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73화
73화. 제정신인가?
사내의 앞에는 호화로운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다채로운 색상의 고기와 채소들.
예쁘게 잘려 있는 과일들 역시 하나같이 사막에선 보기 힘든 귀한 것들이었다.
사내의 옆에선 면사포를 쓴 깊은 눈빛의 여인이 푸른 포도를 따 사내에게 먹여 주고 있었다.
최고의 음식과 최고의 술.
그렇게 한가로이 사내가 식사를 즐기고 있을 때.
“형님! 형님!”
쾅! 하고 문이 열리며 사내의 동생이 쳐들어왔다.
급한 연락이라도 있는 듯 촉박한 모습으로.
들어오자마자 말을 꺼내려던 동생은, 사내의 옆에 있는 여인을 보곤 대번에 눈을 부릅떴다.
“네년이 아직도!”
“……실례하겠습니다.”
동생, 카자르의 2왕자가 분노하는 모습에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다음 순간, 그녀는 홀연히 허공에 녹아 사라지고 없어진 후였다.
앉아 있던 사내가 픽 웃었다.
“아우야, 형수한테 그런 눈은 너무하지 않느냐?”
“형수는 무슨 형수입니까! 저년은 형님을 암살하러 왔던 살수가 아닙니까! 형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딴 년을……!”
여전한 동생의 반응에 사내, 1왕자 달탄 카자르가 피식 웃었다.
“원래 독을 품은 꽃이 아름다운 법이지.”
“그러다 진짜 독살이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
“네가 있는데 뭐가 문제냐. 내가 죽으면 아버지의 뒤는 네가 이으면 되지 않으냐.”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여전히 능글능글한 달탄의 태도에 2왕자가 이마를 짚었다.
옛날부터 이랬다.
매사에 대충이고 미래보단 지금 현재만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듯한.
좋게 말해서 현재에 충실한 것이지 실상은 충동적이라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스스로의 몸을 별로 돌보지 않는, 볏짚을 지고 불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것도 서슴지 않을 듯한 행동들.
그런 달탄 때문에 항상 골치가 아픈 건 자신이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냐? 혹시 예의 조사가 끝났나?”
“아, 예. 맞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2왕자가 가져온 얘기를 꺼냈다.
“역시 루카스 아칸이 수작을 부린 게 맞았습니다. 특히 우리를 엮어 넣으려던 정황도 있더군요.”
“이간질을 하려 했다는 건가?”
“누님은 삼공녀 측의 사람이니 일공자 입장에선 눈엣가시겠죠.”
“흠.”
달탄이 턱을 쓰다듬었다.
대강의 얘기가 보여 왔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루카스가 자신들을 물 먹이려 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활약으로 그것이 실패했다는 점이다.
“클레어 아칸이 비사대의 표식을 주워 삼공녀에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그걸로 루카스 측은 꽤나 골치를 썩이고 있겠죠.”
“그래서 누구지?”
“그러니까 클레어 아칸이…….”
“걔 말고. 클레어 혼자서 루카스에게 대항했을 리 없지 않느냐?”
클레어의 입지가 아칸에서 상당히 낮은 것은 달탄도 잘 알고 있다.
그런 클레어가, 루카스도 있는 자리에서 비사대의 표식을 빼돌릴 수 있을 리 없다.
분명 제삼자가 있다.
루카스의 음모를 분쇄해 카자르의 위기를 벗어나게 한.
그러면서 이름 하나 남기지 않고 홀연히 떠나간 장본인.
“로스카의 삼공자, 유릭 로스카입니다.”
그 이름을 듣고 달탄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쪽인가.
“그러면 조만간 로스카에서도 수작을 부리러 오겠군.”
“그렇겠죠. 아칸을 분열시킬 기회라 생각할 테니까요. 어떻게 대응할까요?”
“흐음.”
달탄이 소파에 기댄 채 고개를 젖혔다.
샹들리에의 불빛이 그의 망막에 맺힌다.
이윽고 그가 픽 웃으며 얘기했다.
“놈들의 뜻대로 놀아나는 건 불쾌하지만 루카스 그놈을 이대로 두는 건 더 불쾌해.”
“그 말씀은…….”
달탄의 말에 2왕자가 표정을 굳혔다.
본디 가능한 방관을 자처하던 자신들 카자르가, 아칸의 후계 다툼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으니.
그런 동생을 두고 달탄은 술잔을 입에 댈 뿐이었다.
‘유릭 로스카라.’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이름만은 잘 알고 있다.
로스카의 삼남인 두 쌍둥이 중 하나.
로스카인 주제에 화염 마나를 익혔다고 하여 한때 화제가 되었던 녀석.
‘본의 아니게 빚을 져버렸군.’
로스카 놈들 역시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지만, 유릭 로스카 덕택에 루카스의 음모를 알아챈 것은 사실이다.
이 빚은 후일 갚을 때가 오겠지.
다만 지금은.
“당하면 갚아주는 것이 사막의 율법이니.”
루카스 아칸이 먼저다.
* * *
오랜만에 찾아온 백월봉의 수련장.
유릭은 그 한가운데서 차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저는 대령이랑 놀러 갔다 올게요!
메르는 그런 말을 남긴 채 대령과 힐라사와 함께 다른 봉우리로 놀러 갔다.
홀로 차분하고 조용하게, 유릭이 운기를 이어갔다.
따스한 불의 기운이 퍼지며 야생 동물과 미약한 숲의 정령이 모인다.
남부까지 임무를 다녀오느라 이런 공기 속에서 운기를 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아직 모자라. 한참.’
유릭의 의식이 깊이 가라앉으며 스스로의 몸을 관조했다.
분명 또래에 비하면 있을 수 없는 강한 몸이다.
6성이란 경지 자체는 일반적인 천재 수준이지만 -일반적인 천재라는 말도 웃기긴 하지만- 6성이라고 해서 다 같은 6성이 아니다.
로스카의 핏줄의 타고난 감각과 신체 능력은 한 단계 차이 정도는 수월히 극복할 수 있게 만든다.
더욱이 날림으로 경지를 올린 것이 아닌, 염화신무를 단단히 다지며 쌓아올린 6성이다.
거기에 초대가 남겼던 막대한 불의 마나를 흡수하기까지.
이 정도면 두 단계 정도는 충분히 극복할 만큼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마스터는 안 된다.’
그래도 마스터에겐 무리다.
만약 유릭이 5성이었다면 두 단계 위인 7성 정도는 충분히 잡을 수 있다 했을 것이다.
하지만 6성의 유릭은 두 단계 위인 8성의 마스터를 잡을 수 없다.
7성과 8성 사이의 벽.
그건 투지나 자신감, 근성 등의 정신론 정도론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더 강해져야 돼.’
엘가이아나 루카스, 그리고 아이작.
이미 적이 된 그 세 마스터를 포함해, 앞으로 만나게 될 다른 마스터들까지.
그들 모두에게 지지 않으려면 아직도 모자라다.
힘에 대한 갈망.
하염없이 가라앉은 의식은 이윽고 과거의 다른 장면들을 떠올리게 하였다.
이번 임무에서 있었던 수많은 전투들.
스콜피온의 모래술사와 거대 전갈, 아칸 비사대의 요원들과 어스웜.
그들 모두와 싸웠던 광경이 천천히 다시 재생되었다.
그 흐름을 복기하며 유릭이 스스로의 움직임을 살폈다.
더 효율적인 동작이 있지 않았을까, 혹은 더 압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이윽고 유릭의 상상이 멈춘 곳은.
‘태양천보.’
사막의 지하에서 태양천보를 사용하던 그 순간이었다.
천마의 선물 덕에 생각보다 강력하게 발동되던 태양천보의 위력에 잠시 당황했었지.
“후우…….”
유릭이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눈을 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일어나, 자연스럽게 한 걸음을 걸어보았다.
쿠웅-!
파사사사사사!
수련장 주변이 웅장하게 떨리며 나뭇잎들이 소란을 부린다.
여전히 태양천보의 위력은 훨씬 강력한 채였다.
그러나 위력보다도 더욱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있었다.
‘대지와 소통하기 위한 무공이라고 했던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땅의 호흡이 느껴지는 것 같은 감각이 들었다.
아직은 경지가 낮기 때문인지 희미하게밖에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희미한 숨소리가 땅을 디딘 발을 통해 들려왔다.
이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걸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유릭은 태양천보가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명 언젠간 천마가 보여준 그 위용을 자신도 재현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어쩌다 땅과도 관련이 생겨버렸네.’
유릭이 문득 피식 웃었다.
본래 대부분의 검사나 술사들은 한 가지 속성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일부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다채로운 속성을 부리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자신은 어떤가?
염화신무의 불에 엑셀레아와 풍령을 통해 바람을 부린다.
그리고 사용하진 못하지만 몸속엔 빙하설월의 기운까지.
그곳에 이젠 땅까지 추가된 셈이다.
물론 땅의 기운을 사용하거나 그런 재주는 부리지 못하긴 하지만.
‘방향은 나쁘지 않아. 이대로만 가자.’
수련의 방향성 자체는 어긋나지 않았다.
다만 경지가 오르는 속도가 문제일 뿐.
조급해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어디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이던가.
엘가이아나 루카스는 그렇다 치고 당장 2년 후엔 아이작과 맞붙게 될지도 모르는데.
‘엘린 누나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진 않을 테지.’
2년 후의 그 날을 위한 다른 준비는 모두 끝났다.
걸리는 것은 두 가지.
첫째는 어머니의 비밀에 대한 것.
이건 할아버지에게 어느 정도 언약을 받았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가 자신의 실력에 대한 것.
어지간해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자신이 아이작과 1:1도 맞붙을 상황이 온다면?
그때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일단은 해보는 수밖에.’
부딪쳐 보는 것 말고 다른 수는 없다.
각오를 다지며 유릭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스릉-
녹시아를 뽑아 든다.
검을 휘두르기에 앞서 마음을 다잡기 위해 눈을 감고 기수식을 취했다.
그리고 방금까지 운기를 하던 기운을 검에 흘려 넣는다.
불길이 일렁이는 검을 유릭이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렸다.
그런데.
‘응?’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태양천보의 변화와는 달리 부정적인 느낌의 위화감.
휘익!
그대로 검을 내리쳐본 유릭이었지만, 위화감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뭐지?’
유릭이 녹시아를 바라보며 의아한 듯 눈을 찌푸렸다.
* * *
“또 뭐 하러 부른 것이오? 난 무척 바쁜 몸이라고 하지 않았소?”
“물어볼 게 있어서.”
위화감을 안으며 수련을 마치고 내려온 유릭은, 가장 먼저 어떤 남자를 호출했다.
마크 로헨.
녹시아를 제작한 로헨의 장인.
“부탁이니 이런 식으로 갑자기 끌고 오는 건 그만둬 주시오. 도제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소?”
“미안, 미안. 이쪽도 한시가 급한 일이라.”
잠시 사과의 말을 건넨 후 유릭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를 부른 이유야 하나밖에 없다.
아까 수련할 때 녹시아에게서 느껴지던 위화감에 대해 물어보려는 것이었다.
“흠…….”
얘기를 모두 들은 마크가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잠시 후 눈을 뜨고는 유릭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줘보시겠소?”
“자.”
유릭이 검집 채로 녹시아를 마크에게 맡겼다.
마크가 조심스레 검을 반쯤 뽑고는, 본인의 마나를 흘려 넣었다.
이름 있는 장인 가문답게 고유의 마나 호흡법을 익히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진찰을 하며 마크가 물었다.
“최근 도련님은 장기 임무에 다녀왔다고 들었소만.”
“그랬지. 아주 대륙 끝에서 끝으로 이동한 초장거리 임무였어.”
“그때의 일에 대해 얘기해 줄 수 있겠소?”
임무의 상세한 내용은 대외비지만 마크가 묻는 것은 그런 게 아닐 터다.
녹시아와 관련이 있는 부분뿐.
유릭이 임무에서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얘기할 거리가 많지는 않았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녹시아는 가급적 뽑지 않기로 했었으니까.
한두 마디 하고 나니 더 할 말이 없어질 정도였다.
“이게 단데 어때. 뭔가 알겠어?”
“흐으으으음…….”
마크가 녹시아를 다시 수납하곤 유릭에게 돌려주었다.
그걸 받고는 유릭이 마크를 보았다.
검에 뭐 문제라도 생겼나?
혹시 마지막에 5중첩의 화룡검화를 걸었던 탓에 과부하라도 걸렸나?
그런 걱정을 하며 마크를 보았지만, 그의 대답은 상상 이상으로 단순했다.
“이거, 삐졌군.”
“…….”
유릭이 잠시 말없이 기다렸다.
마크가 뭐라고 대답을 한 것 같긴 했지만, 너무나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이라 기분 탓으로 넘겼다.
환청이거나 잘못 들은 거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마크는 더 얘기하지 않고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유릭이 눈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뭐라고?”
마크가, 마치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처럼 다시 대답했다.
“삐졌다고 했소.”
유릭이 눈을 크게 뜨며 마크를 보았다.
……이 녀석 제정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