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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56화 (56/166)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56화

56화. 염색

대륙에는 영향력이 막강한 10개의 가문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 무력이 남달라 2강(强)이라 불리는 가문이 있었으니.

무엇을 숨기랴, 유릭의 가문인 빙하백가 로스카와 적마도가 아칸이었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를 밟고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수십 년을 싸워온 철천지원수.

-특기인 불의 마나를 살려 정체를 숨기고 아칸의 영역에 잠입하거라. 임무 장소와 내용은 이하와 같으며…….

유릭에게 내려온 임무는 그 원수의 영역에 스파이로 침투하라는 것이었다.

정체를 숨기고 첩자로 들어가 모종의 정보를 습득하는 임무.

“하아.”

유릭이 한숨을 쉬었다.

어려운 임무가 내려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임무일 줄이야.

아무리 봐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닌가.

정체를 숨기고 적진에 잠입해서 임무를 수행하고 빠져나오라니.

게다가 더 화가 나는 것은.

“합리적인 인선이군요. 어렵겠지만 도련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정체만 잘 숨기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

글렌의 말대로 할 만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걸렸을 때의 리스크는 목숨을 잃을 정도로 크지만, 임무 자체는 할 만하다 생각한다.

그 사실이 유릭을 더욱 짜증 나게 하였다.

철저하게 유릭의 능력과 실적을 가늠하여 ‘오질나게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은’ 딱 그 선의 임무로 선별한 것이 눈에 보였으니까.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하아, 그래, 알았다, 알았어. 임무 받겠다고 전달해. 준비 마치는 대로 출발한다고.”

“알겠습니다.”

가문이 내린 임무에 거부란 있을 수 없다.

정말로 합리적이고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유릭이 임무를 수락하겠단 뜻으로 서신에 서명하곤 글렌에게 건넸다.

“데릭 공자님의 일은 어쩔까요? 지금 보고 드립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형님과는 관계없나 봐?”

아이작과 연관이 있다면 지체 없이 보고하라고 해놓았다.

그런데 저런 질문을 한다는 건 연관이 없다는 뜻이겠지.

“예. 데릭 공자님 개인의 문제였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것이…….”

글렌이 데릭의 첫 임무지를 설명하며 보고를 시작했다.

꽤 길게 이어진 보고를 요약하자면 이랬다.

데릭이 지금 정신줄을 놓고 있는 이유는, 임무지에서의 첫 살인 때문이라고.

“과연.”

유릭이 납득했다.

생각해 보니 첫 임무라고 하면 첫 살인이 있었을 수도 있구나.

회귀 후의 유릭은 이미 15살 때 첫 살인을 하였다.

데릭을 꼬드기려던 알리샤의 목을 벤 것 말이다.

그게 지금의 자신의 첫 살인이었지만, 회귀 전의 기억이 있어 크게 동요하진 않았다.

회귀 전 용병 시절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는 전장에도 참여했던 그였으니까.

“하필이면 공자님이 있던 현장이 무척이나 참혹한 곳이었다 합니다. 소수부족끼리 싸우는 전장이었는데…….”

멘탈이 나가 있는 것이 이해가 갔다.

깔끔하게 한 사람 죽이기만 해도 한동안 정줄을 놓게 마련인데, 전쟁터나 다름없는 현장이었다니.

오히려 어째서 첫 임무를 그런 곳으로 보냈는지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보통은 좀 유한 곳으로 보내는 게 정상 아닌가?

“듣기론 태상 가주님의 의향이었다고 합니다.”

“씁…… 할아버님이 좀 고약하시긴 해.”

유릭이 레오폴딘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레오폴딘이 손주인 자신들에게 애정을 주는 것은 확실하지만, 문제는 애정의 방향에 있었다.

온실 속에 화초를 심어놓곤, 싹이 보이나 싶으면 온실을 죄다 때려 부숴 허허벌판으로 만든다.

그게 레오폴딘이 가진 교육관이었다.

“뭐, 아무튼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군.”

“언젠가는 거쳐가는 과정이니까요. 성장통이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음속에 심마가 든 것도 아니고 아이작의 수작도 아니다.

로스카의 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거쳐 가야 할 성장통.

유릭이 신경 써줄 일은 아니었다.

스스로 극복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었으니.

“짐이나 싸러 가야겠군. 너도 준비해.”

“알겠습니다.”

적진에 들어가는 일이다.

아무리 유릭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혼자 갈 수는 없는 일.

섀도우인 글렌이 유릭의 곁을 수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닌가.’

여행 준비를 하러 나가는 글렌을 배웅하곤 유릭이 생각에 잠겼다.

아칸의 영역으로 가는 일.

그렇게 부정적이기만 한 일은 아니다.

‘초대의 단약을 먹을 장소를 찾을 수 있겠어.’

영약을 보다 확실하게 흡수하기 위해선 그 장소의 기운 역시 중요하다.

그리고 불의 단약이라면 당연히 로스카보단 아칸 쪽에서 먹는 것이 옳다.

“불의 기운으로 유명한 장소라…….”

아칸에서 불의 기운으로 유명한 장소라면 차고 넘친다.

그중 어디가 가장 괜찮을지 고민하며, 유릭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 * *

“유릭은 임무를 받겠다고 하더냐?”

“예. 글렌 클라인을 통해 연락이 왔습니다.”

가주의 알현실.

이번에는 레오폴딘이 직접 딸인 발렌티나를 찾아왔다.

유릭이 떠난 후에 있을 ‘대청소’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놈들의 영역인 만큼 안전하다 할 순 없지만 그래도 괜찮겠지. 그중에서도 변두리가 아니더냐.”

“유릭이라면 충분히 들키지 않고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유릭이 향하는 곳은 아칸의 중심지는 결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아칸의 영역 중에서도 변방.

거의 시골이라 불려도 좋은 곳이었다.

두 사람이 굳이 그런 곳으로 유릭을 보낸 이유는 하나였다.

“이걸로 보복을 당할 우려는 없겠죠.”

“유릭이 아이작 그놈을 꽤나 많이 방해했으니까 말이지.”

가문을 청소하는 과정에서 튀어나올 바퀴벌레들이, 유릭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유릭은 이미 아이작의 행사를 두 번이나 방해했다.

만약 그것에 원한을 가지고 있다면 청소가 시행되는 와중에 가문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 할 수 있었다.

때문에 가문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는 심산.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남들이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을 발상이었다.

멀리 보내는 건 좋은데, 그게 하필이면 적의 구역이라니?

하지만 아이작이 로스카의 직계란 것을 생각하면, 그건 합리적인 판단이다.

이미 영지 내에서 아이작의 끄나풀이 둘이나 발견되었다.

본성이 있는 직할지 내에서도 이럴진대, 로스카의 다른 영역엔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지 않는가.

아이작의 영향력이 절대 있을 수 없는 아칸의 영역 쪽이 오히려 안전할 수도 있었다.

“그래, 유릭이 가는 곳이 어디라고?”

“카자르라는 작은 왕국입니다. 아칸 가주의 여덟 번째 부인의 고향이기도 하죠.”

다만, 그들이 한 가지 간과한 가능성이 있었다.

간과했다기보단 절대 그럴 리 없어 떠올리지도 않은 가능성이라 보는 것이 옳으리라.

“카자르라면 그 사막왕국 말이군. 확실히 그곳이라면 아칸의 본가랑도 떨어져 있고 아이작 놈이랑도 아무런 관련이 없겠어.”

아이작이, 아칸의 부가주와 결탁하여 아칸의 영역 구석에 몰래 망명해 있을 가능성.

그 구석이 하필이면 사막왕국 카자르일 가능성.

그 가능성을 그들은, 당연하게도 생각도 하지 못했다.

* * *

글렌이 여행의 준비를 하는 동안 유릭은 짐을 쌌다.

꼭 필요한 것들을 모두 챙긴 유릭이, 그 후 정말 중요한 한 가지를 하고 있었다.

“어디 가려운 곳은 없으세요?”

“없어.”

그건 눈에 띄는 이 하얀 머리를 염색하는 일이었다.

눕혀놓은 의자에 머리를 기대어, 시녀 엠마가 유릭의 머리를 감겨 주고 있었다.

염색물은 이미 모두 들였고 머리에 남은 약품을 씻어내는 작업.

이내 그것마저 모두 마치고 엠마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주었다.

꼼꼼히 털고선 거울 앞에 서니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기존의 백발과는 정반대의 새까만 흑발.

“어머!”

“흠.”

엠마가 눈을 빛내는 옆에서 유릭이 거울을 이모저모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돌려가며 하얀 뿌리가 남아 있진 않은지 확인했다.

“어때?”

“멋지세요!”

“응?”

엠마에게 물어보니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돌아왔다.

“백발일 때는 어딘가의 귀공자 같은 느낌이었는데요, 아 물론 공자님이 맞으시지만요. 아무튼 그 말에 어울리는 진짜 기품 있는 분이셨는데 흑발로 염색하니 샤프함이 더 살아나는 것 같아요! 기품은 물론이지만 그 안에 슬쩍슬쩍 비치는 야수 같은 매력이-”

“아니…… 감상 말고 염색이 잘됐냐고.”

“핫.”

유릭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을 끊으니 엠마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코홈, 헛기침을 했다.

“네, 완벽해요. 하얀 머리는 전혀 안 보여요.”

유릭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거울을 확인했다.

푸른 보석 같은 새파란 눈동자가 흑발의 사내를 비춘다.

이 세계는 컬러 렌즈 같은 게 없어서 눈 색까지 바꾸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도 충분하겠지.

머리 색이 바뀐 것만으로 전혀 딴사람처럼 보일 정도니.

‘어차피 그쪽엔 내 얼굴을 아는 사람도 없고.’

기껏 해봐야 클레어 아칸 정도?

하지만 카자르 같은 변두리에 클레어가 행차할 일이 있을 리가 없다.

그녀도 나름 직계인지라 이런저런 일로 바쁠 텐데 그런 시골까지 올 리가.

하얀 머리는 잘 감췄고, 사용하는 마나는 불의 마나.

아마 카자르의 누구도 자신이 유릭 로스카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변장을 할 거면 피부색까지 바꾸는 게 확실하지 않을까요?

문득 방구석에서 앞발의 털을 핥고 있던 메르가 그런 말을 해왔다.

넌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유릭이 대꾸했다.

‘피부색을 어떻게 바꿔?’

-그야 마법을 쓰면 되죠.

‘마법을 쓰면 너무 수상하잖아. 마나가 활성화된 게 훤히 보이는데.’

변장과 관련된 마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별로 실용성이 없다.

보통 변장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 하는 것인데 상시로 마법을 발동하고 있으면 마법사들 눈에 바로 띄니까.

마나의 활성화 없이 변신이 가능한 드래곤의 폴리모프 같은 사기 마법은 인간들에겐 없었다.

-그것도 그렇네요.

수긍하는 메르를 유릭이 평소처럼 머리에 올리곤 짐가방을 매었다.

-읏, 약품 냄새!

‘참아. 좀 있으면 사라지니까.’

찡그리는 메르를 무시하곤 유릭이 엠마에게 인사했다.

“갔다 올게.”

“예. 몸조심하세요.”

엠마가, 방금까지 와는 전혀 다른 슬픈 미소를 지으며 유릭의 옷자락을 고쳐주었다.

유릭이 어디를 가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짐작은 간다.

변장을 하고 가야 할 만큼 위험한 곳에 간다는 것이겠지.

“저희 사용인 일동, 한마음 한뜻으로 도련님의 무사를 빌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녀가 별궁의 시종ㆍ시녀들을 대표해서 깊이 인사를 하였다.

아까까지 장난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치맛자락을 올리며 무릎을 굽히는 그녀의 모습에는 명문의 시녀다운 고고한 품격이 어려 있었다.

“걱정 마.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올 테니까.”

유릭이 피식 웃으며 인사를 받곤 별궁을 나왔다.

궁의 정문에는 이미 마차가 대령 되어 있었다.

마부는 당연하다는 듯이 글렌이었고.

“유릭. 나도 데려가라.”

그리고 앞에는 예상외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보따리를 어깨에 걸치고, 유릭과 똑같이 검은 머리로 염색을 한.

“데릭?”

그의 쌍둥이 동생 데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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