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62화
62화. 천마 설군악
설군악.
유화가 만나러 간다던 할아버지의 이름이었다.
듣기로는 유화가 사는 무림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이라고 하였다. 대적할 자 하나 없는 천하제일인이라고.
그러나 기이하게도 유릭이 보는 천마의 모습은 그렇게 위압이 있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눈앞에 서 있는데도 마치 바람이나 흙, 나무 따위를 보는 것처럼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사람이 아니라 그냥 자연물이나 아니면 정령이라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름이 뭐지?”
“유릭 로스카입니다만.”
“로스카? 흐음.”
천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금 물었던 초대 로스카가 아니냐는 질문의 의미를 이해한 것이다.
“나는 설군악이라고 한다. 유화 그 아이에게 들었나?”
“이름 정도는요. 아니, 그보다.”
자기소개도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유릭은 그보다 훨씬 궁금한 것이 있었다.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아니, 여긴 대체 어디죠? 아니, 그러니까…….”
“너와 내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그 얘기겠지?”
“예.”
간단한 축약에 유릭이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글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하늘 위를 넘어선 하늘 같은 곳이다.”
하늘 위? 우주? 차원과 차원 사이의 공간?
……아니면 <외우주>?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개념들이 유릭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아까의 네 질문을 듣자 하니 아마 너의 선조가 마련해 놓은 공간이겠지. 초대 로스카라 했었나?”
“예. 저 검이 초대가 쓰시던 검이거든요.”
유릭이 이솔렛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북천멸강검(北天滅强劍). 무림의 4대 지보가 어디로 갔나 했더니 이곳에 있었구나.”
북…… 뭐?
천마는 혼자서 끄덕이며 무언가를 납득하나 싶더니, 유릭을 보며 하던 말을 이었다.
“오늘 손녀아이를 보았다.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내게 직접 요리를 만들어주겠다는 게 아니냐?”
“어…….”
딱히 먹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얘기했는데 기어코 먹는 얘기를 꺼냈구나.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손녀가 직접 요리를 해준다는데 싫어할 조부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유릭이 천마를 보았으나.
“뭐 그냥저냥 평범하더군. 흔한 맛이었다.”
천마는 그렇게 감흥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보이는.
그럴 만도 했다.
듣기로 대단한 집단의 우두머리라는데 입맛은 또 얼마나 까다롭겠는가?
오히려 평범하단 소리를 들었다는 건 유화의 요리 실력이 뛰어나단 사실을 방증하는 걸지도 모른다.
정작 중요한 ‘좋은 인상 남기기’는 실패한 모양이다만…….
“여하튼 몇 마디 대화를 하던 중에 손녀아이의 기운에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캐물으니 어릴 때부터 붙어 있는 유령이 있다지 않으냐?”
“유령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몸입니다만.”
“나도 그렇게 생각하여 만나러 왔다.”
“…….”
아니, 그래서 어떻게?
하는 의문이 담긴 눈빛을 팍팍 보냈지만 천마는 더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걸로 모든 답변이 되었다는 듯.
설마 무림의 고수들은 다 이런 일이 가능한 건가?
“우화등선을 목전에 둔 나니까 가능한 일이지, 날 제외한 무림의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야.”
“그, 그렇군요.”
마음이라도 읽는 듯이 먼저 대답하는 모습에 유릭이 조금 당황했다.
그래도 유화의 걱정처럼 그렇게 사악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유화에게 살의를 보이는 것 같지도 않고, 이곳에 온 것도 무슨 음험한 꿍꿍이가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러면 대체 뭐 하러 온 것일까?
정말 손녀에게 붙은 유령 놈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럼 노부께서는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혼자 끙끙거려 봤자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대놓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천마가 빤히 유릭을 바라보더니, 픽 웃으며 대답했다.
“손녀아이를 치료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가 하여 보러 왔다.”
“치료?”
“구음절맥의 치료 말이다.”
아무래도 유화의 월하무녀의 체질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군, 그런 이유라면 확실히 올 이유가 된다.
“참으로 감탄했다. 구음절맥이라 하면 산처럼 쌓인 영약과 수십의 절세 고수가 없으면 치료할 수 없는 체질인데, 그걸 스스로 극복하게 하고 있다니.”
“유화의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다 나았습니까?”
“증상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기혈은 아직도 얼어 있는 채란다.”
아직 완치는 아닌 모양.
그래도 말하는 것을 보면 착실히 나아가고 있는 듯했다.
“사실 나는 이미 등선의 요건을 갖추었단다. 실제로 반쯤 선계에 발을 들이기까지 했었지.”
천마가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얘기했다.
그것은 유릭에게 누그러졌다기보다는, 과거의 한때를 회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등선을 위해서는 속세의 모든 미련과 연을 끊어야 하지. 나는 다른 모든 것과 결별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직 한 가지만은 스스로 끊을 수가 없더구나.”
“그게 뭐죠?”
“가출한 아들.”
“아들…….”
“부모 자식의 연은 하늘의 연이라 하였지. 그걸 끊지 못하는 나는 아직 하늘에 오를 자격이 없다는 뜻일 터.”
유화가 얘기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는 가문과 연을 끊고 머나먼 땅에 정착했다고.
그리고 그 이후, 자신이 태어난 뒤 돌아가셨다고.
“괘씸한 녀석이었다. 대판 싸우고 연을 끊고 나서는 찾지도 않았지. 그동안 무시하고 살았었는데…… 등선할 때가 되니 깨달은 것이다. 나는 녀석을 잊고 살아왔다 생각했지만, 실은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걸 깨닫고 나니 도저히 등선을 할 수 없더구나.”
“그래서 유화를 찾으셨군요.”
“수소문하여 찾아보니 아들 녀석은 이미 죽었다고 하더군. 그런데 절맥에 걸린 10살 남짓한 딸아이가 있지 않더냐?”
무림에서 절맥은, 특히 구음절맥은 성인이 되기 전 반드시 죽는 병이라 한다.
하지만 완전히 고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산처럼 쌓인 영약과 수십의 고수들을 모아 온다면 충분히 고칠 수 있었다.
당연히 평범한 사람에게는, 설령 황제라고 할지라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천마에게는 그걸 가능케 할 힘이 있었다.
“이 5년 동안 내 모든 힘과 권력을 사용해 모았다. 고수들이야 신교에도 가득하고 내가 있으니 괜찮았지만, 역시 영약이 문제더군. 특히 소림에서 대환단을 양도받을 땐 정말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했지.”
그렇게 보낸 것이 5년.
5년 만에 천마는 모든 준비를 갖추었다.
그런 상태에서 유화를 부른 것이다.
“그러셨군요.”
유릭이 쓴웃음을 지었다.
유화 녀석이 하도 무섭네 뭐네 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해코지는커녕 병을 고쳐주려고 부른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막상 불러보니 생각보다 더욱 건강하지 않더냐. 내 직접 맥을 짚어보니 절맥은 이미 치료가 되고 있더구나. 어떤 대단한 의원이 있어 너를 치료하였냐 캐물었더니 네 이름이 나왔다.”
“한발 늦으셨군요.”
“흐흐, 그렇지. 내가 늦은 셈이지.”
유릭이 농을 던져도 천마는 전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늦은 것이 더없이 기쁜 듯했다.
그전부터 이미 낫고 있었단 뜻이니까.
“그 절맥이라는 체질은 저희 가문에선 월하무녀라고 부릅니다. 가문의 비전을 익히기에 최고의 체질이죠. 비전을 대성하기만 한다면 체질과 상관없이 200살도 넘게 살 수 있다 들었습니다.”
“그거 대단하구나. 절세의 신공을 익혀 반로환동을 하여도 200살을 넘기기는 쉬운 일이 아닌데.”
“뭐 어디까지나 이론이 그렇다는 거고, 실제 200살까지 살았던 기록은 없지만요.”
어딘가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기록으론 남지 않았다.
“그래…… 그렇군. 네가 몸담고 있는 곳도 범상한 곳은 아닌 모양이구나.”
천마는 만족한 얼굴이었다.
이곳에 찾아온 목적은 모두 이루었다는 듯한.
하지만 유릭에겐 아직 물어볼 것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그걸 잘 안다는 듯 천마 역시 자리를 뜰 생각은 없어 보였다.
“뭐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천마가 흔쾌히 끄덕였다.
손녀의 난치병을 치료해주는 의원을 홀대할 만큼 그가 경우 없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겼다.
뒷마당에서 나와 정원의 정자에 자리를 잡곤, 유릭이 입을 열었다.
“초대…… 아니, 염화신무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 * *
무림에서 왔거나, 혹은 무림의 기억이 남아 있는 채 환생한 것이 분명한 초대 로스카.
그가 남긴 비급 염화신무.
유릭이 알고 싶은 것은 그것의 정체였다.
염화신무의 뿌리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나아가 더욱 완벽히 익히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지만.
“모르겠군.”
천마 설군악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질문을 듣자마자 저은 것도 아니다.
깊은 시간, 체감상 10분은 더 지났으리라 생각되는 시간 동안 숙고하다 고개를 저은 것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무림의 무공은 대부분 꿰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절세의 무공이라 불리는 것들에 대해선 이름부터 그 효능과 유래까지 모르는 게 없지. 하지만 네가 말한 염화신무와 같은 무공은 들어본 적이 없다.”
유릭이 눈에 띄게 실망했다.
유화는 천마가 무림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이라 하였다.
그 천마가 모른다고 한다면 사실상 알 방법이 없다는 뜻과 비슷했다.
“그럼 태양천보는요?”
“태양천보라? 보법이더냐?”
“예.”
“그것도 들어본 적은 없다만. 한 번 펼쳐보겠느냐?”
유릭이 정자에서 내려와 연못의 옆에 섰다.
그리고 기운을 끌어올리며 태양천보를 밟았다.
구구구구-
강렬한 위압이 사위를 감싸며,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는데도 연못에 파문이 일었다.
“흠?”
천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번 더 해보겠느냐?”
“한 번 더요?”
어려울 것도 없는 이야기다.
유릭이 요구대로 한 걸음 더 태양천보를 밟았다.
구구구구-
“과연…….”
천마가 뭔가를 알아냈다는 듯 끄덕거렸다.
긍정적인 반응에 유릭이 그를 돌아보았다.
“뭔가 아셨습니까?”
“그 보법 자체는 처음 보지만, 무척 닮은 보법은 알고 있다.”
“닮은 보법이라면?”
“내가 쓰는 보법.”
직접 보여주려는 것처럼 천마가 일어나 정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와 가볍게 땅을 밟은 순간.
콰과과과과광!
주변이 말 그대로 짓눌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충격파라도 맞은 듯 땅이 움푹 파이고, 멀쩡하던 정자가 폭삭 주저앉는다.
연못의 물이 거꾸로 치솟아 오르더니 사위에 차가운 비를 뿌려대었다.
솨아아아-
보이지 않는 벽이 유릭을 덮곤 물줄기를 막아준다.
천마가 펼친 무형의 강기였다.
“이건…….”
유릭의 입이 벌어졌다.
그냥 걷기만 했을 뿐인데 무슨 메테오라도 떨어진 듯 주변의 땅이 완전히 뒤집혀 있지 않은가?
“천마군림보. 대대로 신교의 수장을 맡은 이에게 내려오는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보법이지.”
“……이것과 제 태양천보가 비슷하단 말씀이십니까?”
그 말은 자신 역시 경지를 이루면 이런 현상을 일으킬 수 있게 된단 말인가?
발걸음 하나로?
“그래.”
천마가 끄덕였다.
그러곤 설명하기를, 마치 두 보법은 형제와 같이 닮아 있다 하였다.
보통의 보법이라 함은 사용자의 몸을 날래게 해주거나, 현묘한 움직임을 하게 하여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무공을 말한다.
하지만 천마군림보는 다르다.
그것은 천지인으로 이루어진 세상의 구성 요소 중 지(地), 즉 대지와 소통하기 위한 무공이다.
주변을 위압하고 내리누르는 것은 자연스레 파생되는 효과이지, 천마군림보의 진정한 목적은 발바닥을 통해 이 땅과 물아일체가 되는 것이라 하였다.
그 목적성이 태양천보에서도 똑같이 느껴진다고.
다시 말해…….
“원류가 된 무공은 같은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단 말씀이시군요.”
“정확하다. 색목인치고는 무공에 대한 이해가 빠르구나.”
천마군림보는 마교의 수장에게 전해지는 무공이라 한다.
그리고 태양천보는 그와 같은 뿌리를 가진 무공.
‘마교와 관련이 있구나.’
초대의 정체에 대한 단서였다.
같은 것을 생각했는지 천마가 얘기했다.
“북천멸강검, 태양천보. 그리고 염화신무. 내 손이 닿는 대로 이것들에 대해 조사해 보마. 신교의 비고에 어쩌면 자료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저는 감사합니다만 괜찮으십니까? 등선은요?”
유화가 치료되는 것을 보았으니 이제 하나 남은 미련은 풀렸을 텐데.
“아직이다. 손녀아이가 다 낫는 걸 보기 전에 오를 수는 없지.”
“아.”
유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
치료되고 있다고 해도 당연히 모두 나을 때까지 지켜보고 싶을 텐데.
“만약 조사로 무언가를 알게 된다면 유화를 통해 전달하도록 하마. 그거면 되겠지?”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런. 정말이지 시끄러운 계집이군.”
뭔가 더 말을 이으려던 천마가 불쑥 눈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 하여 그를 보았지만 유릭은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이만 가보도록 하마. 더 머물렀다간 귀청이 떨어지겠어.”
“귀청이요?”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흔한 새 소리, 곤충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있는데.
“가기 전에 선물이나 하나 주마. 손녀아이를 다 치료하기 전까지 네놈은 몸 성히 있어줘야겠으니 말이야.”
그러곤 천마가 손을 뻗었다.
검지와 중지, 그 두 손가락이 유릭의 이마를 탁 짚었고, 유릭은 반사적으로 질끈 눈을 감았다.
“……?”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노인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걸 자각함과 동시에 유릭의 시야 역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 * *
“헉!”
유릭이 번쩍 눈을 떴다.
정신을 차려보니 본래의 토굴 안.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감이 올라왔다.
“허억…… 허억…….”
물속을 헤엄치다 가까스로 수면에 머리를 내민 것처럼 숨이 가빠왔다.
유릭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몸을 추슬렀다.
그러던 중.
오싹, 하고 솜털이 곤두서며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토굴의 입구 너머.
그곳으로 보이는 여신상의 얼굴.
“……메르.”
-녜헤!?
유릭이 부르자 앉은 다리 사이에서 자고 있던 듯한 메르가 냉큼 일어나 나왔다.
입에서 침이 흐르는 것이 보인다.
호법을 서주겠다 했으면서 잠이나 자고 있다니…….
라고 평소라면 얘기했을 테지만, 지금 유릭은 그런 농담을 할 여유가 없었다.
“저 신상, 방금 눈이 빛나지 않았어?”
-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메르가 반문했다.
-무슨 마법이 걸린 석상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석상인데요? 반짝이는 도료 같은 것도 안 발라져 있고. 빛날 리가 없죠.
“그, 렇지?”
유릭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분명 메르의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등골을 관통하는 서늘한 감각이 가시질 않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여신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