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74화
74화. 오라고 해
순간 머리가 하얘졌지만 어떻게든 유릭은 정신을 수습했다.
그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물었다.
“삐졌다고? 누가?”
“녹시아가 말이오.”
“우리 지금 검 얘기하는 거 맞지?”
“맞소만.”
탕!
유릭이 책상을 내려쳤다.
“아니, 검이 어떻게 삐져! 그게 말이 돼?”
“말이 안 될 건 또 뭐요?”
“검은 무기물인데 뭘 어떻게 삐진다는 거야? 에고 소드라도 돼?”
“녹시아는 에고 소드가 아니오.”
“아니, 그럼 어떻게 삐지는데?”
“에고 소드든 아니든 본래 모든 검은 생명을 가지고 있소이다.”
그 말을 하는 마크가 너무도 당당하여 순간 유릭은 자신이 이상해진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결코 아니다.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 건 마크 쪽이었다.
“듣자 하니 다른 훌륭한 검이 생겨 그쪽만 사용했다고 하지 않았소?”
“정체를 숨기려고 어쩔 수 없이…….”
“그거야 도련님 사정인 것이고. 주인을 빼앗겼다 생각하는 검의 심정이 되어보시오.”
검의 심정이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 건데?
당장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일단 경청했다.
“심지어 예의 결정적인 순간 때 한번 검을 뽑았다 놓았더군. 잘 수납한 것도 아니고 대충 바닥에 떨궈놓고 다른 검을 사용했어.”
7성 화염술사들의 마법진에 걸렸을 때의 얘기다.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녹시아가 아닌 엑셀레아가 가진 마검의 막대한 화력이 필요했으니까.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들고 있던 녹시아는 던질 수밖에 없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어쩔 수 없던 건 도련님의 사정일 뿐이오. 검에 눈과 귀가 달린 것도 아닌데 어찌 일일이 사정을 봐줄 수 있겠소?”
“눈이랑 귀는 없는데 심정은 있다고?”
“크흠.”
마크가 헛기침을 하며 강제로 화제를 접었다.
제 유리한 말만 하고 불리한 얘기는 듣지도 않는 모습에, 유릭은 순간 눈앞의 사내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심호흡으로 그 충동을 물리치며 유릭이 얘기했다.
“……그래도 마지막에 탈출할 땐 뽑았잖아. 한 번도 안 쓴 건 아니라고.”
“그래서 더 아니꼬웠나 보지.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듯이 보이지 않았겠소?”
뭐 이렇게 까다로워!?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유릭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지금 마크에게 향하는 눈빛은 마치, 전혀 다른 문화권의 사람과 마주쳐 문화 충격을 받는 것과 비슷했다.
장인들은 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건가?
“내 말을 의심하고 있군.”
“아니, 의심까진 아닌데…….”
“공방 구경이나 하러 오시겠소? 그럼 내 말을 이해하게 될 텐데.”
“지금부터?”
“급한 일이라고 하지 않았소?”
급한 일이긴 하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당장 내일 수련에 지장이 올 테니까.
“좋아. 가보도록 하지.”
“안내하겠소.”
결단은 빨랐고 행동은 더 빨랐다.
두 사람이 곧바로 일어나 로헨의 공방으로 향했다.
* * *
로헨 공방.
그곳은 이 얼음의 땅에서 가장 뜨거운 장소였다.
실제로 터를 잡은 곳 역시 불의 기운이 강하게 나타나는 장소.
지하에 흐르는 용암을 받아 검을 두드리는 열기가 휘몰아치는 곳이었다.
캉- 캉- 캉-
들려오는 소리는 철을 두드리는 소리뿐.
수십의 장인과 수십이 도제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그 규칙적인 소음을 내고 있었다.
“빈 곳은 얼마든지 있으니 알아서 구경하시오. 나는 일하러 돌아가야겠소.”
“어, 그래.”
마크를 떠나보내고 유릭은 적당히 뒤쪽에 자리 잡았다.
일하는 장인들 쪽에선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이쪽에선 훤하게 볼 수 있는 장소였다.
손님이 왔을 때, 집중하는 장인들을 방해하게 하지 않으려 일부러 마련해놓은 장소 같았다.
그 장소에서 유릭은 공방이 꿈틀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과연.’
마크의 사고방식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용암을 끌어 올리고, 그것으로 용광로를 데워 철을 녹이고, 녹인 철을 두드려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고.
이 공방 전체가 마치 꿈틀거리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 같았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 공방에서 태어나는 검들은 공방의 자식들 같은 존재라는 것이겠지.
캉-
캉-
유릭이 눈을 감았다.
철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방금 막 보았을 뿐인 공방의 광경이 선명히 눈꺼풀에 떠올랐다.
그걸 보니 문득 깨닫는 것이 있었다.
물론 삐졌니 뭐니 하는 얘기가 아니고.
‘검과의 일체감이 잠시 어긋났던 건가.’
보다 단순한 이야기다.
예전에 얼핏 듣기로 피아니스트는 일정이 없을 때에도 단 하루도 피아노를 치지 않는 날이 없다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실낱같은 균형을 유지하는 감각이 어긋나기 때문에.
자신도 그런 비슷한 경우가 아니었을까.
심지어 더 나쁜 것은, 이번 임무에서 자신은 초대의 단약을 섭취해 훌쩍 경지가 올랐다는 점이다.
천마에게 태양천보 관련으로 받은 것도 있었고.
‘이 정도의 변화가 있었는데 녹시아를 한 번도 뽑지 않았으니, 어긋남이 느껴질 수밖에.’
마지막에 남색 문양을 가진 아이작의 부하를 죽일 때는, 세심한 검술이 아니라 5중첩 화룡검화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단숨에 밀어버렸다.
그래서 그때까지도 어긋남이 생겼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문제를 알았으면 해결책이 보인다.
다시 녹시아를 휘두르며 어긋난 감각을 조정하면 되는 일.
캉- 캉-
청명한 공방의 소리를 들으며 그가 천천히 녹시아를 휘둘렀다.
그의 의식이 조금씩 조금씩, 검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 * *
한동안 유릭은 다른 모든 걸 잊고 수련에 매진했다.
특히 녹시아와의 일체감을 중시한 덕택에 어긋남은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해결에 힘쓰니 나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면 혹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덕에 삐진 게 풀린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유릭이 혼자 피식 웃었다.
‘나까지 뭔 생각을 하는 건지.’
검이 삐지거나 뭐하거나 그럴 리가 없는데.
어느새 마크에게 물들어버린 것 같았다.
‘후우.’
유릭이 또 하루의 수련을 마무리 지었다.
수련 자체는 매우 순조롭다.
순조롭긴 한데…….
‘이걸로 괜찮나?’
이 정도 성장 속도로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는 미심쩍었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2년…… 아니, 1년 조금 넘는 시간.
그 시간 안에 8성에 오르는 것은 당연히 무리지만, 최소한 마스터에 맞서서 시간 벌이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아닌 말로, 최악의 경우 이런 시나리오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머니의 비밀을 이용해 아이작이 가문에 들어오고, 가문에 들어온 녀석이 밤중에 몰래 유릭을 암습할 경우.
그럴 때 최소한의 시간 벌이도 하지 못할 실력이라면 단칼에 살해당한다.
‘수련 시간을 더 늘려야 하나.’
그런 최악의 가능성을 회피하기 위해선 최대한 실력을 길러야 한다.
하지만 이미 밥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모든 시간을 백월봉에서 보내고 있다.
이 이상 수련 시간을 늘린다고 한다면, 그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나도 폐관 수련을 해볼까.’
수련장에 스스로를 가두고 먹고 자고 이동하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단련에 매진하는 것.
어머니도 현재 폐관 중이고, 아니스 역시 마스터를 목표로 폐관에 들어 있다.
그러니 자신도 못 할 건 없다.
‘한 번도 해본 적 없긴 한데.’
부딪치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자면 일단 적당한 폐관실을 먼저 구해야 한다.
로스카에는 가문 소속의 술사나 기사들을 위한 몇 개나 되는 폐관실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 적당한 곳을 찾아 들어가면 될 테지.
기간은 1년이면 적당할 테고.
‘좋아.’
그렇게 결정한 유릭이 폐관을 준비하기 위해 백월봉을 내려갔다.
* * *
얼마간 유릭은 폐관을 위한 이런저런 준비를 하였다.
경험자인 엘린에게 물어봐 무엇을 준비해가면 좋은지, 가문의 어떤 폐관실이 훌륭한지 등에 대해 들었다.
명령 하나로 여러 하인들을 부릴 수 있는 신분의 유릭이었지만, 그래도 1년이나 칩거한다고 하니 준비하고 신경 쓸 것이 많았다.
“또 초대장이야?”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도 예의 초대장은 계속 당도하고 있었다.
이젠 3기사단과 관련된 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강경파 인사들의 초대장까지 오기 시작했다.
가문의 핵심 인력들이나 혹은 인근 영지의 영주들.
물론 전부 무시했다.
유릭은 폐관 준비만으로도 바빴다.
“유릭 로스카. 이렇게까지 이쪽의 초대를 거부하는 이유가 뭐냐?”
하루는 파벌 내에서 닦달을 받았는지 베르겐 장로가 찾아와 묻기까지 했다.
유릭은 당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딱히 그쪽 초대만 거절하는 건 아닌데. 다른 초대도 다 거절하고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수련하느라 바쁘니까 나 좀 초대하지 말라 그래. 그렇게 보고 싶으면 용건 있는 놈이 직접 찾아오든가.”
귀찮게 부르지 말고 볼일 있으면 니들이 오라는 얘기다.
그 뜻을 알아채곤 베르겐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고집 하고는……. 뭐, 알았다. 나는 이만 가보마.”
“살펴 가고. 배웅은 안 해도 되지?”
“필요 없다, 이놈!”
마지막까지 틱틱대며 베르겐이 떠나갔다.
그 후로도 유릭은 착착 폐관의 준비를 해 갔고, 이제는 적당한 폐관실을 선택하는 것만 남았다.
그때.
“도, 도도도련님! 내일모레 3기사단장이 직접 뵈러 오겠대요!”
베르겐에게 말을 전해 들은 것인지, 정말로 본인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3기사단장, 알프레도 데번의 방문 표시.
심지어 혼자 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제자들과 함께 오겠다는 전언이 당도했다.
“단체로 밀어붙이겠다, 이건가?”
얘기를 들은 유릭이 피식 웃었다.
알프레도 데번.
9성의 소드 마스터로 레오폴딘과 동년배인 노년의 검수다.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로, 소싯적엔 레오폴딘과 함께 둘이서 가문 최강을 다투던 사이라고 그랬다.
지금이야 둘 다 초월에 이른 발렌티나에 비해 한 수 밀리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전대 최고의 고수라 불렸던 경지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특히 발렌티나나 레오폴딘은 둘 다 술사인 것에 비해 알프레도는 검사이기에 더욱 귀한 전력이었다.
명실공히 현 로스카 최고의 검사.
“도련님이 하도 수련수련거리시니까 직접 검을 봐주러 오겠다는데…… 어, 어떻게 할까요? 이번에도 거절할까요?”
엠마가 하늘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한 떠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유릭이 거절의 ㄱ자만 꺼내도 정말 무너지는 하늘을 목격하는 것처럼 행동하겠지.
유릭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이 정도까지 했으면 한번 보지 뭐.”
“하, 하아…….”
엠마가 천만다행이라는 듯이 가슴을 쓸었다.
신분상으론 유릭이 위인 것은 맞으나 상대는 가문의 역사와 함께한,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런 이에게까지 유릭이 홀대하진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겠지.
‘나도 딱히 일부러 심술부리는 건 아닌데.’
그저 쓸데없는 만남보다 수련에 더욱 시간을 들이고 싶을 뿐.
하지만 알프레도가 직접 온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9성의 소드 마스터라.’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든, 일단 만나볼 가치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