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75화
75화. 금연이야
알프레도가, 무려 20여 명의 제자를 이끌고 유릭의 별궁에 방문했다.
그들을 맞은 곳은 연병장.
검을 봐주겠단 명목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제자들 모두 형형한 눈빛에 허리춤엔 검을 매고 있었는데, 정말 눈빛만으로도 날아가던 새도 떨어뜨릴 기백이었다.
알프레도가 직접 키운 검사들이자 3기사단의 주력 기사들.
특이하게도 앞에는 10기사단의 단장인 이자크도 끼어 있었다.
10기사단 역시 3기사단과 마찬가지로 검을 중심으로 하는 기사단.
그 단장인 이자크 역시 사실은 과거 알프레도에게 사사한 제자였다.
“도련님. 오늘은 잘 좀 부탁드립니다. 스승님이 나이가 있으시다 보니 조금…… 스스로의 뜻을 강하게 밀어붙이시는 경향이 있는데요. 잘 좀 봐주십시오.”
“알았어, 알았어.”
툭 까놓고 말해 고집이 세단 소리일 테지.
최대한 순화해서 뜻을 밀어붙이니 뭐니 얘기한 것일 것이다.
“혹시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이 몸 바쳐서라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도련님도 최대한 그……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알았다니까 그러네. 잔말 말고 들어가 있어.”
강경파인 스승과 달리 중립 입장인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큰 사달이 나지 않을까 우려되어서였다.
그의 스승인 알프레도는 로스카 안에서라면 지나가던 똥개도 알 만큼 아칸을 혐오하는 남자.
그만큼 화염 마나 또한 멸시하는 노인이기도 했다.
그런 스승과 화염 마나를 익힌 도련님이 대면하고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다만, 그의 예상과 달리 둘의 만남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불꽃이 튀기거나 칼부림이 일어나거나 하는 일 없이 십년지기 친우라도 만나는 것처럼 조용했다.
“오랜만이오, 공자. 이게 몇 년 만이지?”
유릭이 거구의 알프레도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척 봐도 꼬장꼬장한 인상의 노인네였다.
수십 년 묵은 고집이 얼굴에 가득 들어찬 듯한 인상.
그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 9성의 경지와 가문 최고의 검수라는 명성을 가져온 것이겠지만, 사실 고수라고 해서 반드시 인격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수들이 더 성격이 파탄 나 있을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른다.
딱히 통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글쎄. 기억나지 않는데.”
그런 잡생각을 하며 유릭이 알프레도의 인사를 받았다.
알프레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만큼 오래되긴 하였지. 공자가 방에 틀어박히기 전에 본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요새는 잘 돌아다녀.”
“참으로 다행인 일이오. 가문의 홍복이라 해도 될 테지.”
“돌아다니는 정도로 뭘 그렇게까지.”
“어찌 복이 아닐 수 있겠소. 서리 마나에 재능이 없던 공자가 드디어 맞는 재능을 찾았는데. 비록 그게 화염의 재능일지라도 말이오.”
그 순간 느슨하던 분위기가 조여졌다.
뒤쪽 제자들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졌고 근처 시종들의 몸에 절로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이자크는 벌써 자신이 나서서 말려야 하나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가운데서, 유릭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겨우 그런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그것은 아니고…… 아차. 내 불을 안 가져왔군.”
알프레도가 담뱃대를 꺼내 무는가 싶더니 그런 얘기를 꺼냈다.
그러곤 유릭을 보며 가벼운 부탁이라도 하듯 얘기했다.
“미안하지만 불 좀 붙여주겠소? 이런 일엔 공자의 능력이 아주 제격 아니오?”
그의 눈이 호를 그리며 유릭을 보았다.
얼핏 웃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릭은 알 수 있었다.
그 눈빛에 담긴 뱀과 같은 번뜩임을.
한 번 긴장된 분위기는 풀릴 기미도 없이, 오히려 더더욱 꽉 조여 왔다.
이자크는 눈알을 팽팽 굴리며 당장 시종에게 눈짓하고 있었다.
시종이 눈치 빠르게 성냥을 꺼냈지만, 알프레도의 기세에 얼어붙어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능구렁이 같은 노친네.’
유릭이 겉으론 미소 지은 채, 속으로만 욕지거리를 뱉었다.
한눈에 알았다.
알프레도 데번.
세간의 평가처럼 우직하고 충직한 기사의 상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노인이다.
오히려 배 속에 머리 아홉 달린 구렁이 정도는 살고 있을 법한 그런 노친네.
할아버지의 친우라고 하더니 이런 부분까지 쏙 빼닮은 모양이지.
“공자? 무언가 답을 해줬으면 하네만.”
유릭이 가만히 있자 알프레도가 답을 재촉했다.
얌전히 불을 붙이든지 시뻘건 얼굴로 모욕당했다며 소리치든지.
뭐라도 좋으니 반응을 해보란 뜻이다.
자신이 무슨 반응을 보이는지를 보고 오늘 대담의 방향을 결정할 생각이겠지.
“…….”
묵묵하던 유릭이 바라는 대로 답을 보여주었다.
딱.
유릭이 손가락을 튕기니 알프레도의 담뱃대에 불이 붙는다.
하지만 그것은.
-화르륵!
담배에 불을 붙이는 정도가 아니라, 담뱃대 자체를 완전히 태워 버렸다.
필시 값비쌀 것이 분명한 고급의 담뱃대가 새까만 재가 되어 흩날린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알프레도가 물고 있는 막대 부분뿐.
“……!”
“흡!”
주변의 모두들, 심지어 한껏 도끼눈을 뜨고 있던 그의 제자들조차 눈을 부릅떴다.
“내 앞에선 금연이야, 단장.”
작은 불꽃 하나가 이 자리의 모두를 얼어붙게 하였다.
* * *
잠시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유릭과 알프레도는 조용히 서로를 응시하고 있고, 주변 사람들은 방망이질치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짧으면서도 긴 침묵의 시간이 끝난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알프레도였다.
“……이거 실례했군.”
그가 담뱃대의 남아 있는 부분을 잡아 품속에 넣었다.
그 목소리와 행동에선 언짢음이나 불쾌감 같은 값싼 감정은 비치지 않았다.
젊은 놈이었다면 당장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는데.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하물며 방금 유릭은 분명히 보았다.
자신이 불꽃을 피워 올린 그 순간.
그 촌각의 순간에 알프레도의 눈동자가 번뜩이며 자신의 불꽃을 관찰하는 것을.
기의 흐름과 나타난 현상, 피워낸 결과까지 찢어발길 것처럼 관찰당했다.
그가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유릭은 아직 알 수 없었다.
‘뭐 염화신무에 대해서는 모를 테지만.’
최소한 그 점에 대해서만큼은 걱정 없었다.
자신의 불꽃은 초월의 경지에 이른 어머니조차 알지 못했던, 이 세계에선 미지의 불꽃이니까.
“공자. 내가 왜 공자를 찾아왔는지 아시오?”
이내 알프레도가 분위기를 전환하듯 얘기했다.
그 목소리가 방금까지와 비교해서 한없이 가볍다.
마치 이미 목적은 달성했고, 지금부턴 뒤풀이에 불과하다는 듯.
“글쎄. 루카스 아칸의 웃긴 표정 얘기라도 듣고 싶어 왔나?”
“호, 그것도 참 듣고 싶긴 하군.”
서로의 어조가 가벼워진 탓인지 탁, 하고 분위기가 풀린다.
“뭐 그건 다음 기회에 하는 걸로 하고…… 내가 찾아온 것은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러오.”
“뭐지?”
“공자는 다음 대 가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지?”
풀린 분위기에 안도하던 주변 사람들이 다시금 얼어붙었다.
하지만 변하는 상황에 전전긍긍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뿐.
정작 대화를 하는 두 사람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기까지 했다.
“다음 대 가주? 그걸 왜 묻지?”
“오해는 마시오. 가주님은 아주 건재하시고 나도 별다른 뜻이 있어 물어본 것은 아니니까. 단지 공자가 가문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할 뿐이오.”
과연.
무슨 맥락으로 들고 온 이야긴지 얼추 감은 왔다.
유릭 본인은 가주가 될 생각이 없고, 사실 그럴 수도 없다.
아무리 경지를 높이고 공을 쌓는다고 해도 서리명가의 가주가 화염술사라니,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하지만 그런 유릭이라도 누굴 지지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차기 가주에게 영향을 줄 수는 있었다.
가주 대행으로 착실히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장녀인 엘린이냐.
아니면 기연관에서 초대의 검을 받아 정통성을 확보한 데릭이냐.
‘무슨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도 아니고.’
유릭이 헛웃음을 뱉었다.
정작 누나나 데릭 본인은 생각도 없는데 주변이 더 난리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었다.
“공자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엘린 공녀가 탈 없이 가주가 되겠지. 반대로 공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어쩌면 데릭 공자가 가주가 될지도 모르오.”
“나한테 그 정도 영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암튼 계속해 봐.”
“그런데 공교롭게도 데릭 공자와 공자는 쌍둥이가 아니오? 흠…… 어쩌면 무척 재밌는 사태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말이오.”
“…….”
유릭의 표정이 굳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분명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거겠지만- 알프레도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 왜 이야기책에 흔히 등장하지 않소? 서로 꼭 닮은 왕자와 거지가 바뀌는 그런 책도 있고.”
“……그게 뭐 어쨌다고?”
“본디 세상일이 책보다 기이할진대, 가문의 미래를 걱정하는 신하 된 도리로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소?”
유릭의 손이 반사적으로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러곤 엑셀레아를 발검하며 단숨에 알프레도를 찔렀다.
그 검에 소용돌이가 모이며 일점(一點)을 향한다.
사막에서 7성의 화염술사 셋의 함정을 꿰뚫은 엑셀레아의 찌르기.
바람을 휘감은 그 검은.
캉!
알프레도가 가볍게 뽑은 검에 너무도 쉽게 막혀 버렸다.
유릭이 혀를 찼다.
당연히 안 될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볍게 막히다니.
“공자?”
“한 가지는 잘 알겠어, 단장.”
“뭘 말이오?”
“단장이 그 알량한 실력만 믿고 할 말 못 할 말 안 가린다는 거.”
유릭이 이를 갈았다.
분명 만나기 전에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먼저 화를 내는 것이 결국은 지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 노회한 늙은이는 기어코 유릭의 열을 뻗치게 하였다.
“알량한 실력이라기엔 공자의 검은 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있소만.”
알프레도는 때는 이때라는 듯 유릭을 더 도발하였다.
“당신의 질문에 답해주지.”
하지만 이미 유릭은 조금 침착을 되찾은 후였다.
물론 분노가 가라앉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 적은 아칸이 아니다.”
“…….”
주변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정작 알프레도 본인은 가만히 듣고만 있다.
아까 불꽃을 관찰할 때와 똑같은 그런 눈으로.
“내 가족을 건드리는 놈들 전부. 그게 내 적이다. 아칸이든, 아니면 가문의 기사단장이든 관계없이.”
“오해가 있군. 나 역시 가문의 미래를 위해…….”
“내 말 똑바로 안 들었나? 가문이 아니라 가족이라고.”
“!”
그때야 처음으로 알프레도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가문 뭐 중요하지. 내 가족을 지키고 있는 울타리니까. 하지만 울타리를 지키겠다고 집을 날리는 사람은 없잖아?”
“……그 울타리는 수백, 수천 채의 집으로 이루어져 있소. 그걸 저버릴 수 있겠소? 단 한 채의 집을 위해?”
“그게 내 집이라면.”
유릭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회귀 전 그가 대한민국에 살던 정우일 때, 그에겐 가족이 없었다.
가족처럼 지내던 시설의 동생들이나 원장님은 계셨지만 그래도 결국은 남이다.
결국 정우는 혼자였다.
그리고 회귀 전, 그가 무기력한 유릭으로 살던 때도 마찬가지다.
엘린은 그때도 유릭을 어여삐 여겨주었으나, 그래도 볼모로 팔려가는 것을 막아주진 못했다.
오히려 그녀 역시 돌아온 아이작의 공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쩔쩔매고 있었었지.
적지인 아칸의 한복판에서 유릭은 혼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무려 두 번의 인생을 거쳐 세 번째 와 처음으로 얻은 가족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의 목숨을 갖다 대어도 이걸 비견할 수 있을까?
“어머니나 누나나 데릭이나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스스로쯤은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 그건 단장이 더 잘 알고 있지?”
“……그렇소.”
모를 리가 없다.
알프레도는 발렌티나도 엘린도 데릭도, 그 모두를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보아왔던 자다.
그야말로 가문의 역사와 함께한 노인.
그 노인을 향해 유릭이 얘기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누가 지켜주지?”
“…….”
알프레도가 꾹 입을 다물었다.
유릭은 이 이상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 뜻은 충분할 정도로 전해졌다.
영웅은 세상을 지키지만 세상은 영웅을 지켜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 되겠노라고.
그게 유릭의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