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77화 (77/166)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77화

77화. 잠깐 흔들렸나

가혹하다는 것은 즉 그만큼 수련 효과가 보장된다는 뜻.

지금 당장은 얼어 죽어버릴 것같이 고통스럽지만 수련이라 생각하면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새 상처는 좀 어때. 잘 낫고 있어?”

메르를 주워온 이후로 유릭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메르의 상처를 봐주고 있었다.

메르의 상처에 달라붙어 있는 질척이는 검은 기운.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 누그러진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눈에 띄는 차도는 아니기에 잘 낫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요! 특히 사막에 다녀온 이후론 어르신의 불꽃도 꽤 강해져서 훨씬 빨리 낫고 있어요.

“오, 그래? 그러면…….”

-이 정도면 27년 정도면 나을 것 같아요!

“……그렇구나.”

유릭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까마득한 세월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녀석이다.

‘그래도 확실히 치료가 빨라지긴 했나 보군.’

처음 만났을 때 30년이라 하였는데, 그로부터 1년가량이 지난 지금은 27년이 남았다 한다.

단순 계산으로도 속도가 3배는 빨라진 셈이다.

이대로 자신이 더욱 강해지면 완치까지의 기간도 많이 줄어들겠지.

-근데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그냥 헤매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메르가 물었다.

자신의 발걸음이 뚜렷한 목적지를 가지고 있음을 느낀 모양이다.

“알프레도가 알려준 장소가 있어. 서리거인의 안식처라는 장손데, 마물들이 접근하지 않는 유적이 있대.”

유릭이 향하는 장소는 서리거인의 안식처라고 불리는 곳.

과거 칠색의 마왕 크레마뉴의 오른팔 격의 마인이었던 서리거인이 쓰러져 묻힌 땅이다.

로스카에선 알 사람은 아는 나름 유명한 장소기도 했다.

-수련하려면 마물이랑 박 터지게 싸워야 하지 않아요?

“그것도 할 거야. 그래도 1년 내내 싸울 수는 없잖아? 몸 뉠 곳 정도는 있어야지.”

이미 발굴이 끝난 유적인 만큼 뭐가 있지는 않다.

다만 유적 자체의 효과로 주변 마물이 자동으로 몰아내진다 하였다.

원리는 무엇인지 모른다.

듣기로 고대 마왕의 술식이 유적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가 있으나 결국 발견되지는 않았다.

지난 수백 년간 가문의 조사대가 수십 차례나 왔으나 그런 술식 따위는 없었다.

결국 요즘에 와선 발굴지가 아닌 일종의 거점으로 쓰이고 있었다.

적색 지대에 탐사나 볼 일이 있어 올 때 자리 잡는 장소.

-술식이 새겨져 있다면 반드시 발견되었을 텐데요. 아무리 숨긴다고 해도 자연을 비트는 것인데, 수백 년을 위화감 없이 숨기는 건 무리예요.

“그건 그렇지. 넌 어때? 뭐 알겠어?”

-흠…… 아마 그런 게 아닐까요?

“뭔데.”

-서리거인이 죽은 땅이라고 하셨죠? 그때 흘린 피가 대지에 깃들어서 자연스럽게 마물을 내쫓는 게 아닐까요?

“피라…….”

그럴듯한 얘기긴 했다.

그 왜, 산짐승의 접근을 막기 위해 더 강한 맹수의 피나 배설물을 뿌려 놓는 그런 방법이 있다고 하지 않은가.

마왕의 오른팔 격인 존재였다면 그 잔향만으로 어지간한 마물 따위는 범접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게 수백 년이나 유지되는 건 과연 놀라운 일이긴 했지만.

-그나저나 배 안 고프세요?

“아니, 아직. 유적에 도착하고 먹을 생각인데 왜?”

-아, 아뇨, 그냥요…….

메르가 말끝을 흐리며 배낭을 슬쩍 쳐다보았다.

안 봐도 훤하다. 챙겨온 퀴라스산 육포를 탐내고 있는 거겠지.

“먹는 건 좋은데 아껴 먹어. 1년 동안 먹어야 하니까.”

-하, 하나씩만 먹을게요!

사실 하나씩만 먹어도 모자란다.

안 그래도 챙길 게 많은데 육포를 365장이나 챙겼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굳이 초를 치진 않았다.

떨어져 가는 걸 보면 본인이 알아서 양 조절을 하겠지.

뭐 못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일단 도착부터 하고.”

-네!

유릭이 멈추지 않고 붉은 얼음의 대지 위를 걸었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신발에 박아 넣은 아이젠이 푹푹 얼음을 찌르며 나아간다.

이대로라면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도착하리라.

그런 전망이 보일 때쯤.

-크르르…….

앞에 적색 지대에 사는 마물의 무리가 보였다.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지금 유릭이 가려는 안식처는 마물을 내쫓는 장소.

그 말은 즉.

“그 주변은 오히려 마물들이 훨씬 많다는 얘기겠지.”

밀려난 마물들로 인해 그 일대는 역으로 마물의 밀도가 높다는 뜻이다.

유릭이 피식 웃으며 녹시아를 뽑았다.

어째서 알프레도가 이곳을 추천했는지 알겠다.

마물의 밭이라니, 임무 중이라면 몰라도 수련 중이라면 오히려 좋아할 일이니.

-빨리 처리하고 가죠!

메르도 육포 때문인지 모처럼 의욕을 내고 있었다.

그래봤자 하는 일이라곤 유릭에게 매달려 응원하는 일뿐이지만.

* * *

“카아아아아!”

울부짖는 드레이크.

자그마한 용과 같이 생긴 그 마물은 이 추운 대지에서 잘도 움직이고 있었다.

잔뜩 모여 있는 놈들 사이로 유릭이 헤쳐 지나가고 있었다.

“카아악!”

도중에 한 녀석이 유릭을 잡아먹으려 달려든다.

놈의 강인한 턱이 쩍 벌어지며 유릭에게 쇄도했다.

한 번 물렸다간 살이 파이는 정도가 아니라 몸이 아예 잘근잘근 뜯겨 나갈 것이다.

캉!

놈의 목에 휘두른 녹시아가 청명한 소리를 내며 가로막힌다.

이 거센 한파조차 막아내는 놈의 비늘과 거죽은 녹시아의 검도 무리 없이 막아내고 있었다.

“큭!”

유릭이 이를 악물며 눈을 번뜩였다.

그 순간 검에 두른 화룡이 2배, 3배로 불어나며 억지로 드레이크의 목에 파고들었다.

서걱!

이윽고 잘려 나가는 드레이크의 머리.

그러나 그 전과를 확인할 틈도 없이 유릭은 뛰어야 했다.

놈 외에 다른 드레이크가 귀신같이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카아아아!”

캉!

놈들의 머리를 쳐내며 유릭이 발을 멈추지 않았다.

아까까지 추위로 굳어 있던 몸은 이미 열이 오른 지 오래였다.

아무리 적색 지대의 한파라도 3중첩까지 오른 화룡검화를 두르니 추위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뭐 이렇게 단단해?’

놈들의 단단한 비늘에 유릭이 혀를 찼다.

3중첩이 아니면 베지도 못한다니, 7성 수준이 아니면 적색 지대는 발도 들이지 말라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니, 그런데 알프레도는 그런 지역을 나한테 추천했단 말이야?’

그의 경지에 자신이 6성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는 없다.

그런데 7성 이상의 수련터인 적색 지대를 추천하다니.

‘나름 인정받았다는 뜻인가.’

아니면 로스카의 핏줄이라면 이 정도 차이는 당연히 극복해야 한다는, 그런 뜻인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적절한 추천이었다.

덕분에.

“큭! 좀 떨어져!”

이 정도로 가혹한 환경에서 몸을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카악!”

“크아아아!”

“후우.”

바위처럼 솟아오른 얼음덩이 뒤쪽에 몸을 숨기며 유릭이 숨을 골랐다.

그를 놓친 드레이크들이 인근을 뒤지다가, 이내 포기하곤 흩어졌다.

유릭이 화룡검화를 2중첩까지 내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래도 잘 뚫고 나온 거 같은데.’

아무리 유릭이라도 수십의 드레이크 무리를 한 자리에서 쓰러뜨릴 순 없다.

그래서 마물이 몰린 지역을 뚫는 것을 목표로 했고 다행히 무사히 성공했다.

“저긴가?”

드디어 저 앞쪽, 마물 하나 없는 허허로운 장소에 홀로 솟아 있는 유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빨리 들어가서 밥 먹어요!

“알았어, 알았어. 하루에 하나씩이다?”

-네!

이미 머리에 육포밖에 없는 메르를 데리고 유릭이 유적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딸랑-

“응?”

엑셀레아에 매달아둔 풍령이 한 번 흔들렸다.

바람이라도 불었나 생각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

이곳은 실내였으니까.

‘문턱 넘으면서 잠깐 흔들렸나 보네.’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유릭이 유적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 * *

“정말 적색 지대로 들어갔다고?”

“그렇다고 합니다.”

“허.”

10기사단장 이자크가 전해온 소식에 알프레도는 펜에서 손을 놓고 안경을 벗었다.

서류 작업을 할 때만 쓰곤 하는 안경이었다.

“괜찮은 수련장이 없냐고 물어봐 얘기해 주긴 했다만 이렇게 바로 들어갈 줄이야.”

그가 유릭에게 적색 지대를 추천한 것은 맞지만, 그건 지금 들어가란 얘기가 아니었다.

후일 조금만 더 경지가 높아지면 가볼 만한 장소로 추천한 것이다.

그런데 냉큼 들어가 버리다니?

“역시 아직 도련님껜 이르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당연하지 않으냐? 적색 지대는 너도 가보았을 터이니 잘 알지 않으냐.”

“그건 그렇죠.”

이자크도 과거엔 적색 지대에서 수련했던 적이 있었다.

마스터를 목전에 두었던 7성의 경지일 때, 그 하나의 벽을 뚫기 위해 뭐든지 했었지.

그때 여러 미친 짓들을 했었지만 그중 가장 기억나는 것이 적색 지대에 간 일이다.

온몸의 혈관과 들이마시는 공기마저 얼어붙을 것 같던 그 장소.

그때를 기억하곤 그가 몸서리쳤다.

그건 8성이 된 지금에 와서도 절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수련이고 뭐고 이전에 숨 쉬는 것부터가 힘든데 뭘 할 수 있을까요. 특히 도련님의 경지론 일주일도 채 버티기 힘들 텐데요.”

“그렇겠지.”

6성의 경지면 보통 일주일을 채 버티지 못한다.

가문의 직계이니 어쩌면 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긴 하지만,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겠지.

“설마 그곳에서 얼어 죽진 않겠죠?”

이자크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알프레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멍청한 아이로 보이진 않았다. 정말 위험하다 싶으면 알아서 나오겠지.”

어찌 생각해 보면 다시 한번 유릭을 가늠해 볼 기회일지도 모른다.

과연 유릭이 그 붉은 대지에서 얼마나 버티고 나올지.

‘배짱과 마음가짐은 좋았다만.’

자신의 담뱃대를 태우며 했었던 얘기들이 떠오른다.

마음가짐이나 소신 같은 것들은 두말할 것 없이 훌륭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한 가지 전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실력.’

스스로의 몸을 지키고 소신을 밀어붙일 수 있는 힘.

그게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 위험한 세상을 살아갈 순 없다.

“한 달 정도는 버틸 수 있을까요?”

“그것만 해도 대단한 거지.”

6성의 검사가 적색 지대의 가혹한 환경에서 한 달을 버틴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대단한 일이다.

가문의 기사들은 그 정도의 분투를 보여준 유릭을 보며 로스카의 이름에 긍지를 가지겠지.

그쯤 되면 유릭이 화염 마나를 익혔니 뭐니 하는 문제는 이미 사소한 얘기가 되어 버릴 것이다.

본디 힘이 있는 곳에 사람들은 매료되고 몰리는 법.

화염 마나니 서리 마나니 하는 문제보다 힘과 위업이 주는 매력이 훨씬 큰 법이니까.

‘정말로 가문이 다시금 비상할 기회인 것인가?’

그것은 과거 유릭이 기연관에서 염화신무를 가져왔을 때 발렌티나가 했던 생각과 닮아 있었다.

유릭을 본 알프레도 역시 똑같은 생각에 다다른 것이다.

심지어 염화신무의 존재를 모르는 그였음에도.

‘아니.’

하지만 알프레도는 아직은 고개를 저었다.

시기상조인 생각이다.

모든 것은 유릭의 귀환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3달이 지나도 유릭은 아직 적색 지대에 있었다.

0