
마치 끈이나 장식 따위를 매어놓기 위한 듯한 부분.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유릭이 품속에 손을 넣어 풍령을 꺼냈다.
그걸 달아보니.
‘딱이네.’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딱 어울렸다.
처음부터 한 세트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딱 맞는다.
진짜 한 세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유릭은 풍령을 계속 엑셀레아에 달아두기로 했다.
둘 다 바람을 조종하는 능력이니 같이 쓰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엑셀레아를 들고 흐뭇해하던 유릭이 그제야 스스로에게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안 아프네?”
전신에 올라오던 열과 기혈에서 뻥뻥 터져 나가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염화신무의 내기는 화룡검화를 쓰기 이전처럼 단전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유릭은 이 상황에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메르가 잘 해줬구나.’
메르가 자신의 부탁을 잘 수행한 것이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몸속을 관조했다.
염화신무의 기운과는 전혀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열기가 느껴지는 불의 마나가 아닌, 차갑게 얼어붙는 서리 마나.
그 방대한 양의 서리 마나는, 채 단전에 들어가지 못해 유릭의 겉만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더 볼 것도 없이 명백했다.
빙하설월의 기운이 분명하다.
-일어나셨어요?
“메르! 아이구, 요 기특한 녀석!”
유릭이 당장에 메르를 안아 올려 볼을 비볐다.
그가 메르에게 지시해 놓은 것은 하나였다.
만약 자신이 전투 중에 열기에 타올라 쓰러진다면, 찾아올 이를 잘 속여 자신에게 빙하설월을 먹이게 하라고.
-마침 찾아온 게 어르신의 누나라 다행이었어요. 다른 사람보다 훨씬 어르신의 몸을 걱정해서 의심 하나 없이 바로 먹이던데요?
“누나를 속인 건 좀 죄책감이 들긴 하네.”
다른 기사였어도 가문을 속인 것이니 별다를 건 없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엘린을 직접 속였다는 것이 조금 가슴이 아프긴 했다.
나중에 남몰래 벌충이라도 해야겠지.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도 빙하설월을 먹었다는 사실은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잘했다, 잘했어!”
-……흥. 다시는 이런 일 시키지 마세요! 저는 다른 사람이랑 얘기하는 게 정말 힘들단 말이에요!
보들거리는 새끼 호랑이의 털을 마구 비비며 유릭이 진심으로 크게 웃었다.
영약을 먹은 기쁨에 비하면 이 정도 투정이야 마냥 귀엽게 보일 뿐이다.
심지어 품속의 목함엔 초대가 남긴 불의 단약까지 남아 있지 않던가?
‘1+1이냐고!’
프흐흐흐, 아무리 참으려 해도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참이나 메르를 데리고 비비던 유릭이 이내 그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이젠 웃는 건 멈추고 조금은 진지해질 때다.
침대 위에서 아빠다리를 하고 팔짱을 낀 채, 진중한 표정으로 메르와 마주보고 앉았다.
“이 기운을 어떡하면 좋을까.”
의제는 빙하설월의 기운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가장 간단하게는 코어에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죠. 다만 어르신의 기운과는 완전히 상극이라…….
“불의 기운으로 바꿔서 단전에 쌓기에는 손실이 크겠지.”
특정 속성을 강하게 띄는 영약을 다른 속성의 코어가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변환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일정의 손실이 발생한다.
하물며 상극의 속성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절반만 흡수해도 다행일 거야.”
아무리 잘 흡수해도 흡수율은 5할 이하.
염화신무의 흡수율이 다른 비전보다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손실이 없을 수는 없다.
-꽃에 담긴 기운 자체가 워낙 좋으니까 절반만 돼도 손해는 아닐걸요?
“그건 그렇긴 하지.”
메르는 그 정도만 되어도 훌륭하단 식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유릭은 뭔가 영 내키지 않았다.
그 좋은 기운을 절반이나 허공에 날린다니, 너무 아깝지 않은가.
생각지도 않게 들어온 공짜 영약이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하나?
-으음…… 그러면 이렇게 쓰는 건 어때요?
“어떻게?”
메르가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드래곤의 조언이다. 필시 혼자 끙끙거리는 것보단 좋은 방안이 나올 터.
“과연.”
그리고 그건 확실히 좋은 사용법이었다.
긴 얘기를 요약하면, 몸을 식히기 위한 기운으로 남겨두자는 얘기였다.
언제 또 무슨 일이 있어 화룡검화를 과하게 사용하게 될지 모르니까.
말하자면…… 그렇지.
“수랭식 쿨러로 쓰잔 말이지?”
간단한 비유를 들어 이해하며 유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아이디어다. 바로 채택하기로 하자.
-? 어르신은 이상한 단어를 참 많이 알고 있네요.
물론 메르는 알아듣지 못하고 갸웃거리고 있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