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59화
59화. 겸사겸사
호람은 땀을 뻘뻘 흘리며 데릭의 맹공을 받아치고 있었고, 데릭은 여유롭게 놈을 압박하고 있다.
평범하게 싸우면 이런 꼬마 따위 단숨에 없애버릴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는 데릭이 든 검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저 위력…… 평범한 보검 따위가 아냐! 최상급의 보검이거나 아니면…….’
마검. 혹은 신검.
5성의 검사 따위 알 바 아니지만 검만은 위험하다.
그 검 앞에선 결코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상처는커녕 검이 닿기만 해도 어스웜과 같은 꼴이 된다는 생각에 점점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허억!”
“……!”
빈틈이 열렸다.
수작을 부리려 일부러 내보인 빈틈 같은 것이 아니다.
호람은 정말로 실수를 하였고, 그 실수 탓에 놈의 몸이 훤하게 열렸다.
데릭이 주저 없이 놈의 심장으로 검을 찔러 들어갔다.
그런데.
“큿!”
바로 직전 데릭이 움찔거렸다.
순간적으로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영상들.
무수히 쌓여 있는 시체의 산과 강을 이룬 비릿한 핏줄기.
영상에 눈이 가려 데릭의 검이 아주 잠깐 멈칫했고.
호람은 그 틈을 놓칠 자가 아니었다.
“킥킥킥킥! 실전은 처음이더냐, 애송아!”
호람이 검지 손가락을 있을 수 없는 방향으로 비틀었다.
그러자 뚜둑 소리와 함께 뒤에서 모래가 솟아올랐다.
그 모래들은 수십의 창이 되어 멈칫한 데릭을 향해 우수수 쏟아졌다.
파파파파팍!
방금까지만 해도 압도적이었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역전되었다.
데릭은 모래를 쳐내느라 급급했고 호람은 어느새 일어나 계속해서 술법을 발동했다.
‘…….’
데릭이 입술을 악물었다.
어떻게 하지? 죽이지 말고 일단 제압만 해볼까?
그래, 그게 맞다.
어쩌면 놈들이 자신을 습격한 건 단순히 도적질을 위해서가 아니라 무슨 거대한 음모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정보를 얻기 위해서 적을 산 채로 잡는 것은 합리적인 판단이다.
‘……좋아.’
사실 합리적이긴커녕 말도 안 되는 판단이었지만, 데릭은 스스로가 그런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그가 이를 악물곤 다시금 공세로 전환하려는 때.
그는 보았다.
호람의 등 뒤에서 유릭이 녹시아를 꺼내는 모습을.
호람을 향해 살기를 띄우며 검을 뽑는 유릭.
그러나, 그의 검은 호람을 향했으나, 그 눈만은 누구도 아닌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너무나 차가운 눈빛.
마치 무언가를 미련 없이 잘라내 버린 듯한.
순간 데릭은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유릭.’
유릭의 첫 살인은 언제였을까.
자신과 같은 첫 임무에서였나?
아니다.
유릭의 첫 살인은 성인도 되기 전인 15살 때였다.
다름 아닌 자신을 구하기 위해 알리샤의 목을 베었던 그 사건.
바로 그게 유릭의 첫 살인이었다.
……그때 유릭은 알리샤의 목을 베는 것을 주저하였던가?
‘누님…….’
임무를 마치고 와서 정신적으로 몰린 상태일 때, 엘린 누님에게 상담을 해보았다.
누님 역시 처음 전장에 나갔을 때는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엔 극복했다고.
어떻게 극복했냐 물어봤더니 그저 희미하게 웃기만 하였다.
그건 너 자신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라며.
그땐 몰랐으나, 왜인지 지금 이 순간 깨달았다.
엘린 누님은 가문을 짊어지고 있다.
가문의 장녀, 가주 대행, 2기사단의 단장.
많은 직함을 갖고 막대한 권한을 휘두르는 그녀는, 그만큼 거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
가문의 일원, 백성들, 나아가 로스카의 동맹국이나 가문들.
못해도 수십만의 사람의 인생이 직ㆍ간접적으로 누님과 연관이 있다.
그렇기에 누님은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것이다.
그건 유릭도 마찬가지.
과거 녀석 역시 알리샤를 죽이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녀석이 살인에 미친 타고난 살인귀라서 그럴까?
그럴 리가 없다.
녀석 역시 누님과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알리샤의 사건에서 녀석이 짊어졌던 것은.
‘……나인가.’
바로 자신.
그날 유릭이 알리샤를 죽이지 않았다면 자신은 꼼짝없이 꼭두각시가 되었거나 아니면 죽었을 것이다.
유릭은 그걸 막기 위해 알리샤를 단칼에 베었다.
‘알 것 같다.’
어째서 그들이 손에 피를 묻히고도 태연할 수 있는지.
간단한 이유였다.
자신이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다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니 알겠다.
성인식 때 유릭이 자신 대신 연설을 하였던 것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미리 테러가 있을 거란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미리 알고선 대본을 빼앗았던 것이다.
자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릭에게 얼마나 많은 보호를 받아왔던 건가.
그런 일들이 이 18년간 얼마나 많이 있었던 거지?
‘그럼 나는…….’
내 검엔 무엇을 담아야 할까.
엘린처럼 가문을 위해 검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유릭처럼 형제나 주변 사람을 위해 검을 들 수도 있을 터.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 모르겠다.’
그건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그를 감싸던 미혹은 걷혀 있었다.
자신에게 무언이 부족한지 깨달은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한 걸음 나아간 것이었다.
“얌전히 집에서 검술 놀이나 하지 그랬더냐, 애송아!”
호람이 크게 광소하며 데릭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지면의 모래가 날카로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모래 입자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데릭의 옷을 찢었다.
데릭이 눈을 부릅떴다.
그 눈에 수십, 수백의 선이 선명히 보였다.
하나하나가 상대를 절명시킬 수 있는 검로(劍路).
그의 실력과 재능이라면 진작 보였어야 하는 것인데, 눈을 가리던 미혹 탓에 지금껏 보이지 않고 있던 것이다.
동시에 호람의 뒤쪽으로 검을 드는 유릭도 보였다.
자신에게 맡길 수 없어 본인이 직접 호람을 처리할 생각이겠지.
알리샤나 성인식 때와 같이 스스로의 손에만 피를 묻히며.
‘더 이상 보호만 받을 순 없지.’
자신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데릭이 검을 쥐었다.
우웅-
이솔렛이 처음으로, 청명한 푸른 울림소리를 내었다.
* * *
‘더 이상 안 되겠군.’
호람에게 밀리기 시작한 데릭을 보며 유릭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녹시아를 뽑아 들었다.
호람은 지금 데릭의 검에 과하게 신경이 쏠려 있어 뒤까진 보지 않는다.
뒤에서 급습해 찌르면 그것으로 끝.
그런데 그가 막 땅을 박차려 할 때.
‘데릭?’
밀리기만 하던 데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릭이 광소하는 호람의 품에 파고든다.
호람의 경지를 생각하면 충분히 반응할 법도 했지만, 녀석은 반응하지 못했다.
데릭이 실낱같이 정확한 타이밍에 놈의 사각을 찔렀기 때문이다.
“뭣……!”
놈이 데릭을 인식하고 기겁할 때, 데릭의 검은 이미 놈의 목에 닿아 있었다.
쩌적!
검이 목을 가르기도 전에 놈의 몸이 얼어붙었다.
데릭의 검은 한 박자 늦게 그 목을 베고 지나갔다.
전신이 얼어붙어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
액체 질소에라도 담근 것처럼 하얗게 얼은 목이 툭 모래사장에 떨어졌다.
‘뭐야.’
혼자서도 잘했네.
유릭이 김이 샜다는 듯 녹시아를 집어넣었다.
“후우우우…….”
데릭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그가 원통한 표정으로 얼어붙은 호람의 목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결코 잊지 않도록 두 눈에 선명히 새겨 넣듯이.
그러고 나서야 몸을 돌려 유릭에게 돌아왔다.
“끝났다.”
“수고했어.”
유릭이 가볍게 툭 치며 얘기하니 데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겉모습은 아직 퀭한 그대로였지만 눈빛만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돌아가자. 낙타는 근처 선인장에 매어뒀어.”
“유릭.”
“엉?”
데릭이 유릭을 보았다.
문득 한 번쯤은 형이라 불러도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일들을 깨닫게 되었으니 ‘고마워, 형’, 이 정도쯤은 말해야 되지 않나 하는.
“……나는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하지만 왜인지 입에서 나오는 건 퉁명스러운 말뿐이었다.
“-? 뭔 소리야?”
“그만 가지.”
갸웃거리는 유릭에게서 몸을 돌리곤 그가 급히 낙타가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 * *
오아시스 도시 울르.
카자르 왕국의 수도이자 이 사막에서 가장 거대한 오아시스다.
물이 솟아나는 샘이 몇 개나 있으며 그 수원을 중심으로 야자나무가 -사막치고는- 많이 자라나 있는 오아시스.
황토벽으로 지어진 1층짜리 건물이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빼곡히 둘러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저기가 왕궁이군.’
카자르의 왕궁은 도시 어디에서도 보일 정도로 크고 높았다.
높이 자체는 옆에 있는 신전에 이어 두 번째였지만, 그 이상으로 넓고 웅장해 왕궁으로서의 충분한 위용을 보이고 있었다.
‘제일 유력한 용의자들이긴 하지만.’
현시점에서 카자르 왕실은 사막화의 범인으로 가장 유력한 이들.
하지만 그렇다고 왕궁에 쳐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개 외부인에 불과한 자신들이 무슨 수로 왕궁에 들어가겠는가?
“이곳에서 보급을 마치고 곧바로 접경지대로 출발하도록 하지.”
유릭이 일행에게 얘기했다.
“일단 여관부터 잡자고.”
“알겠습니다, 도련님.”
세 사람이 번화가에 인접한 여관 하나를 찾아 잡았다.
오랜 길을 달려왔으니 우선은 휴식부터.
낡고 허름한 여관이었지만 모래 먼지를 씻어낼 곳과 침대만 있으면 충분했다.
세 사람은 일단 몸을 씻고 와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오랜 노숙 생활을 이어오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니 이보다 훌륭한 힐링이 없었다.
한바탕 자고 일어난 그들이 맑은 정신으로 머리를 맞댔다.
“일단 식사부터 하고 그 뒤에 보급을 하러 나가기로 하지.”
“좋지. 떠나는 건 언제로 할 생각이냐, 유릭?”
“이틀이나 사흘 정도만 쉬고 출발하자.”
울르엔 유력 용의자인 왕실이 있다.
하지만 그들부터 조사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가장 처음 가봐야 하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접경지대.’
사막이 끝나고 아칸의 영역이 시작되는 경계선.
사막과 아칸의 접경지대.
로스카에서 파악한 사막화의 정황이 드러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지진과 모래폭풍이 기이하게 많다고 했었지.’
그 부근에서 땅을 울리는 지진이나 모래폭풍이 휘몰아치는 일이 월등히 많아졌다고 한다.
본래도 그런 자연현상이 많은 구역이긴 했지만 근래에는 더 많아졌다고.
특히 의심되는 것은 바람이 아칸 쪽으로 불 때에만 모래폭풍이 일고 있는 점이었다.
때문에 고의로 지진과 모래폭풍을 일으키고 있는 자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로스카는 그렇게 의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처음은 그곳부터 가볼 필요가 있다.
울르에 들른 것은 보급과 여독을 풀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다만.
‘겸사겸사 불의 단약을 먹을 장소도 찾아볼까.’
유릭에게는 울르에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본격적인 임무에 들어가기에 앞서 초대의 영약을 섭취하는 것.
‘이걸로 6성에 오를지도.’
울르에서 가장 기운이 강하기로 유명한 그 장소.
왕궁 옆에 우뚝 서 있는 신전을 떠올리며 유릭이 행복한 고민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