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76화
76화. 뭘
-한 가지만 말해주마.
얼마 전 어머니의 비밀에 대해 물었을 때, 레오폴딘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발렌티나에겐 아무 죄가 없다. 그 아이가 너를 해하는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없을 것이야. 이 할애비의 목을 걸고 얘기하마.
유릭은 그것만으로 충분히 납득하고 물러섰다.
더 이상 어머니의 비밀인지 뭔지 관심도 없었다.
‘형님…… 아니, 아이작. 너도 선을 넘었어.’
사막에서의 일을 계기로 유릭이 아이작에게 살의를 품게 된 것도 결국 이것 때문이다.
놈은 그 세 치 혀로 자신의 집을 무너뜨리려 하였으니까.
방금 알프레도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직 선은 넘지 않았지만, 간당간당한 부분까지 올라가긴 했었다.
물론 우연이 아니라 일부러 그렇게 수위를 조절한 것일 테지만.
“……어릴 때의 가주를 보는 것 같군.”
“뭐?”
“아무것도 아니오.”
알프레도가 천천히 검을 거뒀다.
그러고는 놀랍게도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유릭에게 허리를 숙였다.
“공자의 뜻은 잘 알겠소. 오늘 했던 모든 무례에 대해 사과하지.”
“그게 끝이야?”
“사죄의 뜻으로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소.”
“뭘.”
“앞으로 나나 내 밑의 것들이 공자의 집을 건드리는 일은 없을 것이오.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중엔 말이오.”
본인뿐만 아니라 아랫사람의 단속도 확실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유릭이 입가를 씰룩이며 엑셀레아를 검집에 넣었다.
그 광경을 알프레도가 우묵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유릭이 검을 넣은 것을 기점으로 정말로 날카로운 공기는 풀려왔다.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알프레도의 볼일은 모두 끝난 것 같다.
이제는 유릭이 볼일을 볼 때였다.
“그러고 보니 내 검을 봐주러 왔다 하지 않았나?”
사실 유릭으로선 이쪽이 본론이었다.
“검이라면 아까 충분히 보았소.”
홧김에 엑셀레아를 뽑아 찌른 그때.
그 한 수만으로 알프레도에겐 충분히 유릭의 검이 보인 모양이었다.
“어떤데?”
“…….”
알프레도가 말을 멈춘다.
유릭이 의아해하며 눈을 찌푸릴 때쯤 그가 얘기했다.
“내가 가르칠 건 없더군.”
“가르칠 게 없어?”
“공자에겐 이미 뛰어난 스승이 있고 그 가르침대로 잘 따르고 있다고 보이오. 괜히 제삼자인 내가 끼어들었다간 오히려 좋지 않을 테지.”
유릭이 갸웃했다.
스승이라니 무슨 소리야?
“혹시 아니스 말이야?”
생각나는 인물이라곤 그녀뿐이지만, 알프레도는 부정의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스승이란 것이 꼭 살아 있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지.”
그제야 유릭은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염화신무의 비급을 얘기하는 것이겠지.
‘잘하고 있다는 뜻인가.’
동시에 염화신무의 완성도가 알프레도 정도의 검사라고 하여도 별다른 첨언을 할 게 없을 만큼 높다는 뜻이리라.
대단한 무공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확답을 들으니 또 기분이 묘하다.
“흠…… 그럼 추천할 만한 수련 장소라도 어디 없어? 요새 폐관에 들까 생각 중인데.”
“공자의 수준이라면…….”
알프레도가 유릭의 위아래를 훑듯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심 끝에 이런 답을 하였다.
“적색 지대를 추천하오.”
“칠색의 마경의?”
“끝자락이지.”
적색 지대라…….
유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곳이라면 수련 효과 하나만큼은 대단할 것 같다.
한동안 적색 지대와 관련하여 몇 가지 질의응답이 오고 갔다.
얼추 듣고 싶은 것을 모두 들었을 때쯤.
“그러고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유릭이 물었다.
“임무를 다녀온 후에 녹시아를 휘둘러보니 어긋남이 좀 느껴졌었는데…….”
질문의 내용은 마크에게 한 번 물었었던 그것.
마크에게 상담을 했던 내용까지 포함해 유릭이 모두 얘기했다.
“마크는 그게 검이 삐진 거라고 하더라고.”
유릭이 피식 웃으며 농을 던지듯 얘기했다.
“흠, 그럴 수 있지.”
“응?”
그런데 예상외로 알프레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반응을 보이니 오히려 유릭이 당혹스러웠다.
“그럴 수 있다니, 삐진 게?”
“토라지지 않게 잘 돌봐주시오. 그게 주인의 의무이기도 하니.”
유릭이 입을 벌렸다.
뒤쪽을 보니 이자크도 다른 제자들도 의문 하나 보이지 않고 납득하고 있다.
‘아니, 내가 이상한 거야?’
외눈박이 마을에선 눈이 두 개인 것이 비정상이라 했던가.
딱 그런 느낌에 유릭이 눈을 깜빡거렸다.
* * *
그날 저녁.
알프레도는 술 한 병을 들고 레오폴딘의 거처를 찾았다.
“크하하하! 멍청한 녀석, 내 손주를 물로 보고 갔다가 되레 당하고 왔구만!”
“쯧.”
폭소하는 레오폴딘을 보며 알프레도가 크게 혀를 찼다.
과거 어린 시절 그들은 절차탁마하던 친우였으나 레오폴딘이 가주에 오르며 충성스러운 군신의 관계가 되었었다.
하지만 이미 은퇴를 한 지금에 와선, 다시 어릴 때와 같은 친우로 돌아간 그들이었다.
“내기는 나의 승리로군.”
“딱히 뭘 걸지는 않았지만 말이지.”
그것은 아주 오래된 내기.
본디 로스카 또한 다른 흔한 명문가와 같이 형제 다툼이 심한 곳이었다.
아예 대놓고 조장하는 아칸까지는 아니었지만, 가주가 되지 못한 형제는 가문을 나가야 하는 전통이 있을 정도였다.
나간다고 하지만 사실상 추방이나 마찬가지인 일.
그건 레오폴딘의 대에도 마찬가지였고, 그의 형제들은 모두 추방당해 다신 고향의 땅을 밟지 못한 채 객지에서 명을 다했다.
어린 나이에 형제들을 모두 물리치고 가주직에 오른 레오폴딘.
그때 그는 알프레도의 앞에서 맹세했다.
이런 일은 자신의 대에서 끝이 날 거라고.
알프레도는 수백 년의 전통,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얘기하며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라 얘기했다.
내기는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무 배팅도 없는 둘만의 내기가.
“그 아이를 보다 보니 가주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더군.”
“발렌티나의?”
“가주도 결국 발터 하나만큼은 가문에 남길 수 있었지.”
발렌티나가 가주에 오를 때도 당연히 형제들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당시 발렌티나는 초월에 오르지 않은 그저 평범한 가주였고, 수백 년 전통을 들먹이는 신하들 앞에서 발언력이 강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보다 나이가 많은 형제들은 모두 쫓겨났지만.
그래도 그녀는 남동생인 발터 하나만큼은 남겼다.
비록 단 한 명뿐이지만 아주 의미가 깊은 한 명이었다.
오랜 전통을 깬 하나의 상징이었으니까.
“레오폴딘. 넌 정말로 모든 것을 이뤄냈구나.”
그간의 수십 년을 돌아보며 알프레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레오폴딘 로스카.
그는 가주가 되겠다 선언하고는 기어코 그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가문의 오랜 악습을 깨겠다 선언하곤 그것을 이루어내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그는 목표했던 모든 것을 이뤄냈다.
이제는 흘러가는 세월을 지켜보는 일만 남았을 뿐.
“크흐흐, 이제야 내 대단함을 안 거냐?”
“쯧…… 오늘만큼은 인정하마.”
두 사람이 술잔을 부딪쳤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두 노인.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검을 맞대며 미래를 꿈꾸던 소년 시절의 두 사람이었다.
* * *
그날부로 가문 내에 소문이 쫙 퍼졌다.
다름 아닌 태상 가주의 친우이자 3기사단의 단장인 알프레도가 유릭에게 고개를 숙였단 소문이었다.
“대체 뭔 마법을 부린 거냐?”
“몰라도 돼.”
당연히 데릭 역시 그 소문을 들었고 놀란 듯이 유릭에게 물었다.
물론 유릭은 말해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알프레도 본인이 퍼뜨린 소문이겠군.’
소문의 진원지는 아마 알프레도 본인일 것이다.
그의 제자들이 나서서 스승의 소문을 퍼뜨릴 리는 없을 테니까.
그 말은 즉, 이 소문은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일종의 지령인가.’
알프레도를 따르는 강경파 인사들에게 유릭을 건드리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
이전 날 했던 약속을 지킨 셈이다.
“그나저나 이제 출발이냐?”
문득 데릭이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유릭에게 물었다.
본인 몸보다도 커다란 배낭.
이전부터 얘기하던 폐관 수련에 들 거라던 그것이리라.
“응. 단장한테 괜찮은 장소를 들었거든.”
유릭이 손짓하니 하얀 새끼 호랑이가 냉큼 올라타 그의 품속에 들어갔다.
“어딘데?”
“적색 지대.”
마경의 끝에 있는, 가장 혹독한 장소인 적색 지대.
이제 출발의 때가 왔다.
* * *
며칠이 지난 후.
유릭은 주홍빛의 오로라를 넘어 붉은빛의 오로라가 펼쳐져 있는 적색 지대에 당도했다.
적색 지대는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이었다.
상상으론 하늘이고 땅이고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정신병이라도 걸릴 것 같은 곳인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아름다웠다.
하늘의 오로라는 핏빛처럼 붉은 것이 아니라 기품 있는 커튼처럼 빛나고 있었고, 그 빛을 반사하는 얼음의 땅은 말 그대로 보석 그 자체였다.
지구에 있는 관광지였다면 쉴 새 없이 관광객들이 몰려들 만한 그런 장소.
단지, 이 미친 듯한 추위만 없었다면 말이다.
“으으…….”
덜덜, 턱이 절로 떨려오며 이빨이 맞부딪친다.
지금 유릭은 불의 기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화룡검화를 피워 올려 전신에 두른 상태이다.
말하자면 불의 오러를 두른 느낌인데…….
‘왜 이렇게 추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색 지대의 한파는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알몸으로 남극 바다에 온 것처럼 뼈가 굳고 피부에 서리가 낀다.
불의 오러를 두르고 있는데도 이 정도라니, 만약 염화신무가 없었다면 들어올 엄두도 나지 않았으리라.
-추워요?
“너, 넌 안 춥냐?”
하도 떨다 보니 말까지 떨려온다.
-전 괜찮죠. 어르신의 불꽃도 있고.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메르가 드래곤이라지만 ‘고행’ 중에는 그 생물이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밖에 쓰지 못한다 하였다.
아니, 정확히는 ‘못’이 아니라 ‘안’ 쓰는 거였던가? 일족의 규칙이 어쩌고 하는 이유로.
여하튼, 지금 폴리모프한 새끼 호랑이 수준의 능력으로 이 추위에서 아무렇지 않다니?
아무리 봐도 의아한 생각에 그가 배낭 속의 메르를 보니.
“메르? 이거 너야?”
배낭 속에 든 것은 새끼 호랑이가 아니라 웬 하얀 털실 뭉치였다.
-네? 부르셨어요?
그 털실이 꼼지락거리더니 고개를 내민다.
메르가 맞았다.
“너 안 춥다는 게 이거 때문이었어?”
-마나로 털을 좀 자라게 해봤어요. 보온 효과가 탁월하도록 털에 마나도 좀 넣었구요.
“아니, 너 호랑이가 못 쓰는 마법은 못 쓴다매?”
-털은 원래 자라는 건데요.
“마나는 못 넣잖아!”
-대령도 마나로 털가죽을 강화하는 정도는 하잖아요.
“그건…… 맞긴 한데…….”
무언가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밀려왔다.
이 추위 속에서 함께 떨고 있는 줄 알았더니, 알고 봤더니 추운 것은 자신 혼자뿐이었다니…….
“야, 메르.”
-넹?
“기르는 김에 좀 더 길러봐.”
-조금 정도는 괜찮은데…… 어느 정도나요?
“잘라서 목도리랑 장갑이랑 양말이랑, 음…… 아, 속옷도 짤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는 안 돼요!
“왜 안 돼!”
-호랑이한테 그렇게 털을 기르는 능력이 어디 있어요!
“털에 마나 넣어서 보온하는 능력은 있고?”
-아무튼 안 돼요! 싫어요!
한참을 메르와 실랑이를 벌였으나 결국 털을 얻어내는 것엔 실패했다.
“씁.”
유릭이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덕분에 한 가지 합의는 했다.
털 뭉치 상태의 메르를 목에 둘러 목도리 대신으로 쓰는 정도로.
“훨씬 낫네.”
이 정도만 돼도 아까보단 나았다.
손발은 아직 추운 그대로였지만 목이라도 따뜻했으니.
-으으…… 저는 몸을 펴게 돼서 좀 추워졌어요…….
“그 정도는 참아.”
혼자만 배낭 속에서 웅크린 채 따뜻하다니, 그런 치사한 일을 봐줄 수는 없다.
유릭이 적색 지대를 가로지른다.
장난치면서 걷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 이 순간에도 유릭은 상당한 신경을 내기의 운용에 집중하고 있었다.
‘화룡검화를 풀었다간 얼어 죽겠는데.’
어째서 알프레도가 이곳을 추천했는지 알 것 같다.
24시간 내내 오러를 두르고 있어야 하는 장소라니.
그래도.
“후우…….”
그러니 더욱 수련이 되는 것이겠지.
유릭이 망설임 없이 적색 지대 깊은 곳을 향해 발을 옮겼다.
목적지는 알프레도가 얘기한 적색 지대에 위치한 유적.
‘서리거인의 안식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